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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혼란으로 걸어 들어가기, 넷플릭스 시리즈 <베이비 레인디어>
김소미 2024-05-23

<베이비 레인디어> 사진제공 넷플릭스

‘미쳤다’는 말이 좋거나 훌륭한 느낌을 대리하는 속어처럼 쓰이기 시작한 시대에 <베이비 레인디어>는 적확한 수식어를 빼앗겨 억울할 법한 시리즈다. 4만1천여통의 이메일과 350시간 분량의 음성 메일을 보내고 라이브 공연의 훼방을 놓는 걸로도 모자라 부모까지 협박한 여자가 경찰의 제지로 마침내 인생에서 사라진 순간. 코미디언 도니(리처드 개드)는 삶에 “이상하고 섬뜩한 침묵”이 찾아왔다고 고백한다. 스토커 마사(제시카 거닝)의 부재에 “극심한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 그는 산더미 같은 음성 메시지들을 주제별로 분류해 폴더로 정리(특히 ‘칭찬 폴더’가 유용하다)하는가 하면, 그녀의 사진을 들고 자위하기에 이른다.

<베이비 레인디어>를 보는 사람은 번번이 포식자의 먹잇감을 자처하는 주인공을 답답해하는 사람과 도니를 부정할 수만은 없는 심정으로 모종의 거울치료에 동참하는 이들로 나뉜다. 어리석은 주인공이 필요 이상으로 수난받는 서사의 대부분이 작가의 악취미이기 이전에 게으름이라고 믿는 나는 전자로 남길 바랐으나 4화 무렵 참패했다. 경찰서 신고 접수대에 선 도니가 마사 스콧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떠올려서다. 왜 이제야 신고했느냐는 시답잖은 질문 하나가 그를 수년 전에 당한 성폭행의 기억으로 침수시킨다. 4화에서 다시 첫 에피소드의 오프닝 장면으로 돌아온 시점에 인간 도니 던도 자신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자신의 코미디 영웅 중 하나인 50대의 남성 작가 대리언에게 직업적 희망을 거래물로 두고 당한 성폭행, 전 여자 친구와의 무력한 이별, 트랜스젠더와 공개 연애를 꺼리는 마음, 가톨릭교회 출신의 양성애자 아버지, 부모에게 커밍아웃하기, 더 큰 무대와 더 나은 관중을 향한 환상, 기타 등등등….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은 도니의 목소리를 빌려 재구성한 1989년생 코미디언 리처드 개드의 실제 경험담이다.

별다른 홍보도 없이 공개 한달 만에 6천만 시청 조회수를 기록, 곧 <기묘한 이야기> <웬즈데이> 등이 오른 넷플릭스 전세계 톱10 시리즈 대열에 합류할 전망인 <베이비 레인디어>에 관해 유수 일간지뿐 아니라 각종 심리학 단체가 신나게 칼럼을 발표하고 있는 이유도 별반 다르지 않다. 형편없는 코미디언으로 묘사되는 시절의 도니가 청중을 웃길 수 있었던 몇 안되는 한마디가 “전 여자 친구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미워하는 일”인 것처럼, 자기혐오는 동시대에 가장 각광받는 테마다. 삶에 불행의 반복적 패턴을 그려내는 자질에 대해서라면 누구나 자신의 전문가이고, 리처드 개드의 경우 인생을 서사화하려는 극작가적 본능까지 결합해 한층 괴로운 울림을 자아낸다(그는 훌륭한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핵심 역량은 글쓰기라고 첨언한다). 스스로가 미쳤다는 걸 너무 잘 알고 그것을 기막히게 서술하는 화자의 목소리라니. 그런 것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녀(스토커 마사)는 내가 잃은 모든 것들로부터 주의를 돌리게 해줬다.”

“그(강간범 대리언)가 내게 준 자신감, 가치를 인정받은 느낌, 언젠간 내 삶이 어딘가로 이어질지 모른단 희망이 그리웠다.”

말하자면 비극 <베이비 레인디어>의 중핵은 화자의 하나뿐인 목소리다. 리처드 개드는 자신의 분신인 도니가 폭력의 징후로 수렴되는 인간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크고 복잡한 자아의 소유자이기를 원한다. 혼돈의 내러티브에 응집력을 불어넣는 리처드 개드의 보이스오버는 얼핏 무분별해 보이지만 자전적 경험을 엄격하게 통제해 추출한 결과물로, 비비언 고닉을 위시한 20세기 후반의 훌륭한 회고록 작가들이 내세운 서사적 페르소나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상처투성이 인간을 만든 두개의 기원- 성폭력과 스토킹- 이 현실에서는 결코 피해 당사자의 성향이나 특질 문제와 결부되어선 안된다는 점도 이 드라마의 위험한 희소성을 만든다.

여기까지가 <베이비 레인디어>가 일으킨 감정적 반향이라면, 공개일(4월11일) 이후 한달이 지나 격화된 사회적 후폭풍은 따로 있다. 지난 5월8일, 영국 언론인 피어스 모건이 운영하는 유튜브 토크쇼 <피어스 모건 언센서드>(Piers Morgan Uncensored)에 마사 스콧의 모델이 된 58살의 스코틀랜드 여성 피오나 하비가 출연한 것이다. 그는 한때 “최대 6개의 이메일 주소와 4개의 전화기를 가지고 각기 다른 사람에게 사용했다”는 점을 시인함으로써 <베이비 레인디어>를 사로잡은 뜻밖의 타이포그래피 “iPhone에서 보냄”에 힘을 실었다. 한편 하비는 리처드 개드의 스토킹 혐의로 법정에 서서 유죄 판결을 받은 적이 없다고 밝히며 “리처드 개드는 나의 불행으로 돈을 버는 최고의 여성혐오자”라고 맹비난했다. 개드가 실존 인물이 누구인지 특정하지 못하도록 위장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해도, 첫 번째 에피소드 오프닝에서 나오는 문구, “이것은 실화입니다”가 결정적인 분쟁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또 ‘스토킹의 스토킹’ 문제도 있다. 작품에 과몰입한 인터넷 탐정단이 개드의 SNS를 뒤져 일찌감치 하비를 아우팅하고 협박 메일을 보냈으며, 모 방송국 프로듀서를 실제 성폭행 가해자로 무분별하게 지목하는 바람에 개드는 부리나케 사실을 바로잡는 성명서를 내야 했다.

<베이비 레인디어>가 세상에 나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리처드 개드는 자기 서사를 말하는 데 용기를 낸 피해자였는데 <베이비 레인디어>가 이토록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 지금은 강자로도 불린다. 그의 사회적 책임은 어디까지이고 예술가로서의 윤리강령은 어느 선에서 정리될 수 있을까? 아니, 정리될 수 있기는 한 걸까? 개드는 LA에서 열린 GV에서 스스로 마사 캐릭터에 “독하게 이입”했으며 자신의 페르소나가 스토커를 거의 사랑하도록 만든 것을 강조했지만, 무기력한 주인공을 동원해 자연스럽게 우회한 재현의 몇몇 맹점도 받아들여야만 할 것 같다. 뉴미디어 법안 개정을 앞둔 영국에선 지난주 넷플릭스 정책 책임자 벤자민 킴이 ‘프라이버시 및 스토리텔링 윤리에 관한 의회 청문회’에 참석해 일반인 당사자의 신원 보호를 위한 조치를 충분히 취하지 않은 점을 해명하기도 했다. 극 중 모든 세부사항이 윤리적 결백과는 이보다 더 거리가 멀 수 없는, 그러니까 ‘미쳐버린’ 창작물이 스토리텔링의 윤리에 관한 이보다 더 거셀 수 없는 후폭풍을 낳는 풍경은 역사적이다. 그리고 끝나지 않는 스토킹을 지켜보는 것처럼 정말이지 혼란스럽다.

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쏟아지는 영화·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유독 치우치게 사랑한 작품들을 소개하고 분석합니다. 편애와 애착, 새벽까지 이어진 과몰입으로 생겨난 마음의 기울기가 때로 정확한 모서리에 가닿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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