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프런트 라인
[비평] 연약한 인간의 몸과 기계 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이하 <새로운 시대>)와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이하 <퓨리오사>)는 모두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한다. “교만의 대가로 몰락”(<새로운 시대>)하거나 또는 “인류가 스스로를 파괴”(<퓨리오사>)한 결과로 도래한 또 다른 세계에 남겨진 자들에 대한 영화. 일주일 사이로 서로 연관된 두편의 영화를 본 후 머릿속에 남겨진 몇몇 이미지들이 있었다. 디지털이 덧입혀지지 않은 인간의 몸과 퓨리오사의 기계 팔.

연약한 인간의 몸에 대하여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그 어떤 인물 형상과 액션도 디지털로 그려낼 수 있는 시대에 그에 의존하지 않는 인간의 몸은 어떠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존재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 이 질문의 시작은 <새로운 시대>의 한 장면에서 비롯됐다. 내게 <새로운 시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말과 지성을 잃은 인간 무리(또는 에코들)가 냇가에서 유인원에게 쫓기다 포획되고 학살당하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은 <새로운 시대>에서, 아니 2011년 리부트된 <혹성탈출> 시리즈 전체 작품의 여러 스펙터클과 비교해도 가장 볼품없는 액션 장면처럼 느껴진다. 이상한 것은 그것이 미숙한 연출이나 연기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뛰어나진 않지만, 지극히 보통의 수준에서 연출된 장면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장면에서 어떤 조악함이 느껴진 까닭은 인간의 몸과 디지털 이미지로 창조된 형상간에 액션의 강도와 속도가 서로 부조화스러웠기 때문이다. 말 위에서 거칠게 공격해오는 디지털 이미지로 덧칠된 유인원의 압도적인 힘과 속도에 비해 냇가에서 맨몸으로 쫓기듯 달리는 인간의 움직임은 부자연스럽거나 아마추어적인 연기처럼 느껴진다. 인간의 순간적인 움직임을 근접촬영한 장면의 경우에는 촬영 테크닉을 통해 속도감과 긴박감을 만들어내지만, 그 전체 움직임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롱숏과 익스트림 롱숏은 인간 존재의 액션이 영화의 긴박감과 속도감에 브레이크를 건다. 디지털 스펙터클의 장애물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새로운 시대>에서 인간 존재는 말과 지성을 잃은 것뿐만 아니라 액션의 중심으로서의 지위도 함께 잃고 있다. 그리고 일주일 후 <퓨리오사>를 보았다. <퓨리오사>는 인간의 몸이 액션의 중심을 이룬다. <퓨리오사>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만큼 매력적인 작품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영화 중반에 사막을 질주하는 전투트럭을 중심에 놓고 굴욕자들과 워보이 등이 한판 승부를 벌이는 액션 장면만큼은 <분노의 도로> 이상의 시각적 쾌감을 안겨준다. 물론 이 장면이 영화의 정점으로 자리하면서 그 이후 등장하는 무기농장 전투나 황무지 40일 전쟁, 그리고 퓨리오사가 디멘투스를 추격하고 처벌하는 장면 등에서 오히려 맥이 빠진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이 장면 자체만 놓고 본다면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매혹적인 스펙터클로 꼽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다. 조지 밀러는 이 장면에서 전투트럭과 황무지를 마치 ‘태양의 서커스’가 공연되는 무대로 활용한다. 수직과 수평 그리고 삼차원적 깊이까지 화면의 모든 측면을 활용하면서 인간의 몸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 수준의 아슬아슬한 애크러배틱 서커스를 펼친다. 라이딩과 카레이싱, 수상스키와 패러글라이딩을 응용한 질주, 장대에 의탁한 공간 이동 등에서 인간의 몸은 극한의 위태로움에 노출된다. 미친 듯이 질주하는 속도감은 그 위태로움을 더 배가한다. 조지 밀러는 인간 몸이 얼마나 연약한지 그리고 연약함에 비례해 위험이 커지고, 위험이 커질수록 움직임은 서스펜스로 전환되고, 그 서스펜스의 끝에는 스펙터클의 경이로움이 기다리고 있음을 너무나 잘 안다. 그것은 인간의 몸을 활용하는 서커스가 관객에게 주는 쾌감과 다르지 않다.

<새로운 시대>에서 인간 몸의 연약함이 영화의 속도와 긴박감을 축소시킨다면 <퓨리오사>의 이 장면은 인간의 몸을 최대치로 활용하며 시각적 쾌감을 극대화한다. 인간은 (여전히) 그저 뛰고 구르고 부딪힌다. 하지만 그 단순한 동작이 디지털 이미지가 창출한 속도감과 충돌하며 (아직은) 인간의 몸만이 줄 수 있는 영화적 쾌감을 선사한다. 조지 밀러에게 디지털 이미지는 배경으로 기능할 뿐 영화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몸이다. 오해는 말라. 나는 스펙터클에서 인간의 몸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내 관심은 디지털 이미지 시대에 인간의 몸이 어떻게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있다. 인간의 몸이 그 어떤 액션을 하든 또는 그 어떤 경이로운 스펙터클이 펼쳐지든 간에 (뻔한 말이지만) 결국 인간이 선사하는 액션의 본질은 그 몸이 살과 피로 이루어진 연약한 존재라는 자명한 사실에 있다. 온전한 인간의 몸이든 디지털 이미지로 창조된 몸이든 간에 어쩌면 그 연약함이야말로 스크린 앞의 우리가 느끼는 불안, 공포, 서프라이즈, 서스펜스 등 고유한 정서적 체험의 보이지 않는 전제일 것이다. <퓨리오사>의 그 장면은 더 화려해지는 스펙터클과 함께 점점 잊혀져가던 자명한 진실을 되살려낸다.

새로운 시대와 기계 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새로운 시대>와 <퓨리오사>에서 아버지는 모두 실패한다. 심지어 <새로운 시대>의 아버지는 모두 죽는다. 유인원의 상징적 아버지인 시저의 장례로 문을 여는 <새로운 시대>는 노아의 친아버지도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했던 라카와 프록시무스도 모두 죽음을 맞는다. 아버지의 죽음은 새로운 시대의 필요조건일 수 있으나 충분조건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시대와 어떻게 단절하는가다. 두 작품에서 세계를 파멸시킨 원인이 파멸의 결과로서의 세계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그렇기에 두 작품 모두 ‘구원’이라는 주제를 내세운다. 구원은 반복되는 악순환의 연쇄고리를 끊을 때 가능하다. 실제로 <새로운 시대>는 노아가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면서 중단된 성인식을 또 다른 방식으로 완료하는 것, 그럼으로써 성인에 이르는 문턱을 통과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를 지배하는 것은 유령처럼 떠도는 시저의 잔상이다. 여전히 시저는 지배자고 노아는 그 자장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이후 작품들에서 노아가 어떻게 변화할지 확언할 순 없지만 <새로운 시대>만 놓고 본다면 새로운 시대보다는 시저의 부활을 꿈꾸는 쪽에 더 가깝다.

새로운 시대와 관련해 더 흥미로운 작품은 <퓨리오사>다. <퓨리오사>는 과시적이고 과잉적인 남성성의 온갖 표상들(그것이 문화적인 것이건 기계적인 것이건 간에)을 뒤섞으며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시대를 그려낸다. 그러니까 종말 이후의 아버지의 시대는 온갖 저급한 남성적인 것들이 자유분방하게 표출되는 시대다. 실제로 <퓨리오사>는 표상적 차원에서 남성성과 전통적으로 결부됐던 트럭, 바이크, 굴착기 등 중장비 기계를 비롯해 온갖 금속성의 이미지들을 영화 속으로 끌고 들어와 B급 문화 또는 하위문화의 향연으로 변주한다. <퓨리오사>는 일종의 정크아트라 불러도 무방한데 조지 밀러는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정크아트의 소재로 활용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낡고 쓸모없어진 잡동사니가 바로 과시적이고 과잉된 남성성의 표상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퓨리오사>는 지금의 주류문화에서 시대착오적이고 낡고 녹슬고 쓸모없어져 버려진 폐기물과 과잉적이고 과시적인 남성성을 등가적으로 위치시킨 뒤, 그것들을 긁어모아서 창조된 조지 밀러식의 정크아트 영화다.

<퓨리오사>는 이러한 남성적 세계가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 굳이 감추지 않는다. 디멘투스가 애지중지하며 몸에 달고 다니는 인형은 그가 내세우는 마초적 남성성의 취약함과 이중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기에 이러한 과잉된 남성성은 위협적이기보다는 조소를 동반하는 희극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퓨리오사는 남성적 표상으로 가득한 세계에 홀로 내던져졌다. 실제로 어린 시절 퓨리오사는 디멘투스를 비롯한 남성들의 소유물이었다. 과잉된 남성성의 세계에서 남성적 표상의 사물을 소유하고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는 능력이 남성성을 과시하는 수단인 것처럼, <분노의 도로>에 등장한 여성들이나 어린 시절의 퓨리오사 역시 마찬가지 처지였다. 흥미로운 것은 퓨리오사가 사라진 한쪽 팔을 금속성의 기계로 대체한다는 점이다. 퓨리오사는 남성의 소유물에서 남성적인 것을 소유한 자로 자신의 위치를 전환시킨다. 그렇게 남성적인 것을 훔치고 전복한다. 그리고 그 금속적인 것은 복수 너머의 구원의 행위로 나아간다(내게 <분노의 도로>는 구원을 향한 여정이었다). 금속적인 것으로 대체된 퓨리오사의 팔과 함께, 이제는 몰락해버린, 그리고 희극적으로 과잉된 남성성의 세계는 또 다른 가능성을 가진 새로운 시대로 전환된다. 달리 말하면 디멘투스의 말처럼 살아 있지만 이미 죽어 있었던 과잉된 남성성의 시대를 죽음이라는 제자리로 돌아가게 한다. 어쩌면 ‘새로운 시대’라는 제목은 <퓨리오사>에 더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