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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같은 뿌리에서 뻗어나온 디스토피아, ‘콘크리트 유토피아’ 엄태화 감독 x 원작 웹툰 ‘유쾌한 왕따’ 김숭늉 작가 대담
이우빈 사진 백종헌 2023-08-17

원작과 영화 사이

웹툰 <유쾌한 왕따>는 2부로 구성된다. 1부 <유쾌한 왕따>는 왕따 피해자인 고등학생 동현과 반 친구들이 지진으로 인해 학교 지하실에 고립된 후 서로의 이기심을 확인하는 일종의 디스토피아 학원물이다. 이내 동현과 그의 친구 수현이 지하실을 탈출하고 동현이 살던 아파트로 향하면서 2부 <유쾌한 이웃>이 시작된다. 하지만 그들이 당도한 아파트의 풍경은 우리가 으레 아는 디스토피아의 그것이다. 인간성이 자취를 감추고 원시사회를 닮은 계급이 부활했으며, 아파트 주민들 위에 군림하는 김씨 아저씨가 아파트 외부인을 배척한다. 동현과 수현은 인간 사회의 바닥을 목도하면서 다른 길을 찾아 헤맨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웹툰의 2부 <유쾌한 이웃>을 적극적으로 각색하여 만들었다. 원작의 기본적인 세계관은 이어받되 원작의 주인공인 고등학생 동현, 수현은 사라졌다. 대신 황궁 아파트에 사는 신혼부부 민성(박서준), 명화(박보영)가 그 자리를 메운다. 그리고 졸지에 아파트 주민 대표로 선출되어 아파트 외부인과의 전면전을 진두지휘하게 된 영탁(이병헌)이 극을 이끈다. 인간 군상의 인간성 절멸이 주제란 점에선 원작과의 유사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구체적인 설정과 인물들의 관계 및 성격, 결말로 나아가는 방식에선 차이가 크다.

공통점 하나, 둘은 어릴 적 만화 ‘덕후’였다. 공통점 둘, 이들은 디스토피아 세계관의 ‘가짜 희망’을 부정한다. 공통점 셋, 대재난 상황에서도 둘은 가족의 소중함이라는 인간다운 가치를 지키려 한다. 그리고 계속되는 공통점들…. 엄태화 감독과 김숭늉 작가의 닮은 점은 그들이 마주앉아 대화하는 동안 점점 선명해졌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웹툰 <유쾌한 왕따>의 2부 <유쾌한 이웃>을 원작 삼아 만들어진 것이 필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두 창작자의 유쾌한 유토피아 제작기는 그들이 지닌 창작의 원론부터 원작과 영화 사이의 차이 및 그 의미들, 그리고 상대의 작품을 해석하는 의견 교환으로까지 길게 이어졌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유쾌한 왕따>를 만나기까지

김숭늉, 엄태화 (왼쪽부터)

- 영화화를 처음 결심한 계기는.

엄태화 개인적으로 재밌게 본 웹툰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조성희 감독(<승리호> <늑대소년>)도 <유쾌한 왕따>를 재밌게 봤다는 이야기가 들리더라. 그래서 ‘어, 이거 누가 먼저 만들기 전에 내가 빨리 가져가야겠다’란 생각이 확고해졌다. (웃음)

김숭늉 고맙다. 나와 감독님 중간에 겹지인이 있어서 각본을 쓰고 있다는 얘기는 예전부터 훔쳐 들었다. 작품의 규모도 크고 하니 이 영화가 진짜 만들어질지 자꾸 의심이 가더라. (웃음) 그런데 어느 순간 계약서 작성부터 제작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 평소에도 웹툰을 챙겨보는 편인지.

엄태화 어릴 적부터 만화를 좋아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정서, 또 작품에 투영하는 감성의 대부분을 만화가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도 자주 한다. 오늘 들고 온 이 가방도 <명견 실버>라는 만화의 굿즈다. (웃음) 올해 50주년이고 애니메이션은 아마 1986년에 시작했을 거다. 동생(엄태구 배우)이랑 어릴 때 정말 많이 봤던 작품이다.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 <기생수> 같은 유명작은 당연히 챙겨봤고 클램프의 <성전> 같은 작품도 아껴 봤다. 한국 작품 중에선 황미나 작가의 <파라다이스>에 열성이었다. 작가님이 좋아했던 작품도 궁금하다.

김숭늉 <100℃ >나 <천사를 죽이다> 같은 최규석 작가의 단편들, 그리고 김수정 작가의 <일곱개의 숟가락>을 가장 좋아했던 것 같다. <일곱개의 숟가락>은 언제 봐도 정말… 간결하되 깊은 걸작이다.

엄태화 어, 그래서인가? 작가님 그림체도 <일곱개의 숟가락>이랑 비슷한 것 같다.

김숭늉 그렇게 따라 하고는 싶었다. 좋아했던 만큼 그런 화풍을 추구하긴 했는데 내 실력으로는 어림없더라. 쉬워 보이는 그림이 사실은 가장 어렵지 않나. 데즈카 오사무의 그림체도 탐을 냈었는데 역시 그쪽도 해낼 실력은 안됐고. (웃음)

- <유쾌한 왕따>를 원작 삼은 이유로 “통상적인 재난영화와 달리 ‘가짜 희망’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매력을 느끼고 공감했다”라고 말했다.

엄태화 작품의 세계관과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실현 가능한 희망의 정도를 적절히 뒀다고 생각했다. 이질감 없이 수용할 수 있는 서사였다. 각색할 때도 이 부분을 중점으로 삼았던 것 같다. 그래도 원작보다는 영화가 좀더 희망적이지 않을까 싶은데. (웃음)

김숭늉 감독님 얘기가 딱 맞다. 연재 당시 고민했던 내레이션이 떠오른다. 작품 후반부에서 “동현이와 수현이는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로 갈지 “동현이와 수현이는 어른들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로 쓸지 고심했다. 전자는 아무래도 인간이란 집단 전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고, 후자는 다음 세대에 조금의 희망이 남았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지금 웹툰을 재연재 중인데, 이런 사소한 분기점의 의미를 다시 곱씹는 중이다.

- <콘크리트 유토피아>엔 원작과 다른 설정이 있다. 가령 원작의 계절은 여름이지만, 영화는 혹독한 추위의 겨울을 택했다.

김숭늉 교복이 나오면 왠지 하복이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있지 않나. (웃음) 처음엔 이런 단순한 생각에서 여름을 고르긴 했다. <유쾌한 왕따> 1부의 배경이 고립된 학교 지하실이란 이유도 있다. 더 불쾌하고 끈적끈적한 느낌, 시체들이 여기저기에서 부패하고 있다는 감각을 증폭하기 위해선 여름이 적절했다.

엄태화 촬영 기간이 여름으로 결정돼서 끝까지 고민했다. 여름으로 정해도 이야기가 아예 성립 안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파트에 몰려야 하는 당위성을 키우고 싶었다. 추우면 정말 숨을 곳이 없으니까. 또 원작과 이야기 구성이 다르단 이유도 있다. 영화는 1부를 생략했기에 아파트의 시스템이 만들어진 역사의 과정을 그려내야 했다. 그러니 주민들이 점차 이상해지고 외부인과 반목하는 이유에 있어서 추위라는 새로운 외부 요소가 필요했다.

- <유쾌한 왕따>는 재난 속 학생들의 갈등으로 시작해서 사회적 갈등으로까지 이야기를 키운다. 영화는 분량 제한이 있으나 만화는 이 문제에 관해선 조금 더 자유로운 편이다. 애초 어느 정도의 이야기 규모를 정해놓고 연재를 시작했나.

김숭늉 좀 멋있게 “모든 건 처음부터 다 계획돼 있었다”라고 말해야겠지만… 솔직히 그렇진 않았다. (웃음) <유쾌한 왕따>는 개인적인 살풀이로 시작했다. 학창 시절에 동현이처럼 괴롭힘을 당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을 가지고 언젠가 꼭 작품을 그리고 싶었다. 이런 주제로 1부를 끝낼 때쯤 되니까 문득 학교 내 괴롭힘이나 왕따 문제가 개인과 집단 사이의 더 복잡한 역학으로 확장된다고 느끼게 됐다. 그 당시에 마침 임대 아파트를 두고 일어나는 사회적 문제가 횡행했다. 이런 배경을 소재로 해서 집단 속의 개인이 어떻게 고립되고 변화하며 남을 괴롭히게 되는지까지로 이야기의 규모를 키웠다. 이런 게 연재물의 매력이기도 하니까.

- 동현이는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으나 점차 폭력 가해자 집단에 융화된다. 동현의 성격을 이식받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민성도 점차 아파트 주민들의 광기에 휘말리는 인물이다. 이들의 내적 변화를 어떻게 다루려 했나.

김숭늉 집단의 인정에 목마른 사람일수록 변하기 쉽다고 생각했다. 특히 왕따나 사회적으로 소외되던 이들이 집단의 사명감이나 대의를 두르게 될 때 그 변화의 폭이 클 것 같았다. 게다가 동현이는 제대로 된 가정도 없으니 유사 아버지 격인 김씨 아저씨의 말에 더 휘둘리기 쉬운 상황이었다.

엄태화 원작이 표현한 개인과 집단간의 역학관계를 가져오되, 이런 대재난의 상황에 나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다. 그렇게 여러 인물을 떠올리다 보니 선과 악의 경계가 점차 흐릿해졌다. 재난영화에 나오는 정의롭고 이타적인 캐릭터는 너무 답답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지 않나. 명화 역시 언뜻 보면 그런 캐릭터 같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되레 개인의 욕망이 강한 사람임을 표출한다. 명화가 본격적으로 집단에 의견을 내기 시작하는 연유도 사실 남편인 민성의 나쁜 변화를 감지했을 때고, 반대로 민성이 변하는 이유도 오로지 명화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런 행동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다. 가장 현실적인 인간들의 모습이다.

만화를 닮은 영화, 영화를 닮은 만화

- 원작과 영화의 공통점은 가족이란 가치가 인물들이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점이다. 원작에서 악역에 가까웠던 김씨 아저씨나 기영이 엄마도 결국 가족을 지키는 일에 자신을 바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민성과 명화도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행동하고, 부녀회장 금애(김선영)도 속물에 가까워 보이나 아들을 지킬 땐 영락없는 어머니일 뿐이다.

엄태화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사람이 변하기에 가장 쉬운 조건이 본인 혹은 가족이 위협에 처했을 때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 전제를 기둥 삼아서 이야기를 전개했다. 재난 상황이 아닐지라도 먹고사는 이유는 대개 내 가족 먹여살리기 위해서이지 않나. 차라리 도균(김도윤)처럼 1인 가구라면 그런 문제에서 조금 자유로울 텐데.

김숭늉 도균 캐릭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황궁 아파트 주민들의 변화 이유는 아파트라는 집단을 지키기 위해서로 보인다. 다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근본적으로 가족이라는 최소 집단을 위해 싸우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도균은 가족이 등장하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지 않나. 이런 이유에서 그가 여타 주민들과는 다른 결로 움직인다고 느꼈다. 다소 단순한 발상이긴 한데 재난 상황에서는 생존 외에 무언가를 믿고 살아갈 만한 가치가 가족뿐인 것 같다. 웹툰에서도 모든 캐릭터의 행동 동기가 가족으로 설정된 감이 있다.

엄태화 얘기하다 보니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재난 상황에 진짜 원수 같은 가족이 주인공으로 나왔어도 재밌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서 혜원(박지후)이가 돌아왔는데 정말 마주치기도 싫었던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왔다고 치자. 그런 가족과 어쩔 수 없이 한집에서 지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자연스레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이 나왔을 것 같다.

김숭늉 어, 그렇다면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편으로 찍어보시는 건 어떨지. (웃음)

- 만화와 영화는 이야기를 컷과 프레임으로 분할하는 매체란 점에서 비슷하다. 각자의 연출론이 궁금하다.

김숭늉 가장 중요시하는 요소는 가독성이다. 단순히 글자가 잘 읽히게 만든다는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감정이 잘 읽히게 만드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 <유쾌한 왕따>는 최대한 플랫한 카메라 연출을 목표로 삼았었다. 먼발치에서 인물들의 상황을 평면적으로 보여준 후에 감정의 진폭이 생길 때 클로즈업으로 잠시 들어간다. 그러곤 다시 한발 빠져서 풀숏으로 화면의 설정을 보여주고 누군가가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으로 끝내려고 했다. 회차의 마지막 컷을 보면 대개 풀숏으로 끝날 거다. 클로즈업이 마지막인 경우는 관객에게 속임수를 가볍게 던지고 싶을 때 정도였다.

엄태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촬영 기조도 비슷하다. <가려진 시간>은 인물의 감정에 깊게 몰입하고 따라가는 작품이었으니 얼굴이나 눈을 클로즈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번엔 한 사람이 아니라 아파트 사람들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먼발치로 좀 떨어져서 구도를 많이 잡았고, 사이즈가 큰 숏에서도 망원렌즈보다 광각렌즈를 즐겨 썼다. 감정을 확 잡아주는 얼굴보단 어딘가 약간 일그러져 보이는 이미지를 원했다. 다른 작품에선 보지 못했던 배우들의 색다른 얼굴이 나오기도 했다. 영화 후반부로 가면서 명화나 다른 인물들의 중요한 감정을 포착해야 할 순간에 망원렌즈로 클로즈업을 잡아 이전 숏들과 차별화를 주었다.

- 초반부에 민성과 명화가 황도를 몰래 먹던 장면이 생각난다. 로앵글의 광각렌즈여서 최근 영화에서 보기 드문 구도로 표현됐다. 금애가 아파트 복도에서 다른 주민과 설전을 벌이던 부분도 묘한 구석 앵글에서 전체 인물들을 조망했다.

엄태화 그런 숏들을 찍을 때마다 꽤 큰 용기가 필요했다. (웃음) 인물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상황을 조성하는 게 보통의 방식이다. 더군다나 요즘엔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많이 보니까 얼굴이 크게 잘 보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영화는 스크린으로 보는 게 중심이라고 촬영감독과 협의했다. 그래서인지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나 <이키루> 같은 고전도 많이 참고했다. 수많은 인간의 덩어리를 하나의 미장센으로 만들어서 누가 누구 앞에 서 있고, 누가 누구 앞을 가로질러 가는지까지 모두 보여주려 했다.

- 촬영뿐 아니라 조명 측면에서도 많은 시도가 있었다. 특히 민성과 영탁이 솟아오르는 불기둥을 보며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인물에 묻는 빛을 통제하는 방식은 로저 디킨스의 화면 질감이 떠오르기도 한다.

엄태화 로저 디킨스도 많이 참고했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영화에 햇빛이 없다는 설정이 있는 터라 조명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배터리로 작동하는 작은 조명들이나 촛불, 손전등을 주로 썼고 영화의 분위기를 해칠 만한 조명의 밝기를 아예 배제했다. 또 질문에서 언급한 불기둥은 가스 배관이 터져서 발생했다는 전사가 있었다. 영화에서는 조금 생략됐지만. 그곳에 가까이 갈수록 기온이 따뜻해진다는 자그마한 설정도 있었다. 그래서 황궁 아파트 방범대가 태평양 마트를 털러 갈 때는 다른 장면과 달리 입김이 안 나온다.

감정의 낙차를 구현하는 방법

- <유쾌한 왕따>는 심각하고 어두운 이야기의 분위기에 비해 동글동글하고 간결한 그림체를 택했다. VFX나 미술 세트의 풍경을 극사실주의적인 질감으로 구현한 <콘크리트 유토피아>와는 대조된다.

김숭늉 기본적으론 내 그림 실력이 그 정도여서…. (웃음) 물론 이로써 얻어지는 효과도 생기더라. 아이러니한 낙차감이다. 단순하게만 표현되던 풀숏의 얼굴이 갑자기 크고 구체적으로 그려질 때, 혹은 보여주고 싶은 부위를 익스트림 클로즈업해서 제시할 때 독자의 시선을 끄는 효과가 생긴다. 전체적으로 그림 퀄리티가 높지 않을 때만 가능한 방법이다. (웃음)

엄태화 굴림체던 글자가 갑자기 궁서체로 나오는 그런….

김숭늉 맞다. 효율과 효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방법. 사실 극화체로 그린다면 미묘한 표정 변화를 구현하기가 더 힘들다. 눈썹의 각도를 아주 조금 바꿔서 감정의 변화를 포착해야 하는 식이니까. <유쾌한 왕따>의 화풍에선 눈은 웃고 입은 다문다든지 하는 표정의 몇 가지 조합만으로도 감정의 낙차를 잘 드러낼 수 있다.

엄태화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건 아꼈다가 정말 중요할 때만 딱 쓰자고 계획을 세웠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많이 참고한 게 피카소의 <게르니카>다. 개체의 상세가 자세히 제시되지 않더라도 인물들의 대략적인 형태가 한눈에 잘 드러나길 원했다. 그런 모던함과 차가운 시선이 영화에 투영됐으면 싶었다. 이런 맥락에서 <유쾌한 왕따> 그림체를 보면서도 아주 모던하다고 느꼈는데… 완전히 의도한 건 아니었구나. (웃음)

- <유쾌한 왕따>는 절제된 그림체 속에서 왕따, 사회적 계급 등 현실의 아픔을 관조한다. 소재의 현실성과 디테일을 위해 어떤 요소를 가미했나.

김숭늉 개인적 경험을 많이 투영했다. 철거촌이라는 게 한번에 다 없어지진 않는다. 우선 절반은 철거해서 아파트를 짓고 나머지 절반은 남겨두는 터라 두 곳의 아이들이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된다. 실제로 내가 어릴 적 그런 철거촌에 살면서 아이들간의 계급도를 느끼기도 했고, 철거 현장의 시위나 대치를 겪어보기도 했다. 그래서 웹툰의 마지막쯤 공원에서 싸우는 장면에선 90년대 철거 현장에 많이 등장했던 화염병이나 죽창, 새총 등의 디테일을 살릴 수가 있었다. 다만 이런 기억에만 매몰되지 않고 만화는 만화대로 재밌게 만들고 싶었다.

엄태화 공감한다. 기본적으로 영화의 재미가 전제돼야만 주제의 깊이나 디테일도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 같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작업하면서 강하게 느꼈다. 내가 재밌게 몰입할 수 있는 서사와 캐릭터가 있을 때 더욱더 예측 불가능하고 흥미진진한 사건이 만들어지더라. 그렇게 보면 결국 나를 위한 작품이 관객 모두를 위한 작품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반대로 모두를 위한 영화여야 나를 위한 영화가 되기도 하는 거고.

김숭늉 나도 비슷하다. 예전엔 내가 하고 싶은 얘기와 대중성을 분리해서 생각했다. 그런데 그리면 그릴수록 거리감이 좁혀지는 걸 느낀다. 관객의 입장만 생각하려 해도 내가 묻어나오고, 내 재미만 생각하며 그리다가도 남들을 생각하게 된다.

엄태화 음… 여전히 고민 중인 부분이고, 어쩌면 평생 해야 하는 고민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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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더그림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