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2
[인터뷰] 바닥을 딛고 다시 올라선 순간, <종말의 바보> 배우 안은진
조현나 2024-05-02

삭막함 속에서 저만큼 아이들을 위하는 게 가능할까? <종말의 바보> 속 세경을 보며 떠올렸던 질문이다. 본래 중학교 기술가정 교사였던 세경은 소행성 충돌 소식이 알려진 후 휴교령이 내려지자 웅천시청 아동청소년부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어수선한 틈을 타 발생한 폭동을 겪은 후, 세경은 위험에 빠진 아이들을 지키려 분투한다. 김진민 감독은 “세경 역엔 본능적으로 안은진 배우를 떠올렸다”고 말하며 배우에 대한 강한 신뢰를 드러냈다. 믿음에 부합하는 연기를 보여준 안은진에게 <종말의 바보>는 배우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 등장인물이 많은데 그중 세경의 감정 변화와 고민이 가장 세부적으로 그려진다.

= 성장형 캐릭터의 경우 발전하는 과정에서 다른 선택을 하는 변화를 유심히 바라보게 되는데, 세경은 폭동 이후 가고자 하는 길이 명확했다. 그 단단한 마음을 유지하면서 중간중간 증폭되는 감정을 잘 표현하면 되겠다 싶었다. 아주 평범한 기술가정 교사고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대변할 수 있는 인생이라고 생각해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 이전 작품들과 다르게 접근한 부분이 있다면.

= 상상력이 좀더 필요한 작품이었다. 종말을 바라보는 극한상황이 배경인데 이걸 겪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배우들끼리도 각자의 상상을 자주 나눴다. ‘정말 200일이 남았다면 어떨 것 같아?’ ‘도망가고 싶을 것 같은데.’ 결국 모인 의견은 웅천 시민들처럼 도피하는 대신 일상을 살아갈 것 같다는 거였다. 세부적으로는 연인인 윤상(유아인)의 부재나 폭동 사건이 세경에게 어떻게, 얼마나 크게 다가왔을지를 상상해봤다. 시나리오만 읽었을 때는 가늠이 잘 되지 않았지만 현장에서 곧바로 와닿는 장면도 있었다. 가령 폭동으로 희생된 아이들의 시체를 발견하는 신은 현장을 맞닥뜨리자마자 확 몰입이 됐다.

- 자신과 애인보다 아이들을 우선시하는 때가 종종 발생한다. 그런 세경의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 폭동 때 아이들을 잃은 후로 세경에겐 그런 선택이 당연해졌다. 가령 생존자인 하율이가 위험에 처하면 이전의 트라우마로 인해 자연스레 몸이 먼저 움직인다. 말하자면 ‘아이들을 지킨다는 것’ 외엔 남은 목표가 없는 거다. 그게 세경이 대단한 인물이어서라기보다는 그 상황에 놓이면 모두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9화에서 세경이 윤상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신을 연기하는 순간이 좋았다. 그 대화에 세경의 마음이 전부 담겨 있다.

- 아이들을 대할 때와 어른들을 대할 때 다르게 접근한 부분도 있나.

= 특별히 그렇진 않았다. 세경이 워낙 친구 같은 선생님이었고 또 동네에서 오래 살면서 동네 사람들과도 깊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세경에게는 다 똑같고 편안한 사람들이다. 다만 아역배우들과 함께 촬영할 때는 선생님의 입장으로 계속 케어해주다보니 자연스럽게 모성애가 발동하더라. 그리고 정말 쑥쑥 자란다는 걸 느꼈다. 촬영 시작할 때는 강훈이 키가 나보다 작았는데 지금은 나보다 크다. (웃음) 게다가 공연계 선배님들이 많이 계셔서 현장에서 의지가 됐다. 다 같이 식사하고 추도를 하는 등 단체 신이 많아 촬영을 거듭하며 사이가 돈독해졌다.

- 종말을 앞뒀음에도 함께 일상을 살아가고 희망을 이야기하려 한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 시민들의 삶을 보면서 이 작품은 거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개인적으로 6화와 12화를 가장 좋아한다. 5화까진 극의 배경이 소개되며 세경의 선택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려진다면, 6화부터는 시민들 한명 한명을 조명하며 성당에서의 일을 각자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려진다. 망해가는 세상에서 성당을 복원하는 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할 수 있지만, 그게 또 살아갈 힘이 되고 한편으론 사람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대변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엔딩 시퀀스는 세경의 바람이자 모두의 염원이 잘 구현된 장면이라 좋아한다. 사람들이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는 데에서 오는 울림이 큰 작품이다.

- <연인>의 길채, <종말의 바보>의 세경 모두 위기를 다부지게 견뎌나가는 캐릭터다. 그런 캐릭터가 본인에게 자주 주어지는 이유를 생각해본 적이 있나.

= 길채, 세경처럼 행동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싶긴 하다. 하지만 모두에게는 힘듦을 극복할 힘이 있다고 느낀다. 그게 이런 캐릭터들이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바닥을 찍고 다시 올라오는 캐릭터는 배우라면 다 반길 거고 나 역시 그렇다. 이런 역경을 딛고 힘을 발휘하는, 또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인물을 연기하는 게 개인적으로 재밌다.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이런 역경 속에서도 자신이 택한 삶을 살아가는 캐릭터를 계속 만나고 싶다

- <종말의 바보>를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 사실 이 작품은 촬영하면서 개인으로서도 바닥에 닿았다고 느낄 때가 자주 있었다. 상상하면서 연기하는 한편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내가 이 상황이 진짜라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했다. 그래서 어려운 작업이었다. 드라마에 출연하기 시작한 뒤로 무대에서의 연기, 카메라 앞에서의 연기에 대한 고민이 컸다. 무대에서는 제스처가 중요하고, 드라마는 감정을 타이트하게 잡기 때문에 미세하고 정확한 전달이 중요하다고 여겼는데 <종말의 바보>는 그 중간 지대에서 연기를 펼쳐야 했다. 그간 공연과 드라마에서의 연기를 별개로 봤는데 이번 작품을 기점으로 결국 연기의 본질은 같다는 생각이 명확해졌다. 더불어 김진민 감독님이 강조한 “발끝까지 연기해야 한다”는 말씀이 <종말의 바보> 촬영 때에도, 다음 작품에서도 도움이 많이 됐다.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