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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과거에 서서 영화의 미래까지 사랑하다, 난니 모레티 감독의 픽션 페르소나는 어떤 변화를 관통하나
정재현 2024-06-07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순탄할 리 없다. 이를 영화를 만들어본 적 없는 관객도 수많은 ‘영화 만들기 영화’를 통해 학습해왔다. <찬란한 내일로> 속 영화 만들기도 마찬가지다. 베테랑 영화감독 조반니(난니 모레티)가 5년 만에 만드는 제목 미상의 신작 영화는 프로덕션 내내 난항‘만’ 겪는다. 처음 함께한 제작자 피에르(마티외 아말릭)는 가끔 현장에서 이상행동을 하고 주연배우 베라(바르보라 보뷸로바)는 대부분 감독과 상충하는 해석을 내놓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평생 조반니의 영화를 제작한 아내 파올라(마르게리타 부이)는 조반니에게 별거를 선언하고 딸 엠마(발렌티나 로마니)는 부모보다도 연상인 폴란드 대사 예지(예지 스투흐르)와 열애 중이다.

바람과 대척을 이루는 현실 앞에서

관객은 조반니의 신작을 두고 찬란한 내일을 낙관하기 어렵다. 오히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결말을 비관하게 된다. 희망을 놓지 않고 영화제작의 투지를 불사르는 작중 캐릭터는 조반니가 유일하다. 감독인 난니 모레티가 직접 연기한 조반니는 영화 그 자체를 형상화한 캐릭터다. 그게 아니라면 조반니처럼 살기는 어려워 보인다. 조반니는 파올라가 제작 중인 신예감독의 촬영 현장을 찾고 두번이나 기함한다. 급기야 감독이 지정한 폭력 신의 구도를 문제 삼은 뒤 건축가, 수학자, 미술사학자 심지어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과 전화 연결까지 동원하며 후배 감독이 프레이밍을 바꾸어야 하는 까닭을 열변한다. 조반니는 굳이 신작의 크랭크인 전 온 가족을 모아놓고 자크 드미의 <롤라>를 감상하는 오랜 의식을 펼친다. “하던 대로 안 하면 모든 게 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신작 촬영 내내 조반니가 불평하는 건 베라가 신은 슬리퍼처럼 뒤가 트인 구두(뮬)다. 조반니는 대체 왜 슬리퍼를 신고 출근하냐고 툴툴대며 <더 파더>의 앤서니 홉킨스, <블루스 브라더스>의 어리사 프랭클린의 걸음걸이가 현실에 존재하길 바란다.

그런데 조반니의 바람은 언제나 좌절된다. 신인감독은 날이 새도록 충고하는 선배가 무색하게 본인이 찍고 싶은 대로 마지막 장면을 완성한다. <롤라>의 오프닝 시퀀스가 올라간 이후 아내와 딸은 각자의 사정으로 소파를 떠난다. 베라 또한 아랑곳 않고 뮬을 신고 현장을 누빈다. 파올라는 조반니에게 “다들 이런 영화 만들고 이런 영화 봐”라며 대꾸하고, 베라는 “누가 요새 정치물 봐요? 이 영화도 사랑 이야기 아녜요?”라고 되묻는다. 하지만 조반니는 파올라가 말하는 ‘이런 영화’의 대척점을 원하고 베라가 의문시하는 정치물을 만든다. 조반니는 현실도 영화의 논리로 살고자 하지만 현실은 당연히 영화를 비켜나간다.

조반니가 저항하는 것, 고수하는 것

그런데 조반니는 포기하지 않는다. 고꾸라질지언정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는 조반니의 궤적엔 감독 난니 모레티의 이름이 자연히 겹친다. 조반니 모레티가 난니 모레티의 본명이라는 점까지 나아가지 않아도 좋다. 자신이 영화에 등장할 때면 분신으로 미켈레를 내세웠던 난니 모레티는 <나의 즐거운 일기>(1994) 이후 직접 조반니(혹은 난니)를 대놓고 출연시켜 메시지의 대리인으로 삼았다. 다만 로베르토 로셀리니페데리코 펠리니 등 선배 감독의 흔적을 찾는 <나의 즐거운 일기> 속 조반니와 달리, <찬란한 내일로>의 조반니는 직접 영화 속에서 자기의 작품을 연출 중이다. 어떻게든 본인이 원하는 방향대로 영화를 만들려는 조반니의 모습에도, 실제 영화처럼 편집된 조반니의 신작에도 지난 50년간 영화를 만들어온 난니 모레티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령 신작에 어깃장을 놓는 넷플릭스 제작진을 향해 타비아니 형제의 <성 미켈레의 수탉>(1972) 결말을 언급하는 조반니의 모습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시네마 계보에서 타비아니 형제의 직속 후계자로 난니 모레티가 위치하는 영화사의 맥락이 더해진다. 혹시 관객들이 놓칠세라 “나는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찍고 있다”고 고백하는 후배 감독을 바라보는 조반니의 리버스숏까지 친절하게 존재한다.

조반니는 영화의 주인공이자 풍자의 대상이다. 영화는 변한 영화계의 현실을 한탄하며 자기의 방식을 고집하는 조반니를 무구한 존재로 그려 연민하기보단 제 분수를 모르는 사람처럼 그리길 택한다. 조반니가 원하는 영화 세상은 제목부터 모레티의 창작론을 그대로 보이는 장편 데뷔작 <나는 자급자족한다>(1976)로부터 이미 반 세기 가까이 떨어져 있다. 수집한 우표를 청산해 번 돈으로 구매한 슈퍼 8mm 카메라로 장편 데뷔작을 찍던 70년대의 영화 청년은 변한 현실에 투덜대지만 은연중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다. 조반니를 담는 촬영 방식의 변화가 이를 분명히 한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파시즘의 잔재를 영화와 대중매체에 동치한 <나의 즐거운 일기>에서 카메라는 조반니의 뒷모습을 끝없이 트래킹했다. 하지만 <찬란한 내일로>의 카메라는 조반니의 뒷모습에 카메라를 거의 가져다대지 않고 오로지 조반니의 정면만 담는다.

조반니는 더이상 영화보다 앞장서서 영화와 이탈리아 정치사의 교차점을 좇지 않는다. 그걸 좇기엔 그사이 시간도 많이 흘렀고 모레티의 영화사적 위치도 달라졌다. 그저 시네마의 끝자락을 절실히 붙잡는 조반니의 곁에 머물며 그의 앞모습을 담을 뿐이다. 조반니는 사그라지지 않는 영화를 향한 첫사랑을 끝까지 고수하려 하지만, 시차에 비례해 그의 사랑과 이격이 생기는 현장을 바라볼 때 분노한다. 제 작부의 한 젊은 스태프는 1956년 이탈리아 정치적 격변기를 다룬 신작의 시놉시스를 듣자마자 “이탈리아에도 공산당이 있었어요?”라고 해맑게 반문한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현장엔 누군가의 실수로 두 차례나 이어폰, 목 마사지기 등 현대의 물건이 존재한다. 이를 매번 조반니가 발견하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과거의 배경에 뜬금없이 놓인 현대의 물건처럼, 조반니 역시 현대의 영화가 거의 요구하지 않는 과거의 스피릿을 유물 삼아 무장한 채 2023년에 서 있다.

한데 조반니가 바라는 시네마는 결국 동료들과의 협업으로 완성된다.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이 이를 명백히 보여준다. 붉은 페인트가 묻은 붓을 든 장인 넷이 줄에 의존해 벽을 내려오며 <찬란한 내일로>의 원제인 ‘IL SOL DELL’ AVVENIRE’를 그린다. 바로 이어지는 장면이 영화 속 영화임을 눈여겨볼 때, 장인들의 원숙한 합으로 시작하는 이 장면은 영화 속 영화의 오프닝으로도 영화 전체의 오프닝으로도 볼 수도 있다. 엔딩에 이르면 <찬란한 내일로>에 등장한 모든 출연진이 거리를 행진한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조반니가 영화의 결말을 통째로 바꾸어야겠다고 말하는 순간 저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결말을 이야기한다. 결국 조반니와 불화하던 이들도 때가 오면 소리 높여 지금 찍는 영화에 대한 사랑을 기꺼이 고백하는 존재들이다. 모두가 웃으며 영화는 끝난다. 조반니는 모든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까. 그래도 조반니가 적당히 융통성을 발휘하지 않고 세상과 불화하길 바란다. 모든 문제를 대사로만 전달하는 연출의 수가 영화의 치명적 단점으로 다가오지만 영화를 보다보면 혹은 듣다보면 그의 잔소리도 어느새 정겹게 느껴진다. 그리고 카메라 뒤에서 이를 흐뭇하게 바라볼 난니 모레티 영감의 미소도 어쩐지 눈앞에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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