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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주인공과 함께 세계의 독자들도 성장했다, <드래곤볼>의 작가 도리야마 아키라를 추억하며

<닥터 슬럼프> <드래곤볼>의 도리야마 아키라 작가가 3월1일 급성 경막하 혈종으로 타계했다는 소식이 8일 전해졌다.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많은 이들이 저마다 슬픔 속에서 추억을 떠올렸다. <닥터 슬럼프>나 <드래곤볼>을 보며 만화를 그리게 되었다는 작가들의 고백, 어린 시절 손바닥만 한 500원짜리 해적판 이야기, 여러 캐릭터 중에 특별히 마음이 가는 캐릭터들 이야기까지.

회고와 경이로움

1980년 소년 만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소녀(로봇)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닥터 슬럼프>가 연재되며 소녀 팬들로 소년 만화 독자층을 넓혔고, 1984년 11월20일(51호) <드래곤볼> 연재를 시작해 1995년 6월5일(25호) 연재 종료 시까지 ‘<소년점프> 황금기’의 주역으로 세계에서 사랑을 받았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80개국 이상에서 출판되었고, 2억6천만부가 판매되었다. 이런 놀라운 인기를 기반으로 만화-애니메이션-게임-캐릭터 굿즈로 이어지는 만화 중심 미디어믹스 생태계를 완성했다.

도리야마 아키라의 만화는 1980년대 당시 극화에 영향을 많이 받은 좀더 거친 터치의 작품들(<북두의 권> <캡틴 츠바사>처럼)과 다른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일본 만화 전통에서 데즈카 오사무가 참조한 디즈니의 도형화된 데포르메를 기반으로 작은 부분까지 섬세하게 표현했다. 특히 투시를 활용하는 데 능숙했다. 투시를 활용해 작은 컷 하나에도 엄청난 공간감과 액션의 속도감을 표현하는 것은 물론이고, 벌린 입속 이에도 투시를 넣을 정도였다. 캐릭터의 표정 연기도 최고였다. 동세도 마찬가지. 2, 3등신 캐릭터도 고난도의 동작을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근육질 캐릭터의 표현은 또 어떤가. 누구보다 해부학에 맞는 근육을 섬세하게 표현한 작가였다. 만화에 등장하는 여러 메커닉들은 어떤가. 작은 캡슐 안에 뭐든 넣을 수 있는 호이포이 캡슐이나 상대방의 전투 능력을 수치화한 스카우터처럼 참신한 아이디어도 좋았지만 자동차, 바이크, 비행기와 같은 이동수단은 레트로한 매력을 강조했고, 동서양을 넘나드는 주택 디자인이나 다채로운 복식은 1980년대 거품경제 시대를 풍미한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시각적 반영이기도 했다.

다시 보면 만나는 당혹

도리야마 아키라의 <드래곤볼>은 기네스북에도 기록된 653만부 발행(<소년점프> 1995년 3·4호 합병호)으로 대표되는 ‘<소년점프> 황금기’ , 즉 일본 만화 황금기를 대표하는 만화다. 후발주자로 소년 만화 시장에 뛰어든 슈에이샤의 <소년점프>는 1970년대 소년 만화 시장의 선두주자들이 성장한 독자를 찾아 떠나자 12살 소년의 욕망에 맞는 만화를 발굴하며 인기를 끌었다. 특히 1968년 <파렴치 학원>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나가이 고는 1970년대에 폭력과 섹슈얼리티를 소년 만화의 중심 테마로 가져와 PTA와 끊임없이 투쟁하며 폭력과 섹슈얼리티를 반항의 아이덴티티로 <소년점프>에 안착시켰다.

<드래곤볼>도 일본 소년 만화 역사의 인기 만화처럼 아버지의 부재에서 시작한다. 자신을 거둬 키우던 아버지 손오반이 죽고 혼자 사는 12살 손오공과 7개를 모으면 용신이 나와 소원을 이루어주는 드래곤볼을 찾는 16살 부르마가 만난다. 드래곤볼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난 둘은 거북선인을 만나는데, 세계관 최강자인 거북선인이 부르마의 팬티와 가슴에 대한 변태였다는 언밸런스 에로 개그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초반부 <드래곤볼>은 ‘아버지의 부재’라는 일본 소년 만화의 전통과 폭력과 섹슈얼리티라는 ‘<소년점프>의 유산’을 적절히 활용한 만화였다. 12살의 욕망에 충실한 섹슈얼리티는 드래곤볼을 모아 여자아이 팬티를 받는 해프닝 이후 서서히 사라지고 천하제일무술대회로 나아갔다.

우리는 선량하고, 친절하고, 유머러스하고, 순수해

도리야마 아키라는 ‘<소년점프>의 유산’으로 소년들을 붙잡은 뒤 방향을 바꿔버린다. 귀엽고, 때때로 성기 노출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꼬리 달린 12살 손오공이 성장/각성하면서 소년 독자들도 강제로 성장/각성해야 했다. 초반부를 주도하던 1980년대의 가와이와 섹슈얼리티는 사라졌다. 팬티와 가슴에 대한 집착도 중반부를 지나 완전히 사라졌다. 부르마는 세계관 최고 과학자로 활약한다. 뭐든 척척 만드는 건 물론 전혀 모르는 나메크어를 10일 만에 정복하는 언어 천재이기도 하다. 지구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싸움에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용기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점프하듯 시간이 지나고, 손오공이 원톱으로 각성하며 강력한 빌런들을 모아 힘으로는 손오공, 나이로는 거북선인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로 발전해나간다. 이는 명백하게 1980년대 <드래곤볼>이 출발할 때 일본 사회의 분위기와 다른 전통적인 가족주의적인 방향이었다. 손오공이 결혼을 해 아들 손오반을 낳고, 손오반을 피콜로가 양육하면서 다채로운 부성을 제시했다. 최고 빌런이던 베지터가 츤데레함을 자랑하면서 공동체에 합류하고, 마침내 미래에서 온 베지터, 부르마의 아들 트랭크스가 합류하면서 <드래곤볼>의 가족주의는 완성된다.

1990년대 일본과 한국, 그리고 세계 독자들은 왜 <드래곤볼>의 가족주의에 환호했을까? 도리야마 아키라는 가족주의를 지탱하는 이상으로 ‘착한 마음’을 바탕에 깐다. 스스로 마족이라 명명한 대마왕 피콜로는 손오공, 손오반 부자를 만나 착한 마음에 전염된다. “너… 너희 부자 때문이야…. 차… 착한 마음이 전염돼버렸나봐…. / 너… 너하고 지낸 몇달은… 나… 나쁘지 않았다.”(신장판 19권) 1990년대 거품이 붕괴되기 시작한 불황의 시대 일본, 1997년 이후 IMF로 불황이 지속되던 한국에서 놀랍게도 아무 쓸모없어 보였던 ‘착한 마음’이 사실은 우리를 조금 더 인간답게 만들어준다는 메시지가 작품 곳곳에 숨겨져 있다. 착한 마음은 궁극의 살인머신 인조인간 18호를 살려주는 크리링처럼 선량함과 친절함으로 나타난다. 때론 베지터의 “순수한 사이어인은 태어날 때부터 머리 모양이 변하지 않는다”(32권). 느닷없는 헤어스타일에 대한 설명 같은 유머이기도 하다. 더 강한 적과 제대로 싸워보고 싶다고 다 이긴 적에게 선두를 줘 회복시키는 손오공의 순수함이기도 하고. 그러니 우리는 천재와 용기의 상징 부르마, 선량함과 친절함의 크리링, 대마왕이었지만 육아 천재로 거듭난 피콜로를, 외로운 왕족 베지터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는 인조인간 18호를 기억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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