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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우수상 당선자 ‘유선아’ 이론비평, 화신, 유령, 필름 메이킹
유선아 2023-07-15

<흡혈귀 강도단>(1915), <이마 베프>(1996), <이마 베프>(2022)를 중심으로

<이마 베프>

‘이마 베프’(Irma Vep)는 <흡혈귀 강도단>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이름이다. <흡혈귀 강도단>은 루이 푀이야드가 1915년과 1916년에 걸쳐 완성한 열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연작영화로 뮈지도라가 연기한 이마 베프는 관능적인 악인이라는 평과 함께 당시 관객의 주목을 받았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바로 이 인물, 이마 베프를 앞세워 루이 푀이야드의 <흡혈귀 강도단>을 영화로 리메이크한다는 내용으로 한편의 영화와 하나의 드라마 시리즈를 연출했다. 영화사에서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흡혈귀 강도단>은 아사야스가 1996년에 연출한 영화 <이마 베프>를 통해 오마주를 바친 이후 널리 알려졌다.

<이마 베프>의 작중 영화감독인 르네 비달은 스탭과 출연진으로부터 대체 왜 <흡혈귀 강도단>을 리메이크하냐는 질문과 여러 번 마주한다. 이상하게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영화 속이 아니라 극장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한해 개봉한 영화 목록에서 눈에 띄는 경향이 있다면 자기 반영성의 영화들이 줄지어 찾아왔다는 것이다. <바빌론>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 시대로 진입하는 시기를 무대로 하고 <파벨만스>는 감독의 유년 시절을 사로잡은 영화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한다. 어떤 이에게 있어 영화로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적인 것이란 어쩌면 지난날의 향수와 가까이 있는 게 아닐까?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영화사에 묻혀 있던 무성영화를 두번에 걸쳐 지금으로 소환했다.

언급한 영화 외에도 몇편의 메타시네마 사이에서 <이마 베프>(1996)에 시선이 오래 머무는 이유는 이 영화가 무려 한 세기도 전인 1915년 파리의 극장에서 첫선을 보인 <흡혈귀 강도단>의 인물에서 시작해서다. 무성영화 시대에 세상에 나온 가상의 인물이 다른 창작자에게 영감과 오마주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지만 동일한 감독에 의해 동명의 <HBO> 드라마 시리즈로 브라운관에 다시 등장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라 여겨진다. 게다가 루이 푀이야드의 <흡혈귀 강도단>은 당시 극장에서 개봉한 열편의 에피소드를 가진 연작영화라는 점, 장만옥을 주연으로 한 아사야스의 1996년작 <이마 베프>는 영화 제작 현장의 이면을 다루는 한편의 영화라는 점, 스트리밍 플랫폼의 등장 이후인 지금 여덟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HBO> 드라마 <이마 베프>는 시리즈라는 점에서 세 작품은 이 시대의 영화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가장 밀접한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다.

세 작품 중 두편이 동일한 감독에 의해 연출되었지만 세 작품에는 각각의 방식으로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기에 당면한 사안을 마주하거나 시대의 한계를 극복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기술적 한계일 수도 있고 작품의 형식이나 분류 방식일 수도 있으며 마침내 관객에게 도달하는 구조와 환경이 되기도 한다. 흡혈귀 강도단의 일원이자 매력적인 악인 이마 베프는 어떤 길을 경유하여 21세기의 스크린과 브라운관(혹은 태블릿 화면)에 당도하는가. 루이 푀이야드의 <흡혈귀 강도단>과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두 <이마 베프> 사이에 있는 맥락은 우리에게 무엇을 제시하는가.

화신

페르소나에 기대어 영화를 전개하는 방식은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여러 전작에서 볼 수 있는 익숙한 화법이다. 쥘리에트 비노슈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2014)에서 지난날 40대 기업인 헬레네를 유혹하는 젊은 여성 시그리드를 연기한 후 20여년의 세월이 흘러 헬레네 역할을 수락한 중년의 배우 마리아 앤더스를 연기한다. 같은 영화에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역할은 마리아 앤더스의 말동무이자 대사 연습 파트너, 개인 비서인 발렌틴이다. 이후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퍼스널 쇼퍼>(2017)에서 유명 인사의 옷을 대신 골라주며 파리에 거주하는 미국 여성 모린이 된다. 쥘리에트 비노슈는 아사야스의 근작 <논픽션>(2019)에서 TV시리즈에 출연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배우의 역할을, 드라마 <이마 베프>에서 영화감독 르네 비달을 연기한 뱅상 매캐니는 자신의 연애담을 소설로 집필하는 작가 역할을 맡았다.

영화 <이마 베프>에서 장만옥은 이마 베프를 연기해야 하는 자기 자신이다. 낯선 프랑스 영화 제작 환경에 놓인 홍콩 출신 배우 장만옥은 매기로 불린다. 이 영화에서 <흡혈귀 강도단>을 리메이크하는 감독 르네 비달의 역할은 장피에르 레오의 것이다. 그는 촬영 현장에서 늘 불만에 가득 차 화를 내거나 극심한 피로에 지친 기색을 숨기지 않는데 이는 장피에르 레오가 프랑스 누벨바그영화의 현신이며 이제 그가 속한 영화 세대가 저물었음을 드러냄과 무관하지 않다. 드라마 <이마 베프>의 주인공은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연기하는 미라 하버그다. 미라 하버그는 막 슈퍼히어로 역할에서 벗어난 할리우드 스타로 르네 비달이 연출하는 <흡혈귀 강도단>의 리메이크 촬영 현장을 프랜차이즈 무비의 도피처로 삼는다.

그런데 왜인지 미라 하버그는 시종 모습을 감추며 어디론가 사라진다. 드라마 <이마 베프>의 첫 번째 에피소드 ‘잘린 머리’에서 검은 슈트 의상을 피팅하던 미라 하버그는 미끄러지듯 조용히 의상실 바깥으로 나가 모습을 감춘다. 그리고 어느 방으로 숨어들어 가방을 뒤지고 지갑을 찾아내다 누군가 방으로 들어오자 재빨리 몸을 숨긴다. 카메라 테스트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카메라 앞에 서야 할 그가 시야에서, 프레임에서 모습을 감춰버린다. 영화 <이마 베프>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파리에서 촬영 중인 매기는 이마 베프의 의상을 입고 호텔 객실로 숨어들어 어느 미국 여행객의 목걸이를 훔쳐 옥상으로 달아난다. 다음날 아침 영화의 의상 담당자가 매기를 깨우러 방으로 들어오는데 그가 발견하는 건 이마 베프의 의상을 입은 채로 침대에서 잠든 매기의 모습이다.

매기와 미라 하버그, 이 두 인물은 극 중에서 이마 베프로 분하고 있으며 어느 순간에는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여 원작의 이마 베프가 되어버린다. 이들이 연기하는 최초의 이마 베프, 뮈지도라가 연기한 인물은 영화 <흡혈귀 강도단>에서 흡혈귀들이라 불리는 범죄 집단의 정신적 지주이자 흡혈귀 강도단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흡혈귀 강도단(Les Vampires)의 애나그램으로 지어진 이름이 그 정체성을 대변한다. 흥미로운 점은 루이 푀이야드의 <흡혈귀 강도단> 속 이마 베프 역시 자기가 아닌 누군가로 끊임없이 위장하면서 변신한다는 것이다. 범죄 조직 단원인 만큼 어쩌면 다른 이로의 변신은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흡혈귀 강도단>의 네 번째 에피소드 ‘유령’에서 강도단의 수장인 대흡혈귀의 변신을 영화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기도 한다. ‘대흡혈귀의 또 다른 화신은 성공한 부동산 중개인 트렙스씨였다.’

원작에서 이마 베프의 첫 등장은 세 번째 에피소드 ‘붉은 암호’에서 이루어진다. 이때 그는 카바레 무대에 선 무희의 모습이다. 같은 에피소드에서 이마 베프는 하녀로 위장하여 흡혈귀 강도단을 쫓는 기자 필리프 게랑드의 집으로 잠입한다.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필리프 게랑드의 끈질긴 추적을 따돌리고 돈과 보석을 훔치기 위해 이마 베프는 은행장의 여비서 쥘리에트, 모르트세그 남작의 조카딸로 행세하거나 기 드 케를로 자작으로 남장을 하기도 한다. 이마 베프와 대흡혈귀가 해치고 둔갑하는 사람들이란 주로 상류층 인사들로 이는 계급주의를 향한 푀이야드의 비판적 시선을 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에 앞서 다른 누구의 모습으로 분한 화신이 캐릭터의 일부를 차지한다는 점은 자신의 분신, 페르소나를 영화에 적극 활용하는 아사야스의 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변하는 것은 이마 베프와 그를 연기하는 배우뿐만이 아니다. 이마 베프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원작을 향한 한번의 오마주와 또 한번의 리메이크를 거치며 변화한다. 원작의 이마 베프는 프랑스영화사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아이콘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에 밀착되는 슈트는 이마 베프의 상징이 되었고 그 상징적 의상은 여전히 그대로다. <흡혈귀 강도단>에서의 이마 베프는 강렬한 인상의 악인, 상류층 인사를 거침없이 살해하고 그들로 변신하는 노동자 계층의 범죄자, 여러 번 바뀌는 수장의 충성스러운 연인으로 그려진다. 그는 흡혈귀 강도단의 중요한 상징이긴 하나 어딘가 수동적 위치에 있는 인물로 해석될 여지 역시 다분하다.

영화 <이마 베프>에는 장피에르 레오가 연기하는 르네 비달과 매기가 이마 베프의 캐릭터 분석의 일환으로 서로 생각을 교환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르네 비달은 원작의 이마 베프를 “그저 대상일 뿐”이라 일축한다. 물론 이는 타성에 젖은 당시 프랑스영화를 비판하며 매기에게서 신선한 변화를 기대하는 의미를 내포한 대사의 일부이도 하다. 이런 르네 비달의 해석에 매기는 의견을 달리한다. 매기의 생각에 이마 베프는 변장한 스파이이자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강인하고 용감한 인물이다. 드라마 <이마 베프>에서는 원작의 이마 베프를 그 역할의 배우인 뮈지도라와 완전히 분리하여 여기지 않는다. 뮈지도라는 프랑스영화사의 한 시기를 대표하는 관능의 아이콘이자 존중받을 만한 아티스트이기도 하지만 이마 베프라는 인물은 뮈지도라의 일부이면서 그가 변신할 수 있는 정수라 평한다.

두편의 영화와 하나의 드라마 시리즈에서 이마 베프를 공통분모로 한 변신, 그리고 그를 읽는 변모하는 시선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복잡하고 정교해진 영화문법 안에서 한 인물을 향한 해석의 전복은 마치 영화사 단면에 있는 어떤 변화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는 것만 같다. 말하자면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화하는 이마 베프의 변신은 각 영화와 시리즈가 등장한 시대에 따라 영화관의 스크린이 브라운관으로 갈라지기 이전과 이후,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상영의 공간적 변화를 따르고 있는 것만 같다.

영화관만이 유일한 플랫폼이었던 시절에 루이 푀이야드가 연출한 <흡혈귀 강도단>의 10부작 에피소드는 연작영화였다. 그러나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의 등장 이후인 지금 제작된 8부작 <이마 베프>는 드라마 시리즈로 분류된다. 이마 베프의 그 처음은 관능과 악의 화신이었으나 영화 <이마 베프>를 거치면서 무기력에 빠진 영화계가 바라볼 수 있는 미지의 가능성의 화신으로 변모한다. 드라마 시리즈의 미라 하버그는 프랜차이즈 무비와 드라마 시리즈, 영화와 화장품 광고판을 오가며 카테고리의 분류를 흐리는 모호한 경계로서의 화신이다. 새로운 화신으로 해석되는 미라 하버그의 이마 베프는 극 중에서 그 자신이 출연한 가상의 프랜차이즈 무비 <둠스데이>가 걷는 길의 대극에 서 있다. 연작 영화의 일종인 프랜차이즈 무비는 영화의 경계 안에 있지만 드라마 <이마 베프>에서 르네 비달이 영화라고 굳게 믿는 <흡혈귀 강도단>의 리메이크 작품은 그 태생으로 인해 예술이라는 영화의 영역 안으로 무혈입성할 수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마 베프가 <흡혈귀 강도단>에 등장하는 인물에 그쳤다면 우리는 새로운 이마 베프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마 베프라는 변신의 귀재, 변모의 화신은 영화의 안과 밖에서 죽음과 탄생을 되풀이한다. <흡혈귀 강도단>의 열 번째 에피소드인 ‘피의 결혼식’에서 그는 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루이 푀이야드는 이마 베프를 연기한 뮈지도라를 자신의 다음 작품인 <주덱스>(1916)에 캐스팅한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장만옥과 알리시아 비칸데르를 각각 이마 베프를 연기하는 배우 역으로 캐스팅하고 이들은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매기와 미라 하버그를 연기하며 이마 베프로 변신한다. 배우의 페르소나와 공생해 온 이마 베프의 화신은 한 세기를 넘어 지금에 도착해 있다. 극이 말미에 이를 때 즈음, 매기와 미라 하버그 역시 차기작 논의를 위해 홀연히 퇴장한다.

<이마 베프>

유령

매기와 미라 하버그의 퇴장은 어딘가 캐릭터의 죽음을 연상시킨다. 죽음 이후의 상태, 유령 같은 그림자만이 주인공이자 주연배우였던 이들의 자리를 희미하게 차지한 채로 막은 내려진다. 프랑스에서 촬영 중인 영화에서 강제 하차하게 된 매기에게는 리들리 스콧 감독과의 만남으로 뉴욕행이 결정되어 있다. 미라 하버그 역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제작에 주연으로 발탁되어 예정보다 하루 앞당겨 파리를 떠난다. 영화와 드라마 <이마 베프>에서 두 배우 모두 이것이 그의 마지막 등장임을 암시조차 하지 않고 사라져버린다. 마치 극 중 배우의 실종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갑작스러운 퇴장은 사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의 이동을 가리키고 있다.

영화 <이마 베프>에는 르네 비달이 프랑스영화를 리메이크하는 데 어떤 연유로 중국 배우를 캐스팅하게 되었는지를 매기에게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이때 장만옥이 실제 출연했던 <동방삼협>의 한 장면이 영화에 삽입된다. 르네 비달은 매기의 출연작을 모로코의 마라케시에 있는 극장에서 보았다고 말한다. 매기는 감독에게 질문 아닌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를) 그런 데서도 틀어요?” 홍콩에서 제작된 영화가 모로코의 마라케시 극장에 걸리는 초국가성, 이는 이마 베프에게 전이되며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그의 이동은 영화의 물성과도 결탁한다.

매기의 출신지는 원작의 이마 베프가 프랑스 배우였기 때문에 역할에 적합하지 않다는 평을 듣거나 많은 이가 왜 하필 중국 배우를 캐스팅했는지 의문하는 사유를 제공하는 단초가 된다. 매기는 철저하게 이방인으로 다뤄진다. 영화의 편집본 시사가 끝난 후 그는 낯선 도시에서 혼자 힘으로 도저히 어딘가로 갈 수 없는 처지로 그려진다. 모두가 부랴부랴 떠나버린 곳에서 매기는 간신히 의상 담당자 조이와 마주쳐 그의 도움으로 시사 장소를 벗어난다. 결정적으로 매기의 이마 베프에게는 언어가 주어지지 않는다. 영화 <이마 베프>에서 르네 비달이 리메이크하려는 영화는 <흡혈귀 강도단>과 똑같은 무성흑백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기는 자신의 얼굴로만 남는다. 이때 매기의 얼굴이 가지는 지역성, 국가적 정체성은 프랑스인이 연기한 이마 베프를 중국인 배우가 연기한다는 대담한 전환에 그 방점이 있다.

반면에 미라 하버그는 스웨덴 출신의 배우로 그에게는 영어 대사가 주어진다. 프랑스에서 프랑스인 스탭과 협업하는 미라 하버그에게는 뚜렷한 이국의 정체성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매기의 경우와 달리 그의 출신 지역성은 오히려 지워진다. 영어로 연기하는 미라 하버그는 대중에 널리 알려진 미국 배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미라 하버그에게는 매기에게 없던 것이 또 하나 주어진다. 미라 하버그 역시 매기가 그랬듯 촬영장이 아닌 곳에서도 이마 베프의 의상을 입고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 그 자체로 변신하지만 드라마 <이마 베프>에서 미라 하버그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몸을 움직였던가. 역할의 몰입으로 이뤄진 캐릭터로의 완벽한 변신은 전에 없던 놀라운 능력으로 발현된다. 그 능력이란 벽을 통과해 소리 없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미라 하버그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자유롭게 떠다닐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의 이마 베프는 슈퍼히어로보다는 유령에 가깝게 진화한다.

그렇다면 원작의 이마 베프는 어떨까. <흡혈귀 강도단>에서 그는 여러 번 그 종말과 죽음이 암시되었다가 다시 그만큼 부활하여 돌아온다. 흡혈귀 강도단의 수장이 몇번이나 바뀌는 동안에도 이마 베프는 계속해서 살아남는다. 파리 시내 원경이 보이는 촘촘한 지붕, 망망대해와 기찻길, 어느 귀족의 응접실과 구석진 싸구려 카바레 무대를 가로지르는 뮈지도라의 이마 베프 또한 신출귀몰하여 종잡을 수 없는 존재다. 이곳에서 태어나 저곳을 떠도는 유령성은 모든 세대의 이마 베프가 공유하고 있는 특징이다. 이렇게 볼 때 유령의 은유가 품은 진정한 대상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이미지의 유동성을 내포한다.

<흡혈귀 강도단>의 이마 베프가 이동하는 장소들이란 파리 시내 아니면 교외의 어딘가로 한정되어 있다. 영화 <이마 베프>에서 매기의 얼굴에는 그가 가진 지역성이 마치 영화의 제작 국가를 표기하는 꼬리표처럼 그를 따라다닌다. 미라 하버그에게서는 출신지와 연관된 정체성이 지워진 대신에 벽을 통과하여 자유로이 오가는 일이 가능해진다. 디지털화되기 이전 상영본의 이동과 그에 따른 상영 방식은 이마 베프의 움직임에 단계적 자유를 부여한다. 이제 이미지의 전파는 더이상 물질의 이동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원작의 이마 베프가 파리 도시 내에서 국지적 이동의 성격을 띠었다면 영화 <이마 베프>는 국경을 넘어 이동하고 드라마 <이마 베프>에 이르러 마침내 물질을 초월한다.

이마 베프의 유령적 속성을 오늘날 극장과 온라인 플랫폼을 선택해 관람할 수 있는 영화 경험에 빗대었을 때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보태어 설명하려면 아사야스의 전작을 빌려올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퍼스널 쇼퍼>의 모린은 파리에 살고 있는 미국 여성이다. 모린은 파리지엔 유명인의 개인 쇼핑을 도우며 생계를 유지하는데 쌍둥이 오빠 루이스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파리에서 사망하자 그곳에 머물며 죽은 루이스가 보내는 메시지를 찾기 위해서다. 자신을 영매라고 소개하는 모린은 루이스가 지내던 집에서 그 영혼이 보내는 흔적을 찾기 위해 밤을 지새운다. 그러던 중 모린은 어떤 영혼을 보게 되지만 그 영혼은 루이스가 아니었고 낙심한 모린은 파리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떠나기 하루 전날 루이스와 연인 사이였던 라라의 집에 머물던 모린은 뒤편으로 부엌 유리창이 보이는 정원에 앉아 있다. 그 창가로 모린이 기다려왔던 루이스의 영혼이 마침내 유리컵을 들고 나타난다. 모린이 루이스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이 영혼은 유리컵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사라진다. 모린은 소리에 놀라지만 그것이 조금 전에 다녀간 라라의 새로운 남자 친구가 부주의하게 올려둔 유리컵이 떨어진 것이라 여긴다. <퍼스널 쇼퍼>의 마지막, 오만의 한 도시에 도착한 모린은 그곳에서 다시 영혼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와 대화한다. 영혼은 그렇다는 의미로 벽을 한번, 아니라는 뜻으로 벽을 두번 두드려 모린에게 답한다. 모린은 그것이 루이스가 아님을 느끼고 영혼에게 묻는다. “루이스, 너 맞아? 아니면 그저 내 상상인 거야?” 그러자 벽을 한번 쿵 두드리는 소리가 울리고 허탈함과 후련함이 동시에 떠오르는 모린의 얼굴에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이 영화에서 유령이 던지는 메시지는 이렇다. 현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오로지 수신자의 몫이라는 것.

다시 영화 <이마 베프>의 마지막 장면이다. 감독 르네 비달은 아내와 언성을 높이며 싸우다 물의를 빚고 만다. 결국 영화 촬영에서 중도 하차한 르네 비달 대신 호세 무라노가 연출을 맡는다. 새로 교체된 감독과 함께 르네 비달의 가편집본을 시사하는 날 모두는 어리둥절한 화면과 마주하게 된다. 컷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지 않고 카메라는 어지럽게 흔들린다. 게다가 괴상한 낙서와 알 수 없는 도형이 매기의 얼굴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당혹스러운 르네 비달의 편집본은 이런 의심을 낳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영화를 온전히 완성하려는 의도일까 아니면 파괴하려는 의도일까. 기억할 것은 그 필름에서 매기, 이마 베프의 얼굴이 점차 희미해져 끝내 유령의 얼굴로 남았다는 것이다.

필름메이킹 - 시네마와 비(非) 시네마 사이에서

그래서 한 차례의 오마주와 또 한 차례의 리메이크가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영화와 드라마 <이마 베프>는 <흡혈귀 강도단>을 리메이크하는 촬영 현장을 무대로 하기에 영화를 성실하게 고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한 작품 안에 묶인 여러 기여자들은 영화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이런 장면이 있다. 영화 <이마 베프>에서 매기를 살뜰히 챙기는 의상 담당자 조이는 르네 비달 감독의 전작을 화제로 매기와 대화를 나눈다. 매기는 감독의 전작을 어렵게 구해서 보긴 했지만 그마저도 자막이 없어 보기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조이는 이렇게 대꾸한다. “그래도 이미지는 봤잖아요?”

영화는 이미지의 언어이고 루이 푀이야드의 <흡혈귀 강도단>은 무성영화다. 서사의 주요 골자는 기자인 필리프 게랑드가 흡혈귀 강도단을 추적하면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범죄를 수사, 탐문하는 과정은 탐정물과 닮았지만 이 영화는 장르 공식이 세워지기 이전의 영화다. 그래서 강도단원이 무고한 자들을 독살하고 잔인하게 살해하며 자른 시체의 머리가 화면에 전시되지만 슬랩스틱 코미디를 연상하게 만드는 조력자 마자메트, 짙은 메이크업과 과장된 연극적 표정으로 표현주의 영화의 면모를 드러내는 이마 베프, 배우들이 시시때때로 카메라 렌즈와 눈을 맞추는 어설픈 구석 역시 이 영화 안에 공존한다.

분명히 <흡혈귀 강도단>에는 엉성한 설정과 서사적 구멍이 엿보인다. 영화와 드라마 <이마 베프>에서 영화사 초기 작품에 해당하는 <흡혈귀 강도단>에 드러난 허점을 지적하기도 하는 건 그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무성영화의 진정한 백미는 이미지에서 전달되는 역동성에 있다고 믿게 된다. 종종 난데없는 타이밍에 드러나는 기상천외하고 과감한 액션이나 폭발 장면으로 표현되곤 하는 강렬한 에너지야말로 푀이야드가 한 세기 전 극장을 찾은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창밖으로 내민 고개를 밧줄로 낚아채 필리프 게랑드와 그 부인을 납치하거나 모레노의 최면에 걸린 이마 베프가 2층 난간에서 낙하하는 장면,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리거나 카바레와 배를 폭파하는 장면들이 그러한 의지에 해당될 것이다. 루이 푀이야드는 무성영화에 주어진 태생적 한계를 안고서 이미지의 역동성을 전달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듯 보인다. 소리 없는 흑백의 운동 화면에서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스펙터클을 <흡혈귀 강도단>은 지니고 있다.

반면 영화 <이마 베프>는 대중의 선호가 급등한 장르영화와 할리우드영화의 거센 영향 아래 작가주의 영화가 직면한 위태로움을 주요하게 다룬다. 영화 버전의 감독 르네 비달이 마주한 문제란 시대와 대중의 요구에서 비껴간 예술영화를 어떻게 산업 구조 안에서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인가이다. 결국 그는 상황을 헤쳐나가는 데 실패하고 연출자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영화 제작은 중단되지 않고 호세 무라노가 감독 자리를 차지한다. 작가주의 영화에 작별이 고해지는 순간이다. 푀이야드의 <흡혈귀 강도단>이 당시 영화 기술의 범위 안에서 실현할 수 있는 이미지 언어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한계를 극복했다면 영화 <이마 베프>는 1996년 당시 비주류 영화의 의미를 고찰하는 것으로 절반의 낙관과 절반의 비관을 드러낸다.

드라마 <이마 베프>에는 아주 새롭지는 않더라도 조금은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장면이 반복된다. 미라 하버그와 촬영 신을 논의하는 르네 비달은 휴대폰 화면으로 루이 푀이야드의 <흡혈귀 강도단>을 재생한다. 영화가 영사의 영역을 벗어나 재생된 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흑백무성영화를 휴대폰으로 재생하는 장면은 어딘가 낯설다. 게다가 감독과 조감독, 배우와 스탭이 휴대폰과 태블릿 화면으로 그날의 촬영분을 확인하는 장면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르네 비달은 완성된 신을 자신의 휴대폰으로 감상하고 흥분으로 감탄해 내릴 곳을 놓칠 뻔하기도 한다. 이런 흐름에서 브라운관은 물론 온라인 스트리밍이 예정된 시리즈 제작 환경이 마주한 사안은 <흡혈귀 강도단>을 포함한 모든 영화가가 고민했을 지점과 다르지 않다. 관객에게 이미지의 정념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당연하게도 답은 제시되지 않는다. 오히려 당면한 사안에서 더 나아가 창작자는 영화의 관객이 시대의 중요한 사안을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또 다른 고민과 마주하게 될 뿐이다. 그렇다면 시청률과 시청자의 의견을 염두에 두려는 마음가짐은 자신의 길을 가는 예술과 멀리 떨어진 자세일까. 드라마 <이마 베프>는 예술의 경지로 남으려는 영화와 플랫폼의 빈자리를 채울 뿐인 콘텐츠로 전락하지 않으려는 시리즈가 직면한 쉽지 않은 고민을 필름메이킹의 현장을 속속들이 드러내는 것으로 풀어낸다. 그래서인지 영화와 드라마 <이마 베프>에서 묘사하는 영화 촬영 현장은 어딘가 소란스럽다. 서로 간에 불신과 막말이 오가고 때로는 제작자의 압박에 분노를 참지 못하거나 감독과 주연배우가 말다툼을 하다 몸싸움으로 번지기까지 하는 스트레스의 현장이 바로 사람들이 부대끼며 영화를 만드는 곳으로 그려진다. 이 난장을 요약한다면 한편의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몰입과 비몰입이 교차하는 순간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흡혈귀 강도단>에서 모레노가 이마 베프를 납치하는 ‘최면을 거는 눈’은 영화 <이마 베프>에서도 오마주 했던 에피소드이다. 드라마 시리즈에서는 두 인물 사이에 무르익은 긴장감을 표현해야 하는 촬영 신을 포함해 출연진과 스탭이 이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비중 있게 다룬다. 르네 비달은 우선 이마 베프와 대흡혈귀의 관계를 재정의하고 나선다. 이마 베프는 대흡혈귀에 복속된 존재가 아니라 비즈니스 파트너라는 게 그것이다. 르네 비달의 의도는 모레노와 이마 베프를 욕망과 유혹이 잠재하는 관계로 설정하기 위함인데 대흡혈귀 역할의 배우 로베르 당주는 왠지 그의 새로운 해석에 반대한다. 여러 번의 테이크 후에야 간신히 촬영이 마무리되는데 그 뒤가 문제다.

이후 촬영분을 태블릿으로 확인한 사람들 중 어떤 이는 장면에 매혹되고 어떤 이는 불쾌감을 드러낸다. 또 어떤 이들은 장면이 뿜어내는 센세이션은 안중에 없이 할리우드 스타 미라 하버그가 출연한다는 것에만 관심을 쏟는다. 대흡혈귀 역의 로베르 당주는 젠더 이슈로 문제를 제기하는데 <흡혈귀 강도단>의 촬영 당시에도 선정성 문제가 제기되었던 일화가 밝혀지면서 사안은 다른 방향을 물꼬를 틀어 마무리된다. 이처럼 하나의 장면이 낳은 여러 의견처럼 수용자가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천차만별이다. 핵심은 영화든 영화가 아니든 관객과 접점이 있는 창작물은 그게 무엇이든 검열과 비판, 표현의 자유 사이의 줄타기는 시대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는 영화와 드라마 <이마 베프>를 포함한 오마주와 리메이크라는 작업의 흐름과 카테고리의 분류에서 영화라는 뿌리를 맡고 있는 <흡혈귀 강도단>도 피해갈 수 없었던 문제로 강조된다.

한 시대의 영화 제작 환경과 그 안에 놓인 창작자, 또 그 창작자가 품은 고민은 다른 길을 가지 않는다. 미라 하버그가 프랜차이즈 무비와 독립영화를 오가듯 새로운 플랫폼의 등장으로 영화감독 르네 비달은 드라마 시리즈를 연출하게 된다. 이는 영화와 시리즈 제작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반영한 설정이다. 이때 다시 하나의 질문이 스친다. 그렇다면 시네마는 무엇이고 시네마가 아닌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맥락에 따라 많은 것을 내포할 수도 있고 앞으로 더 다양한 층위를 축적하게 될지도 모른다. 영화가 가진 한정된 러닝타임, 그로 인해 압축된 서사와 함축적 의미가 깃든 숏 이미지, 그리하여 의미가 함축된 이미지의 미학적 가치, 심지어는 영화관이 지닌 노스탤지어와 그 장소가 가진 영사의 강제성, 재생과 일시정지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시청자, 극장 영사와 디지털 상영본과 연관된 모든 기술적 요소들마저 시네마와 비(非)시네마를 가를 수 있다. 그러나 <흡혈귀 강도단>이 소리가 없이도 이미지 자체가 가진 역동을 긍정했듯, 영화 <이마 베프>를 거쳐온 드라마 <이마 베프>가 긍정하는 것은 시간이다.

드라마 <이마 베프>는 영화에서 다루지 못한 이면을 마음껏 드러낸다. 한 편의 영화가,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개입될 수 있는 거의 모든 가상의 상황을 극화하여 현대에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복잡성을 자본과 인간관계, 서사와 장르의 규칙과 관객의 시선, 예술가의 신념과 홍보 마케팅의 세속적 선택을 넘나들며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동시에 온라인 플랫폼의 시리즈도 영화란 무엇인지 질문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면서 한정된 러닝타임에서 확장된 제한 시간 내에 보다 깊은 의미를 담아내는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다는 예시를 몸소 보여준다. 영화와 드라마 <이마 베프>는 <흡혈귀 강도단>의 무법자, 이마 베프를 빌려 전혀 다른 영화산업의 환경과 구조 안에서 지금의 이미지 언어가 어떤 자리에 와 있는지 또한 성찰한다. 때로 빙의로 해석되기도 했던 매기의 몰입은 단 한 차례의 꿈처럼 지나갈 뿐이다. 그에 비해 물질을 통과하는 자유를 얻은 미라 하버그의 이마 베프가 유독 여러 번에 걸쳐 캐릭터에 동화되는 몰입의 순간을 되풀이하는 건 극장에서의 몰입과 달리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대를 향한 우려를 담아낸 역설적 설정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럼에도 드라마 <이마 베프>에 이르러 이제 도처에 떠도는 현상이 되어버린 이미지를 관람자가 자유롭게 선택하여 시청하고 의미를 수용할 전권을 받아들인다.

<이마 베프>는 온라인 스트리밍 시대에 영화를 향해 던져진 질문에 다시 질문을 던지는 가장 평화로운 방식의 회신이다. <흡혈귀 강도단>은 연쇄극이라는 분류하에 영화로 수용되지만 드라마 <이마 베프>는 영화가 아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영화에서 시작된 이미지의 언어를 공유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장면의 스펙터클이 유성영화와 무성영화를 가르지 않듯, 장면의 정념은 극장의 스크린과 지하철 관람자의 태블릿 화면을 차별하여 전달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 믿음이야말로 극장과 브라운관을 통해 <흡혈귀 강도단>에서 이마 베프를 불러내어 그를 다시 소생시킨 이유일지도 모른다. 어디에나 있는 이미지처럼 어디에나 있는 몰입의 순간은 그렇게 보는 이에게 가닿으며 연명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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