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후반부에 <The 8 Show>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연애의 목적>(2005)부터 <비상선언>(2022)까지 약 20년 동안 영화 연출에 몰두했던 한재림 감독이 첫 시리즈 <The 8 Show>(더 에이트 쇼)로 돌아왔다. 배진수 작가의 웹툰 <머니게임> <파이게임>을 원작으로 한 <The 8 Show>는 비밀스러운 쇼에 갇힌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8명의 등장인물은 폐쇄된 공간 내 1층부터 8층까지 방을 배정받고, 쇼의 시간이 흐를수록 불어나는 상금을 얻게 된다. 인물들은 쇼의 진행 시간을 늘리기 위해 쇼의 구경꾼들이 만족할 만한 기행을 펼쳐야 한다. 기행은 갈수록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쇼 비즈니스로 변질된다. 각 층에 따라 다르게 주어진 계급의 차이는 참가자들의 갈등을 부추긴다. 그렇게 <The 8 Show>는 자극으로 점철된 콘텐츠의 범람, 끝없는 도파민의 충족을 요하는 시대에 자성의 목소리를 내기에 이른다.
- 두개의 웹툰을 한 작품으로 각색했다. 흔치 않은 방식인데.
= 원래는 <머니게임> 연출을 제안받고 작품을 기획 중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오징어 게임> 이 나왔다. ‘누군가가 죽어야 내가 돈을 번다’라는 구조가 유사했기에 <머니게임>을 계속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한참을 고민하다 원래 알고 있던 <파이게임>이 떠올랐다. 이건 오히려 누군가가 죽으면 게임이 끝나는 구조이니 두 웹툰을 합치면 변별력이 생길 것 같았다. 그렇게 아무도 안 죽는 게임, 시간을 벌어서 시간으로 상금을 버는 이야기를 골자로 삼게 됐다.
- 초반 연출이 무척 독특하다. 1.33:1도 아닌 1:1 화면비, 타이틀 카드(검은 화면에 자막을 띄우는 방식), 아이리스 등 무성영화의 연출 방식과 질감이 두드러진다.
= 인물들의 현실이 무척 답답하단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들이 사는 현실이 답답한 1:1 세계인 반면에 쇼를 시작하러 들어오면 화면이 넓어진다. 쇼가 진행되는 곳이 오히려 더 현실 같단 인상이 들게 하려 했다. 또 <The 8 Show> 엔 영화 매체나 매스미디어 전반에 대한 내 마음을 담고 싶기도 했다. 진수(류준열)가 처음에 영화 촬영장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도 이 작품이 메타 영화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뉘앙스를 주고 싶었다.
- 그외에도 영화에 대한 메타포가 많이 등장한다. 쇼에 들어가는 입구는 무대에 붉은 천막이 펼쳐진 고전적 극장이다. <홀리 모터스>(2012)처럼 영화 매체 혹은 쇼 비즈니스에 대한 고민을 담았던 작품들을 떠올리게 하고, 데이비드 린치의 <트윈 픽스>(1990), <블루 벨벳>(1986) 같은 질감도 느껴진다. 영사기와 필름도 종종 중요한 오브제로 등장한다.
= 8명의 인물은 시간을 벌어야 상을 받고, 그러려면 누군가를 즐겁게 해야 한다. 그들의 상황이 지금 우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우리란 영화뿐 아니라 소설가, 유튜버 등 콘텐츠를 만드는 모든 사람이다. 요즘 콘텐츠 소비자들이 뭘 좋아하는지는 뚜렷하다. 만드는 사람들도 그걸 알고 그 니즈에 맞추려 한다. 자극적이고 쉽고 서사가 약한 작품으로 모두가 경쟁해야 하고, 우리가 알던 슬로 시네마나 고전적 영화들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영화를 만들면 만들수록 서글픈 마음이 들더라. 이런 서글픔을 좀 담고 싶었다.
- 영화에 대한 의미를 가득 담은 작품이 넷플릭스 시리즈로 나왔단 것이 또 흥미로운 점이다.
= 그래서 넷플릭스가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영화에 대한 의미나 마음을 담는 방식을 충분히 이해해주고 콘텐츠를 내보내니까.
- 원작과 비교를 해보고 싶다.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주요 공간의 색채다. 원작은 대개 칙칙한 시멘트 건물 내부인 반면 <The 8 Show>의 쇼 무대는 알록달록한 색깔에 수영장, 미용실 등 다양한 소품들도 갖추고 있다.
= 가장 힘든 부분이었다. 배진수 작가는 그냥 “그리기가 귀찮아서” 배경은 단순하게 그렸다고 하지만 어두운 배경에 인물만 딱 보이면 작품이 한층 어둡고 진지해 보이는 효과가 있다. 다만 이걸 그대로 영상으로 옮기면 너무 무성의해 보이거나 지나치게 어두워 보일 것 같았고, 시청자들도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별생각을 다 했고, 처음엔 공간을 아예 대표적인 욕망의 공간인 백화점으로 만들어 층을 나누려고도 했다. 결국엔 가장 심플하게 가자고 논의해서 빨간색 계단으로 층을 나눴고, 대신 각 층의 방에서 나왔을 때 인물들이 욕망하는 구역을 만들자고 결정했다. 이를테면 돈을 열심히 벌어서 수영장에 놀러가고 싶지만 이곳의 수영장은 다 가짜다. 인물들이 끝없이 욕망만 하고 이루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거다.
- 주머니가 가짜인 쇼의 공식 의상도 참신하다.
= 의상이 또 가장 어려웠다. 세트 다 만들고 촬영 직전이 됐는데도 의상을 결정 못했다. 죄수복으로 하려니 <오징어 게임>이 생각나기도 해서 난감했다. 여러모로 <The 8 Show>에 딱 맞는 의미가 있어야 하니까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PD가 ‘진짜 같은 가짜’라면 가짜 주머니가 그려진 옷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아이디어가 너무 좋아서 PD에게 따로 신발을 선물했다.
- 원작을 만든 배진수 작가와는 각색에 대한 논의를 자주 나눈 편인지.
= 진수랑 술만 먹었지… 작품 얘기는 딱히 안 한것 같다. (웃음) 그냥 시즌2 나오면 자기도 출연 시켜달라고만 말하더라. 진수는 <짝>에 출연해서 결혼까지 할 정도로 유쾌하고 멘사 회원에다 아무튼 완전히 천재과다. 나한테 각색을 믿고 맡겨줬고 자율성을 보장해줬다. 사실 지금도 진수가 <The 8 Show>의 결과물을 어떻게 봐줄지가 가장 궁금하다.
- <오징어 게임>을 비롯해 최근 생존 서바이벌 종류의 콘텐츠가 많이 등장한다. 어떤 차별점을 주고 싶었나.
= 이런 장르에서 느껴지는 쾌감은 주로 주인공이 승리하고 나아가는 서사에서 나온다. 다만 <The 8 Show>는 그런 쾌감이 별로 없는 피카레스크 블랙코미디의 개념이다. 주인공이 영웅이 아니다 보니 어떤 선택을 하고 판단할 때마다 오히려 구렁텅이로 더 빠지게 된다. 악당들을 이기고 부수는 ‘사이다’가 없다 보니 오히려 관객들이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어디서든 계급의 차이나 자본의 문제로 욕망과 갈등은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일지라도 자극만 좇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협동과 인간성에 대해 고민하길 바랐다. 그렇게 하다 보면 우리가 찾을 수 있는 뭔가를 결국 찾을 수 있지 않을까.
- 희극과 비극 사이 미묘한 결말의 뉘앙스는 지난 작품들에서도 꾸준히 보여준 특징인 것 같다. <더 킹> <관상> 등에서 아래로부터의 반란은 완전한 실패도, 성공도 아닌 선에서 줄타기한다는 느낌 으로 끝맺어졌다.
= 고쳐야 할 것 같다. 시청자나 관객들이 후련한 무언가를 좋아할 수도 있고, 재밌는 로맨틱코미디를 원할 수도 있다. 다만 <The 8 Show>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후련한 결과만을 이루어낼 수 있는 작품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음엔 나도 후련한 영화 한편 만들고 싶다. (웃음)
* 아래 내용부터 원작 <파이 게임>과 <The 8 Show>의 결말에 대한 강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원작과 결말의 차이가 있다. <파이 게임>은 주인공이 쇼를 나서는 장면에서 거의 마무리되지만 <The 8 Show>엔 1층의 장례식장 장면까지 추가됐다.
= 아무래도 계급에 관한 이야기다 보니 이야기가 달라져야 했다. 결국 1층에 있는 사람의 계획이 실패했고, 그 계획에 다른 사람들마저 공감했단 것이 굉장히 아이러니하면서 슬프게 느껴져야 했다. 이런 면에서 1층 캐릭터는 찰리 채플린을 오마주했고 캐릭터 설정이나 후반부의 여러 장면에서는 <모던 타임즈>를 오마주하기도 했다. <모던 타임즈>의 결말에서 두 주인공이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거의 해결하지 못한 채 걸어가는 그 장면처럼, 지금 우리의 시대도 딱히 나아진 것 없이 안 좋아지고 있단 생각이 있다. 그러니 마지막에 장례식장을 걸어 나서는 인물들의 모습에 <모던 타임즈>의 음악을 넣었고 함께 현대 도심의 풍경과 잡음을 섞었다. 언뜻 행복한 결말 같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라는 오묘한 인상을 주고 싶었다.
한재림 감독이 말하는 <The 8 Show>의 주역 8인
8층(천우희) 쇼를 주최한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8층이 재밌어하면 주최측도 재밌어한다는 것. 순수한 아이 같은 행위예술가란 설정이고, 정말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마치 라스 폰 트리에 감독처럼 남들이 다소 불편함을 내비친대도 <살인마 잭의 집> 같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일수록 도리어 가장 순수한 사람이 아닐까. 천우희 배우는 아마 이 8층 캐릭터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배우였을 것 같다.
7층(박정민) 이런 쇼에는 쇼의 전반적인 체계와 수요를 파악하는 인물이 한명쯤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원작에도 비슷한 캐릭터가 있다. 화장실 투표 때 진수를 뽑은 건 특별히 진수를 싫어한다거나 7층이 흑막이어서는 아니고, 이 쇼를 가장 오래 끌고 가기 위해선 8층을 뽑으면 안된단 합리적인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하지만 이렇게 똑똑한 캐릭터여도 결국 이 쇼를 설계한 주최측이나 세상 높은 사람들에겐 결국 닿을 수 없다. 이런 세계의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단 사실을 깨달았을 때 아주 큰 허무함을 느끼겠다고 생각했다.
6층(박해준) 본능적으로 판도를 잘 읽고 눈치가 뛰어난 사람이다. 나중에 밝혀지는 전사에서 전직 야구선수였고 특히 도루를 잘한 선수라는 사실이 나온다. 하지만 욱하는 성격에 추락했고 이제 자존감이 확 떨어진 인물이다. 그러니 이제 두려울 게 없고 돈만 딱 챙기면 된다는 솔직함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만큼 선택도 시원시원하니 쉽다. 쇼 내부의 안타고니스트인데 오히려 시청자들이 보면서 후련해할 캐릭터일 수도 있어서 아이러니하다.
5층(문정희)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문정희 배우만 생각했다. 배역 이름도 ‘문정’이라고 지어놓고 각본을 썼다. 연기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캐릭터다. ‘평화주의자’라고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던데 물론 고구마 같은 역할을 하긴 하지만, 알고 보면 굉장히 황당한 착각에 빠지는 인물이다. 그 돌변하는 순간에 목소리가 살짝 허스키해지면서 캐릭터를 이해한 연기를 보며 너무 놀랐다. 심지어 테이크도 많이 안 가는 데다가 촬영 현장에서도 배우들을 중재하는 역할까지 해줬다. 이를테면 이주영 배우가 울어야 할 장면에서 못 울고 있으면 슬쩍 가서 귓속말한다. 그러면 귀신같이 이주영 배우가 운다. 내가 “욕이라고 하는 거냐?”라고 농담 삼아 물었더니 영업비밀이라고 하더라.
4층(이열음) 극 중에서 4층은 “이 쇼에서 난 내가 인간이라고 생각 안 해요”라고 말한다. 이렇게 정말 이기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인물로 그리려 했다. 시나리오작가를 구할 때 “네가 이 쇼에 들어가면 어떻게 하겠냐?” 물어본 적이 있다. 한 작가가 “강자 편에 서겠다”라고 하더라. 그 작가를 바로 뽑아서 4층 대사를 쓰게 했다. 말 그대로 쇼의 ‘플레이어’란 말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이고, 무수히 붙이는 포스트잇만 봐도 알 수 있듯 자기 목적을 잃지 않기 위해 얄밉더라도 계속 나아가는 캐릭터다. 한편으론 연민이 가기도 하고. 배우의 실제 성격도 뭔가 조금 비슷하다. 남들은 오케이가 나면 넘어갈 상황에도 꼭 와서 오케이를 하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 어디 이상하지 않았냐고 꼭 묻는다. (웃음) 그래서인지 더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잘 나온 것 같다.
3층(류준열) 시청자들이 가장 공감해야 할 캐릭터다. 영웅도 아니고 자신과 가장 깊숙하게 동일시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너무 비겁하지도 너무 용감하지도 않은, 우리 마음속의 어떤 민망함이나 부끄러움을 건드릴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류준열 배우와 합을 맞추고 싶었다. 또 준열씨가 목소리랑 발음이 아주 좋다. 진중한 내레이션이나 개그 포인트까지 폭넓게 잘 살려줬다.
2층(이주영) 1층부터 8층까지의 모든 인물은 장점만 가지고 있지 않다.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으면서 마냥 다 공감할 순 없도록 만들고 싶었다. 각본에서 ‘춘자’라고 이름 지었던 2층 캐릭터도 언뜻 보면 가장 선하고 정의로운 캐릭터고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국엔 자기가 원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만 고집하면서 폭력적으로 변하는 모순적 모습을 보인다. 이런 아이러니함이 재밌게 잘 표현됐다.
1층(배성우) 원작 <파이 게임>에서도 1층 인물이 결국 흑막이었고, 여기서도 어느 정도의 반전은 등장한다. 원작 캐릭터의 톤은 갖고 있는 셈이다. 1층의 최종 목적이자 남들에게 숨겼던 사실은 10억원으로 방을 바꾸려는 목표였는데 결국 실패한다. 순진하고 어리석기도 하지만 결국 슬픈 캐릭터다. 방금 말했듯 찰리 채플린을 오마주했다. 결말 부분에서 1층의 장례식장 장면을 보면 3층이 1층의 영정 사진을 보며 “아무리 잘 살려고 한들 소용이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여기에 1층은 “우린 잘해나갈 수 있어요!”라고 답한다. 이 대화 역시 <모던 타임즈> 결말 부분의 대사를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