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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함이 주는 불편함’이 주는 불편함, 박홍열 촬영감독에게 듣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
박홍열(촬영감독) 2024-06-13

영화가 시작되고 대략 3분7초 동안 관객은 타이틀 외에 어떤 것도 보지 못한다. 오프닝 타이틀은 1분가량 지속된다.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은 관객들에게 아직 다음 화면을 볼 준비가 더 필요하다는 식으로 타이틀이 사라지고 나서도 다시 검은색 무지 화면을 2분10초가량 보여준다. 기다림의 시간 끝에 만나는 첫컷은 호숫가 주변으로 소풍을 나온 행복한 가족과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담은 롱숏이다. 영화주인공인 아우슈비츠 3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의 가족 나들이 장면이다. 이 영화는 초반 가족 나들이 장면을 제외하고는 카메라가 집 밖을 거의 나가지 않는다. 밖의 이미지들은 사운드를 통해 집 안으로 들어온다. 집 안에만 머무는 카메라는 인물들에게도 다가가지 않는다. 와이드렌즈를 통해 멀리서 풀숏이나 롱숏으로 인물들을 보여준다. 카메라가 떨어져서 인물의 풀숏을 잡는다. 한 인물을 포커싱할 때도 카메라는 인물들에게서 멀어져 망원렌즈 풀숏으로 표현한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망원렌즈로 인물을 당기지도 않고, 광각렌즈로 인물에게 다가서지도 않는다. 아주 가끔 인물이 카메라 앞으로 오는 경우가 있지만, 그조차 카메라는 반기지 않는다.

인물들이 카메라로 다가서면 그 인물의 상을 왜곡시킨다. 카메라는 인물들에게 철저히 거리감을 두고 바라본다. 카메라는 영화 전체를 일관되게 관조하면서 관객들에게도 거리를 두고 이 집 안의 풍경과 인물들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인물과 카메라의 거리감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카메라가 인물에게 다가간 장면은 집 안 거실에서 소각장 건축 회의를 할 때이다. 영화의 첫 장면이 등장하고 정확히 15분 뒤다. 이 집의 주인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의 팔이 화면 오른쪽에 보이고 관계자가 그에게 수용소 가스실 소각장을 설명한다. 카메라는 루돌프의 팔 옆에 와이드렌즈를 장착하고 낮은 위치에서 이 회의에 함께 참석한다. 카메라는 설명을 듣고 있는 루돌프의 입장이기도 하고, 이 은밀한 회의에 관객이 함께 참석하길 요구하는 감독이 보내는 초대장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모든 화면들에 대한 안내문이기도 하다. 관객은 이때 비로소 알게 된다. 이 집 안 담장 너머 선명하게 보이는 공장 같은 건물과 굴뚝의 연기들이 아우슈비츠수용소 가스실의 연기라는 것을. 이 신 이후 관객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의미적으로 같은 이미지만을 보게 된다. 이 대화 신에서 카메라는 액션컷과 리액션컷 모두 인물들을 같은 거리에서 보여준다. 카메라가 회의하는 인물들과 떨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는 마주 앉은 사람들의 거리만큼 가까이 앉아 있다. 카메라와 인물들 사이 물리적 거리감이 가까워서 이 장면을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대량 학살의 역사적 현장을 아주 가까이서 보고 듣게 만든다. 반면에 화면 안에서 회의를 하고 있는 독일군은 눈앞의 현실을 거리를 두고 무감하게 바라보게 한다. 일반적인 슈퍼35 센서의 카메라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인물과 카메라의 거리감이다.

이 영화는 소니 베니스2 카메라로 촬영되었다. 소각장 건축 회의에서 인물들을 풀숏으로 보여주면서도 카메라가 인물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도 풀프레임 이미지 센서에 와이드렌즈를 장착했기 때문이다. 8.6K 센서의 고해상도 날카로운 선예도와 와이드렌즈의 넓은 화각이 만나고 조리개를 활용한 깊은 심도까지, 선명함에 선명함을 더한다. 그와 같은 극도의 선명함이 이질적인 낯섦과 이상한 불편함을 만든다.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가정처럼 보이는 집 안 실내 공간들은 왜곡이 아닌 듯 왜곡되어 있다. 일반적인 영화에서 잘 만나보지 못하는 왜곡 이미지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가여운 것들>에서 활용한 렌즈 왜곡 표현은 등장인물 갓윈이 만든 기괴한 세계를 직접적으로 설명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렌즈의 물리적 왜곡은 다르다. 보이지만 잘 드러나지 않는 왜곡이다. 넓은 센서 사이즈의 풀프레임과 광각렌즈의 왜곡이 만났을 때 왜곡 같지 않은 왜곡이 만들어진다. 이 영화를 이상한 낯섦으로 안내하는 데 일조하는 것도 풀프레임 센서와 광각렌즈의 조합이다. 카메라와 인물들 사이가 멀어 인물들은 왜곡 없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고정된 실내 공간의 사물들은 원근 왜곡을 갖고 있다. 깊은 심도의 풀숏과 넓은 화각에 날카롭고 선명한 이미지가 함께 빚어내는 왜곡 아닌 왜곡은 평화로워 보이는 일상의 풍경과 반복되는 의미들을 이질적으로 감각하게 만든다. 이미지뿐만이 아니라 화면 밖 사운드도 선명함을 더한다. 평온한 일상의 집 안으로 담장 너머 수용소의 폭력적인 소리들이 들려온다. 담장 밖 총소리, 수용소로 들어오는 기차 소리, 독일군이 욕하고 윽박지르는 소리, 감시견들이 짖는 소리와 수용소 유대인들의 비명이 타운하우스 안의 평화롭고 행복한 집 안 풍경과 극단적 대비를 이룬다. 이미지의 선명함 위로 사운드의 선명함이 얹히며 소리들이 이미지로 다가온다. 롱테이크로 길게 관조하는 카메라와 넓은 화각, 카메라의 거리감, 깊은 심도와 외화면의 사운드는 인류가 절대 잊어선 안될 역사를 화면 안에 선명히 각인시킨다. 이렇게 구축된 이미지의 선명함은 관객들의 감각을 불편함으로 이끌며 우리의 무감함을 일깨우며 역사를 소환한다.

오히려 무감한 사유에 일조하게 만든다

이 영화의 심도와 달리 우리 눈으로 주변을 바라볼 때 세상은 모든 것에 포커스가 선명하게 맞진 않는다. 왜곡 같지 않은 왜곡도 없다. 이 영화가 주는 선명한 이미지는 고통스런 역사적 사실과 함께 이상한 불편함을 더한다.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에서 롱테이크로 관조하는 카메라는 역사와 거리를 두고 역사에 대한 판단을 영화 안에서 스스로 하지 않도록 미룬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비정성시>의 카메라 거리감과 같은 방식을 취하지만 결과는 다르다. 매 컷들은 보고 싶지 않아도 선명한 포커스와 함께 모든 이미지들을 다 받아들이라고 관객들에게 강요한다. 선명함이 주는 불편함으로 카메라는 역사에 거리를 두는 척하지만 역사의 판단에 직접 개입하고 시선을 고정시킨다. 왜곡 없는 왜곡으로 낯선 감각을 깨우지만 오히려 무감한 사유에 일조하게 만든다. 지나치게 선명한 이미지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고정되어 있고, 선명하게 보이는 모든 것들에 가려진 진실이 소각되고 있다. 수용소 담장 안의 삶도, 담장 밖의 죽음도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는 담장 안과 밖의 소속이 정해져 있다. 가장 미학적인 표현으로 홀로코스트를 유대계 영화 자본의 상품 이미지로 전락시키고 유대인들의 고통을 또다시 소비하고 있다. 롱테이크, 깊은 심도, 선명한 화질, 카메라의 거리 두기를 통해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다 보라고 하며 하나의 의미로 고정시킨다. 정작 다른 것은 보지 못하게 한다. 나치의 폭력 외에 다른 것은 보지 못하게 하는 선명함은 과거 역사는 물론 현재 담장 너머의 또 다른 폭력과 고통을 지운다. 오늘도 가자지구에서는 우리가 모르는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참혹한 현장을 실시간으로 접하면서도 우리의 일상은 무감하게 흘러가고 있다. 진짜 불편함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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