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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영화제 특집] 이것은 테라피가 아니다, 경쟁부문 상영작 <수의> 데이비드 크로넌버그 감독
김혜리 2024-06-01

영화제 8일째 강풍이 몰아치는 칸 크루아제트 해변의 호텔 테라스에서 만난 데이비드 크로넌버그의 인상은 한마디로 표표했다. 하얗게 풍화한 화강암처럼 창백한 얼굴은 백발과 동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떤 감상과 욕망에도 흔들리지 않을것 같은 이 노장은, 2017년 창작 파트너이자 동반자였던 캐롤린 제프만을 암투병 끝에 여읜 정념 가득한 경험을 모티브로 <수의>(The Shrouds)를 만들었다. 애도와 상실을 다룬 무수한 영화를 보았지만 이런 식의 진혼곡은 처음이라는 말을 <애프터썬>(2022)을 보고 했던 나는 <수의>에서 그 감상을 하릴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SHUTTERSTOCK

- <수의>에 등장하는 시신의 상태를 모니터링하는 무덤이 실제로 있다면 이용하겠나.

= 잘 모르겠다. 앞서 만난 기자들은 전혀 의향이 없다고 하더라. (웃음) 그런데 전세계를 돌아보면 희한한 매장 문화가 많다. 과거와 현재의 다양한 매장 풍속을 리서치했다. <수의>에 나오는 그레이브테크(gravetech. 극 중 카쉬(뱅상 카셀)가 경영하는 기업)의 디지털 장묘도 충분히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 종교계 종사자들이었나.

= 아니, 일반인들이었다. 우리 중 일부는 다음 생이나 천국에서 사랑하는 이를 다시 만날 거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매장이 끝이 아니기에 망자의 몸에 관심이 크지 않다. 하지만 지금 여기의 삶이 전부고 천국 같은 곳은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겐 죽은 이의 육신이 남아 있는 전부다. 매장할 경우 그 육신은, 적어도 유골은 매우 오랜 기간 지속된다. 지금도 5천년, 1만년 전 유골을 발굴하곤 하지 않나. 그것이 화장한 한줌의 재보다 나은가 못한가는 개인이 판단할 문제다.

- 수의(shroud)라는 개념에 왜 끌렸나.

= ‘수의’라는 명칭을 쓴 건, 시체를 감싸는 천이 장례의 고전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위해 ‘수의’라 불리는 미적인 물건을 만들어내긴 했지만, 사실상 영화 속 묘지는 현존하는 테크놀로지로 실현 가능한 시스템이다. 무덤에 3D 카메라를 배치하고 관 속에 10년 이상 가는 LED 조명을 설치하면 시신이 변화하는 과정을 외부에서 지켜볼 수 있다.

- 생로랑 필름이 공동 제작사 중 하나인데 이브 생로랑이 프로듀서로서 영화 속 디자인에도 참여했나.

= 수의 말고 영화 속 인물의 의상에는 참여했다. 물론 생로랑 브랜드를 입을 법한 인물에게만 입혔다. 특히 베카(다이앤 크루거)는 영화에 거의 나체로 등장하기 때문에 생로랑이든 뭐든 입질 않는다.(웃음) 영화에 쓰인 의상은 전형적인 생로랑은 아니고 생로랑 스타일은 분명하되 별도로 구성된 팀이 디자인한 ‘영화 의상’이다. 지금 내가 걸치고 있는 옷과 신발 모두 이브 생로랑 제품이다. 심지어 ‘이브 생로랑’이 새겨진 물통도 갖고 있다. (좌중 폭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생로랑 필름이 제작비의 3분의 1을 투자했다는 점이다.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생로랑 필름 작품이 세편이나 올랐다(<수의>외에 생로랑 필름 작품으로 자크 오디아르의 <에밀리아 페레즈>, 파올로 소렌티노의 <파르테노페>가 경쟁부문에 진출했다.-편집자).

- 이 영화를 만들면서 무엇이 가장 큰 도전이었나.

= 모든 부분이 도전이었다. 예컨대 <수의>에서는 묘지 디자인이 큰 일이지만 각 포지션을 적격자에 맡기는 캐스팅처럼 보펴적인 일도 그만큼 이나 복잡하고 중요했다. <수의>는 캐나다-유럽연합 공동제작 영화였기 때문에 미국인, 영국인은 고용할 수 없었다. 이런 사실은 일반 관객이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지만, 감독/프로듀서로서는 챙겨야 할 일이다.

- 카쉬 역의 뱅상 카셀이 감독과 무척 닮았는데.

= 헤어스타일은 정말 우연의 일치다. 뱅상이 삭발을 하고 현장에 왔더라도 그대로 찍었을 거다. 그나저나 적잖은 수의 사람들이 내가 뱅상보다 아름답다고 말해줬다. (좌중 폭소)

- <수의>는 매우 사적인 영화라고 스스로 밝혀왔다.

= 모든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사적이다. 단지 모두가 알아차릴 수 있도록 표나게 사적인 영화가 있고, 나를 가까이 아는 사람만 눈치챌 수있는 사적 영화가 있을 뿐이다. <수의>는 전자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와 융이 나오는 <데인저 러스 메소드>도 프로이트와 심리분석이 창시된 시대에 대한 애정이 강한, 내겐 개인적인 영화지만 남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 욕망의 한 방식으로서 페티시즘에 지속적 흥미를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 정신분석학적으로 페티시즘은 아주 특정한 의미가 있다. 엄밀히 말해 내가 해온 작업이 페티시즘적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 그렇다면 바꿔 질문하겠다. 애도를 사람들은 보통 감정적 현상으로 여기는데 <수의>는 애도를 육체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 같다. 슬픔이 애도자의 몸에 미치는 현상이나 망자의 몸에 대한 그리움에 주목하고 있다.

= 죽은 이를 그린다고 매일 그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는 마비되고 무기력해져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카쉬는 아내를 잃고 4년이 지난 상태다. 그가 아내의 동생 테리(다이앤 크루 거)에게 “나는 베카의 몸 안에서 살았다. 그녀의 몸이 내겐 세계를 의미했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곧 애도다.

- 젊은 초짜 감독이었던 수십년 전의 청년 크로넌 버그를 만난다면 뭐라고 말하겠나.

= 처음 영화를 만들 때는 아무것도 모른다. 파키스탄계 영국 청년 하니프 쿠레이시는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의 각본을 쓴 다음 직접 연출도 했지만 재앙 같은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스태프들은 모두 감독의 의견을 구하는데 답은 하나도 모르겠고, 배우와 어떻게 대화해야 할지, 카메라로 공간을 어떻게 나눌지 아무것도 몰랐다고 했다. 나는 언더그라운드 영화를 연출한 다음 데뷔했으니 조금은 덜 막막했지만 대동소이했다. 감독을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자신이 어떤 종류의 감독인지 파악하고 일정한 자신감을 확보하고 나면, 당신 버전의 감독이 뭘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이 깨달음 이후 지난 20편의 영화는 내게 대체로 똑같았다.

- 영화 후반부에 글로벌 음모이론이 등장하는 구성이 갑작스럽다.

= 기자회견에서 어느 기자가 영화가 후반에 접어들어 갑자기 음모이론에 관한 영화로 변했다고 질문했다. 매우 무지한 반응이다. 망상증(paranoia)과 음모이론도 비탄에 대처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한 사람의 죽음에 아무 의미가 없다면, 이유를 찾을 수 없다면 비탄은 끝간 데를 모른다. 우리는 의미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 진화했다. 사회적 결속, 철학적 위안 등 여러 가지를 얻기 위해 의미를 구한다. 그런데 음모론은 의미를 발명해낸다. 카쉬는 아내의 죽음이 거대 음모를 밝혀내는 역할을 했다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결론 짓고 나면 남들은 모르는 진실을 나만 안다는 생각에 권력을 가진 느낌을 갖게 된다. 나아가 그 힘의 감각에서 성적 흥분이 발생한다. 그렇지만 당신이 (의미를 부정하는) 실존주의자라면? 인생이 부조리극 비슷한 것이라면?

- 아내를 잃은 슬픔을 감내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테라피로서 이 영화를 만든다는 생각이 있었나.

= 전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누군가가 내 영화의 구조나 드라마에서 도움을 얻었다면 아름다운 일일 거다. 그러나 예술은 수용자에겐 어떨지 몰라도 예술가 본인에겐 치료가 될 수 없다. 나는 영화감독이고 현장에서 조명과 앵글을 염려하는 기술자다. 개인적으로 테라피는 받아본 적이 없고 필요를 느낀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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