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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실패한 영화에 대한 영화, <메이 디셈버>

36살의 여인이 13살의 소년과 성관계를 맺다 현장에서 체포된다. 여인은 감옥에서 소년의 아이를 낳았고, 타블로이드 신문은 이들의 관계를 세기의 스캔들로 만들었다.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의 주인공인 그레이시(줄리앤 무어)와 조(찰스 멜턴)는 20여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부부로 살아간다. 이 스캔들을 소재로 하는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엘리자베스(내털리 포트먼)가 그들을 방문한다. 토드 헤인스 감독의 관심은 이 사건 자체가 아니라, 실제 사건의 주인공과 그들을 소재로 하는 영화가 마주했을 때 발생하는 미묘한 긴장감이다.

거울 속에 사는 여자

그레이시 부부와 처음 마주한 엘리자베스의 표정에는 당혹스러움이 있다. 예상과 달리, 그들의 삶은 화목하고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밝은 표정의 그레이시는 듬직한 조의 품에 안긴다. 그것도 야외 정원에서 타인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심지어 한 이웃은 “늘 자기가 원하는 걸 확실히 안다”라며, 그녀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는다. 그것은 엘리자베스가 상상한 그레이시가 아니다. 전남편과 아이들을 버리고 13살 소년을 선택한 여인은 주변 사람의 시선을 창피해하거나 죄책감에 찌든 모습이어야 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가 경멸스럽지만, 그렇기에 그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그레이시가 되어간다. 마치 정사 장면을 연기하는 연기자가 쾌감을 느끼는 척 연기를 하는 건지, 못 느끼는 척하는 연기를 하는 건지 혼동되는 순간처럼, 그레이시처럼 되려는 욕망과 그녀를 경멸하는 마음 사이에서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영화 중반 의상실 장면에서 토드 헤인스는 거울에 투영된 엘리자베스와 그레이시의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정면의 거울에는 두 사람의 서로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담긴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옆쪽으로 또 다른 거울에 비친 그레이시의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그레이시는 엘리자베스를 바라보면서도(정면 거울),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엘리자베스에게서 시선을 돌린 모습이 함께 제시된다. 달리 말하면, 엘리자베스는 한편으로는 그레이시를 포착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를 놓친다. 결국 <메이 디셈버>는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를 사냥하는 데 실패하는 영화다.

그레이시는 ‘순진함’이 재능인 여자다. 13살의 소년과 성관계를 맺고, 감옥에서 아이를 낳고, 출소 이후 23살이나 어린 남자와 결혼한 여자의 삶과 순진함이라는 단어가 쉽게 어울릴 수 없어 보이지만, 그레이시는 (그녀의 말마따나) 순진한 여자다. 아니, 순진하다고 믿어야 살 수 있는 여자다. 그 순진함은 과거를 되돌아보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녀는 과거의 일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산다. 그래서 자신을 위협하는 소포에도 그리 무덤덤할 수 있다. 꽃꽂이 교실에서 엘리자베스와 나눈 대화는 그레이시를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녀는 ‘현재’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빠져 있는 나르시시스트다. 히스테리컬한 울음에서 드러나듯,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아슬아슬함도 엿보인다. 그녀가 이에 대응하는 방식은 단 하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외면하는 것. 그것이 늦은 밤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조에게 히스테릭한 반응으로 그 대화를 중단해버리는 이유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순진함을 지킬 수 있다. 그레이시는 거울에 비친 지금 자신의 모습에 아무 문제가 없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레이시에게 그 거울은 타인의 시선이었을 것이다. 타인들의 눈에 비치는 꽃꽂이처럼 가지런하게 정돈된 삶. 토드 헤인스는 엘리자베스가 마을에 도착한 순간부터 마을의 소음(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을 관객에게 곧잘 들려준다. 오랫동안 그 수군거림의 중심 소재는 그레이시와 조였을 것이다. 그레이시가 자신의 가족을 통제하고 이를 통해 아무 문제없는 현재를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그 수군거림(또는 타인의 시선)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 자신의 삶이 완벽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접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그레이시는 거울에 비칠 모습으로 자신을 연출한다(타블로이드 신문에 포착된 그레이시의 모습도 그렇게 보이도록 자신을 연출한 듯한 느낌을 준다).

반면에 엘리자베스는 현재만 생각하는 그레이시의 과거에 매달린다. 과거의 어떤 사건이 지금의 그녀의 삶을, 또는 그 당시의 그녀의 행동을 설명해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그것이 허구적 서사의 스토리 구성 방식의 기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와 전남편 사이의 아들인 조지가 들려준 이야기, 그러니까 어린 시절 그레이시가 오빠들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았다는 말에 빠져든다. 현재만 사는 여자와 그런 여자를 과거를 통해 이해하려는 또 다른 여자. 졸업식 날 아침 사냥을 나간 그레이시는 여우를 마주한다. 자신의 거울상을 본다. 그레이시는 자신의 현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과거에 눈감고, 주변 사람들을 통제하거나 조종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거울에 비친 모습이 그녀의 전부다. 그레이시는 기꺼이 그 거울상을 엘리자베스에게 보여주었다. 거울 바깥이 아닌 거울 속에서 살아가는 그레이시.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놓친 실패한 사냥꾼이다. 거울 바깥에서 그레이시를 찾으려 할 때부터 엘리자베스의 실패는 이미 예정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영화는 실패하는가?

영화 엔딩의 영화 촬영 현장. 그레이스인 척하는 엘리자베스가 뱀을 몸에 두른 채 어린 소년을 유혹하는 연기를 펼친다. 엘리자베스는 진짜 같아지고 있다며 한번 더 촬영해줄 것을 요구하지만, 엘리자베스가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그 영화는 졸작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다. 실제로 내털리 포트먼은 그레이시인 척하는 엘리자베스의 연기를 상투적이고 조악하다 못해 허접한 느낌이 들도록 연기한다. 이 장면을 영화 속 영화로 연출하는 토드 헤인스 역시 마찬가지다(그는 펫숍 창고의 정사 장면이 등장하는 또 다른 작품을 TV 화면을 통해 슬쩍 보여주며 이 작품의 미래를 예고한 바 있다). 그럼에도 엘리자베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점점 진짜처럼 되고 있다며 재촬영을 요구할 때, 그녀의 모습은 맹목적이다 못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영화 중반부에 펫숍 창고를 찾은 엘리자베스는 상상으로 연기를 펼치다 웃음을 터뜨린다. 아마도 그 웃음의 대상은 그레이시였을 것이다. 여기서 13살 꼬맹이와 그런 짓을 하다니, 라는 비웃음. 하지만 이제 그 비웃음의 대상은 엘리자베스다. 실제의 그 장소를 흉내낸 장소에서 그 비웃음을 되돌려 받는다.

흥미로운 것은 엘리자베스가 완전히 그레이시가 된 듯한 연기를 보여준 적이 있다는 점이다. 그레이시가 조에게 보낸 사랑 편지를 독백으로 연기하는 엘리자베스의 연기는 실로 압권이다. 내털리 포트먼은 사랑에 빠진 그레이시를 연기하는 엘리자베스의 연기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드디어 완전하게 그레이시를 연기하게 되었다는 성취감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마치 그 순간은 성적 쾌감의 절정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흐릿해진 이 독백 연기는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했다는 자기 확신의 결과다. 조지에게서 그레이시가 오빠들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라는 한 인물의 ‘스토리’를 완성했다고 믿었다. 엘리자베스의 독백 연기는 그 확신의 결과다. 엘리자베스의 조악한 연기는 이 확신이 무너졌음을 증명한다. 졸업식을 찾은 엘리자베스에게 그레이시는 조지의 이야기가 모두 거짓이었다고 말한다. 그 순간, 엘리자베스는 무너진다. 나는 그레이시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단할 수 없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설령 그런 성적 학대가 있었다 해도, 그녀는 그 과거를 부정하고 현재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삶을 지키는 일에 몰두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졸업식에서 서로 마주 보는 엘리자베스와 그레이시의 겉모습은 너무나 닮았다. 그레이시가 엘리자베스 곁을 떠날 때, 멍하니 서 있는 엘리자베스에게서 카메라가 재빨리 뒤로 물러난다. 마치 이 장면은 빙의되었던 그레이시의 영혼이 엘리자베스에게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이 떠났는데도 사라지지 못하고 거울 속에 남아 있는 거울상. 주인을 잃은 거울상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러한 면에서 <메이 디셈버>는 실패한 엘리자베스, 또는 ‘실패한 영화에 대한 영화’인 셈이다. 그리고 이 실패는, 실제 사건, 또는 실제 인물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그 진실을 담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영화의 오만함에 대한 토드 헤인스의 경고이기도 하다.

비물리적 폭력

토드 헤인스의 영화적 태도는 엘리자베스가 조를 이용하는 태도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를 조사하는 과정은 누군가에게 상처로 남을 수 있다는 점에서 꽤 폭력적이다. 그녀에게 조는 그레이시를 체험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레이시가 특별한 사랑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했다면, 엘리자베스는 어른의 짓을 내세운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행동이 조(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조 아버지의 재떨이를 상기해보라). 그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눈감는다. 그래야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가 될 수 있고, 그레이시는 현재의 거울상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 되기’에 성공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스스로를 되돌아보지 않기에 바로 자신의 행동 속에 그레이시의 진실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창피함도 죄의식도 없어 보이는 그레이시가 ‘이상한 여자’라고 불려야 한다면, 그것은 엘리자베스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조는 이들과 다르다. 조는 지붕에서 아들의 대마초를 얻어 피우다 이내 아들 품에 안겨 눈물을 터뜨린다. 아들의 아들처럼 보이는 순간, 그는 13살 소년에 머물러 있음을 커밍아웃한다. 그레이시는 거울 속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그가 나비로 성장할 기회를 앗아갔다. 조가 케이지를 벗어난 나비처럼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을지 단언할 수 없지만, 그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만이 자신을, 그리고 자기 삶의 문제를 되돌아보는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조가 집을 리모델링하는 TV프로그램을 반복적으로 시청하는 것도, 그의 직업이 몸 안을 들여다보는 사진을 찍는 방사선사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것이 사랑이든, 영화든, 타인의 시선이든 그 명분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를 향한 비물리적 폭력으로 인해 엑스레이에 투영된 그의 삶은 망신창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그레이스의 관계를 통해 영화의 실패를 보여준 토드 헤인스는 조를 통해 또 다른 영화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부디 그의 비행이 성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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