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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영화사 안의 고고학적 레퍼런스를 담으려 했다, <키메라>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
유선아 2024-04-04

“두 세계, 나는 그 어느 하나의 세계에서 왔다.” 지금 자신의 영화 세계를 이루는 원천을 알려달라는 질문에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은 가장 좋아한다는 크리스티나 캄포의 시 첫 구절을 인용했다. 사실 그는 아주 여러 번 <키메라>를 만드는 동안 마음에 담아두었을 영감(靈感)을 기꺼이 인용하며 답을 이어갔다. 손을 뻗어 닿을 수 있는 세계와 그렇지 못한 세계 사이를 명상으로 오가는 로르바케르 감독이 여전히 간직하고 있을 말과 생각을 조금이라도 더 캐내기 위해 지나치게 사소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뒤로하고 많은 질문을 건넸다.

-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과 시골 풍경을 포착하는 카메라는 당신이 젊은 영화감독이라는 사실을 가끔 잊게 만든다. 영화감독으로서의 당신을 만든 어린 시절의 한 부분을 들려달라.

= 나는 토스카나 지방의 시골 언덕배기에 있는 외딴집에서 자랐다. 매일 아침,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떠오르면 동쪽을 향해 나 있는 창문을 통해 내 방으로 햇살이 들이쳤다. 가깝게는 양봉업을 하던 우리 가족의 생활을 관찰하고, 멀게는 산과 들판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 내가 가진 고유한 시선을 만들어낸 것이 있다면 유년 시절을 보낸 우리 집 창밖으로 보았던 지평선이 펼쳐진 풍경이다. 어머니는 이탈리아가 고향이지만 아버지는 독일인인데, 우리 가족이 다문화가정이라는 점도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고향과 대상을 친밀하면서 동시에 생경하고 이질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은 내 영화 작업에서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 <더 원더스>는 때 묻지 않은 시골에 텔레비전 매체가 침범하고 <행복한 라짜로>의 성자는 자본주의에 희생된다. <키메라>는 낭만과 세속, 자연과 기계의 대비를 강조한다. 순수와 신비가 문명과 자본의 발달로 퇴화한다고 믿고 있나.

= 이 영화에 담고 싶었던 것이 있다면 바로 물질주의의 도래다. <키메라>는 고대 에트루리아 무덤을 훼손할 자격이 스스로에게 있다고 감히 믿는 어느 세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수집가에게 팔아넘길 목적으로 황금이나 화병, 물그릇을 찾아내는 도굴꾼 무리가 그 중심에 있다. 신성한 가치는 소멸하고 유물은 그저 팔리기 위한 상품으로 전락해버린 한때를 이 영화를 통해 돌아보려 했다. 그 과정에서 물질주의의 승리, 이윤추구라는 명목하에 자행된 자연 파괴나 소비 중심주의 사회의 추태가 영화 장면으로 드러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세속적 세상에서는 모두가 불경해진다.

- <키메라>에서는 모든 것이 혼재돼 양면성을 띤다. 고대 에트루리아 벽화와 현대 사진술, 지상과 명부는 물론, 스파르타코(알바 로르바케르)의 이름과 역할의 성별이나 젊은 남신(男神)을 떠올리게 하는 이탈리아(카롤 두아르트)의 중성적인 외모도 그렇다. 그중 베니아미나(일레 야라 비아넬로)는 아리아드네와 페르세포네를 뒤섞은 듯한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 <키메라>에서는 지상과 지하, 산 자와 망자의 관계성이 서로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다. 영화에 실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사용했는데 아리아드네를 참조했기 때문은 아니고, 단순히 아르투(조시 오코너)와 베니아미나의 인연을 가장 직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요소가 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떨어져 있으면서도 이어져 있는 두 인물의 이야기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를 염두에 두고 썼다. 베니아미나는 주로 집안의 막내에게 붙이는 이름인데, 인물을 설정하고 이름을 정하면서 성별에 무게를 두기보다 숨겨진 이야기가 이름을 통해 전달되었으면 했다. 영화 바깥에 존재하는 캐릭터의 삶을 궁금하게 만드는 인물의 이름 또한 땅속에 파묻힌 보물이나 마찬가지다.

- 영화의 화법이 전작에 비해 화려해졌다. 화면의 대범한 상하 전환도 그렇지만 빨리 감기와 슬로모션의 적절한 배치에서 옛 영화의 향수가 느껴진다.

= 아무래도 유물의 흔적을 따라가는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적 어감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사적 레퍼런스를 찾아 담으려 했다. 영화사의 단면을 드러내는 다양한 매체와 다른 영화는 물론이고 영화의 기원으로 회귀하는 장치와 미장센을 활용했다.

- 유물과 벽화의 시점이 드러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이 아이디어는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

= 우리는 무언가를 보는 주체이자 대상이기도 하다. 고대 유물에 머물렀던 사람의 시선은 자연과 사물에서 순환하여 다시 사람을 바라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로마>(1972)에도 도굴되는 순간에 빛을 잃는 벽화와 비슷한 장면이 있지만 더 깊이 있게 접근하고 싶었다. 본래의 색채가 사라진 벽화 이야기는 원래 수많은 고고학자와 도굴꾼이 전한 이야기에서 가져온 것이다.

- 전작을 예로 들면 이탈리아영화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이탈리아인의 정서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 <키메라>에서는 자연스럽게 스며 나오는 유머 감각이나 수어에 가까운 이탈리아인의 몸짓을 전면에 드러낸다.

= 이 영화가 굉장히 극적인 서사를 담고 있어서이기 때문이다. 여러 주제를 담고 있지만 아르투와 베니아미나의 관계 측면에서 <키메라>는 분명히 상실과 이별에 관한 영화였고, 그래서 최대한 가볍게 그리려고 했다. 영화가 아르투의 모험과 여정을 따르는 것도 동일하게 극적인 것을 가볍게 가져가려는 의도에서 나온 산물이다.

- 이탈리아를 시녀처럼 부리는 플로라 부인(이사벨라 로셀리니)과 딸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대화의 사소함, 은근한 배려와 험담, 재잘대는 대사의 박자 때문에 여신들의 대화 장면처럼 느껴진다. 연출에 어떻게 공을 들였는지.

= 플로라 부인의 딸들이자 베니아미나의 언니들은 막냇동생의 요람을 둘러싼 다소 무례한 요정과 같은 인물들로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이 자매는 끊임없이 입을 모아 떠들어댄다. 이들은 절대 베니아미나의 부재를 대신할 수 없는 존재다. 언급된 장면은 대사가 과할 정도로 넘쳐 언어가 더이상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게 되어 결국 귀를 닫고 눈으로 듣게 되는 지점이라 생각했다. 대사를 통한 언어와의 접촉보다도 배우의 몸짓이나 시선과 같은 언어 이외의 요소에 집중하게 될 정도로 많은 대화가 오가는 장면을 만들고 싶었다.

- 여신상을 발견한 뒤 영국인과 이탈리아인이 보이는 행동의 대비가 강렬하다. 특히 유물을 해체해서 옮기는 도굴꾼의 모습을 살인 장면처럼 연출했다.

= 우리에게는 놀랍지만 도굴꾼에게는 일반적인 행위다. 도굴꾼은 대체로 커다란 예술품을 쉽게 운반할 수 있도록 부숴서 조각으로 해체한다. 불법 경로로 약탈하거나 도굴한 유물이 조각난 상태로 발견되는 일은 아주 흔하다. 여성의 신체를 향해 수세기 넘게 자행됐던 폭력을 여신상을 빌려와 표현하려 했다. 온전한 유물을 훼손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모독이다.

- 피에트로 마르첼로, 프란체스코 문치, 사베리오 코스탄초 등 이탈리아 감독과 작품으로 교감하며 영향을 주고받는지 궁금하다. 동세대 자국의 영화감독들과 어떻게 교류하고 있나.

= 요나스 카르피냐노와 아주 각별하게 지낸다. 꾸준히 서로의 작품을 보고 감상과 소재를 공유하면서 조언을 주고받고 있다. 문치, 마르첼로와는 다큐멘터리 <내일>(2021)을 함께 연출하기도 했고, 코스탄초와 알레산드로 코모딘 역시 내게 소중한 친구다. <키메라>의 트리트먼트를 쓸 때 마르첼로에게서 실질적으로 도움을 받았고, 코스탄초는 각본을 제일 먼저 읽고서 감상을 전해주었다. 서로 교류하고 협력하는 일은 중요하다. 우리는 모두 다양한 형태와 유형의 영화가 존속해나갈 수 있도록 영화 작업을 이어가는 데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고자 함께 노력하고 있다.

- 아이들은 어딘가에서 솟아난 존재 같고, 어른들은 소유자가 없는 땅 위에 공동체 이루어 삶을 꾸린다. 사랑의 가능성도 <키메라>에서 엿보인다. 차기작은 어떤 영화가 될까.

= 이탈로 칼비노의 <이탈리아 동화집>을 영화화하는 식의 아이들을 위한 프로젝트를 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영화의 각본을 집필 중이다. 현재로선 자세히 말할 순 없어도 다음 작품도 희망이라곤 없지만 생동감과 기쁨이 넘치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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