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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혼란 앞에 정직해지기 위해 쓴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소설가 김기태
김소미 사진 오계옥 2024-07-19

김기태는 확실히 ‘보편 교양’의 작가다. 동시대의 세태를 정확하고도 풍부하게 조망하는 김기태의 소설은 지금 우리의 생활 반경을 거침없이 휘젓는다. 연애 예능 출연자의 욕망(<롤링 선더 러브>)과 K팝 팬의 딜레마(<세상 모든 바다>), 고등학교 교사의 곤경(<보편 교양>)과 성실한 직장인의 불안(<전조등>)을 가로지르는 동안 일상의 표면은 유행가 가사와 밈을 달고 한껏 경쾌해지거나 덜컥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자기 생의 무게를 감당한다는 것에 대해 배우는 역도 소녀(<무겁고 높은>)와 다리가 세개뿐인 식탁을 펼친 채 기뻐하는 곤궁한 변두리의 연인(<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도 이 세계에 함께 산다. 어울리지 않는 이들이 “뒤죽박죽, 와글와글, 결국은 한데 존재한다”는 것이 9편의 단편소설을 모은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 안기는 ‘인터내셔널한’ 감각이다. 그들 각자가 생의 어느 국면에 서 있든 간에 “좋거나 싫거나 삶은 끈질기게 이어진다는 가능성”을 믿는 작가는 언제나 시간의 지속을 담보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끝맺는다.

문단에 등장한 늦깎이 작가의 생활은 “퇴근하고 저녁 먹고 살림 좀 하고 나면 저녁 8시. 그때부터 자정 정도까지 작업하면서” 굴러왔다. 습작 생활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무겁고 높은>)되어, “안 써도 죽지는 않을 테니 대신 자유롭게 쓰자”고 “삶의 보너스 게임”을 받아들인 그다. 2024 젊은작가상을 수상하고 첫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로 문단의 주목받는 신인으로 떠오른 김기태를 만났다.

- 작가 소개가 유독 단출하고 작가의 말을 넣지 않았다. 이유가 있을까.

= 작가에 대해 모를수록 좋다는 입장이다. 내 소설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있다. 책 뒤편의 작가를 끄집어내서 자꾸만 말을 시키는 풍조에 조금 동의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그래놓고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게 모순이긴 하지만. (웃음) 매체에 나서는 일에 대한 주의, 주장이 서기 전에 어떤 흐름에 올라타버려서 괴로운 요즘이다. 작가의 말을 넣지 않은 이유는 소설집에는 소설만 있는 게 가장 자연스럽다는 생각에서였다.

- 표제작을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로 정한 것은 작가의 뜻인가.

= 진작 그렇게 생각했고 편집부에서도 같은 의견을 주셨다. 등단 후 단편을 6편 정도 썼을 때부터 이 소설들을 한데 묶었을 때 어떤 모양이 될 것인지 느슨히 구상해보기 시작했는데, ‘인터내셔널’이라는 단어가 주는 기운이 다른 소설에도 구석구석 미치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뒤죽박죽, 바글바글하고 있는 풍경이 연상됐으면 한다. 국제공항의 출입국장처럼.

- <무겁고 높은>은 작가 자신의 역도 경험으로부터 촉발했고, <롤링 선더 러브>에 관해서는 실제로 연애 예능 <나는 솔로>를 즐겨 보았다고 밝힌 바 있는데.

= <무겁고 높은>은 본격 역도 홍보 소설, 역도에 바치는 소설을 써야겠다 마음먹고 그 행위에 대해 오랫동안 쌓아왔던 감정을 담았다. 지금도 간혹 역도를 한다. <나는 SOLO>를 즐겁게 본 것도 맞다. 프로그램 출연자들을 지켜보다가 가끔씩 “저 사람 방금 뭔가 진짜를 보여준 것 같은데”라는 느낌을 받을 때 애청자로서 응답하고 싶었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통속적인 환경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표정들을 잡아내는 제작 환경이 흥미로웠고 내가 잘 모르는 인간형에 대한 탐구심을 충족시켜주기도 했다. 나한테 <나는 SOLO>는 여타 예능 방송보다는 오히려 소설을 읽을 때의 마음과 겹치는 프로그램이었다.

- 우리 시대의 대중문화, 보편의 세태를 생생하게 반영한 점에 독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현실과의 시차가 짧은 소설을 쓸 때 작가로서 문학적 수명을 고민하게 되지는 않나.

= 소설을 발표하고서 많이 듣는 질문이 “아이돌 좋아하시나봐요”다. 갸우뚱하다. 그저 내가 처한 세계에서 매일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에 대해 소설에 일정 부분을 허락했을 뿐이다. 우리는 아이돌 프로듀서의 기자회견을 메인 언론이 생중계하는 그런 세상에 산다. 이 모든 것이 이미 우리의 자연이다. 오늘 하루도 거리를 걸으면서 수많은 광고판을 지나쳤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문학의 소재가 되길 바란다. 나무에 떨어지는 햇살은 문학적이고 광고판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소재의 침입을 허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좀더 적극적으로 초대하는 입장이라고는 할 수 있겠다. 물론 더 문학적으로 보일 법한 소설을 쓰고 싶다는 바람도 있는데, 그런 생각 자체가 스스로 정직하지 않다고 느낀다. 나를 감각적으로나 현혹시키는 것들은 그런 게 아닌데 하고 자꾸만 나의 정직함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 통속적인 소재를 쓰는 것과 그 표현법을 그대로 차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도 하다. 밈이 문장이 되고, <롤링 선더 러브>엔 무려 11개의 대중가요가 인용, 변형되어 쓰였다.

= 고다르를 인용하는 건 자연스럽고 대중가요를 인용하는 건 문학적이지 않은 걸까?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세계로부터 탈주하거나 외면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나는 여기 있는 것을 직면한 상태로 새로운 감각을 얻고 싶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걸 없다고 하면 안되지 않을까, 그걸로도 소설을 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문장이 유머러스하다는 반응에 대해서도 내가 웃긴 게 아니라 세상이 이미 웃긴 쪽에 가깝다고 설명하고 싶다. 나는 그 웃긴 세상을 받아 적었을 뿐이다.

- 세태를 묘사하는 직관적인 문장을 보면 저널리스트의 성질을 지녔다고도 할 수 있겠다.

= 대학에서 언론학을 전공했다. 그렇다고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20대 초반에 내가 경험한 풍토가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친 건 아닐지 생각해본다.

- 세계를 인식하는 자신의 감각에 정직해진다는 것. 소설가로서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가.

= 그러니까 이상하게, 자꾸만 정직이라는 단어를 쓰게 된다. 특히 소설에 관해서는. 일상생활 중에는 충분한 숙고 끝에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우리의 최선은 대다수의 경우 어떻게 보면 맥락의 자연스러운 주거니 받거니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일상의 대화 국면에서는 내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정직하게 말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하지만 소설은 다르다. 내가 고려하고 싶은 이것과 저것, 빼먹고 싶지 않은 것,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 데 드는 충분한 시간, 백지라는 거의 무한정한 세계 안에서 원하는 대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니 소설을 쓰면서 나는 조금 더 정직해지는 해방감을 느끼는 것도 같다.

- 소설집의 첫 순서인 <세상 모든 바다>는 공연장에서 일어난 압사 사고에 연루된 재일 한국인 하쿠의 이야기다. 소수자 정체성, K팝, 불안정한 국제 정세와 테러, 지역 원전 문제 등 당대의 민감한 사회적 표피들을 담고 있는데, 특히 지금 읽게 되면 10·29 이태원 참사의 풍경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 개별 사안에 심층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사회문제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뒤죽박죽의 상태를 그려보고 싶었다. 기후 위기와 하마스-이스라엘 전쟁, 트럼프와 바이든의 대선전이 몇초도 안되는 사이에 뉴스에서 연달아 브리핑되고, 이어 비건 대체식 광고가 나오는 그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각자 윤리적인 선택을 내려야 한다. 나는 그 혼란을 쓰고 싶었다. 한 가지 바로잡고 싶은 것은 이 소설이 이태원 참사 이전에 쓰였고 발표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정말 많은 독자들이 <세상 모든 바다>를 읽고 이태원 참사를 떠올린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소설 밖에서 어떤 맥락이 사후적으로 부여된 셈인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작가의 몫이라 생각한다. 이번 소설집에서 이 소설만 유일한 1인칭 시점 소설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래서 첫 순서로 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 취업과 결혼이란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는 어느 평범한 남자의 불안을 따라가는 <전조등>, 밤새 강박적으로 문단속을 하다가 미쳐가는 남자의 심리소설 <팍스 아토미카>는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의 원형이자 뿌리 같기도 하다. 정상성과 무난함을 간신히 획득한 주체들이 일상에서 덜컥 마주하는 기묘한 이격의 순간들을 바라본다.

= 한국문학의 많은 인물들이 살면서 무난히 수행해야 할 과제들을 수행하지 못해서 문제가 된다. 취업을 제때 못한다든지 가족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다든지 사랑하는 사람을 찾지 못하고 결혼이 늦어진다든지. 나는 잠시 반대로 바라보고 싶었다. 어쩌다 그런 것들을 성공적으로 다 수행해버린 사람은 어떤 꼴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불안과 자기기만의 감각 같은 것에 시달린다면…. 한편으로는 그렇게 생애 과제를 성실히 수행한 사람들을 향한 변호이기도 하다. ‘저 사람은 진짜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 거야,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너무 잘 따라온 삶일 뿐이야’ 하는 식의 의심의 눈초리가 있지 않나. 나는 이런 사람도 그저 자기 앞의 삶을 잘 살고 있을 뿐이라는 마음을 보탰다. 그러니까 분열적인 소설이라고 해도 좋겠다. 나로서는 내 인물을 최대치로 의심해가면서, 그러니까 가능한 한 샅샅이 들여다본 다음에 응원해주고 싶다.

- 마지막 소설 <팍스 아토미카>는 열린 활주로에서 끝난다. 소설집의 전체적인 배열에 의도한 바가 있나.

= 내가 편집부에 제시한 의견은 두 가지였다. 소설집의 시작은 <세상 모든 바다>이고 끝은 <팍스 아토미카>일 것. 그리고 세 작품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보편 교양> <로나, 우리의 별>이 순서대로 붙어 있을 것. 특히 <팍스 아토미카>는 꼭 마지막 순서가 되었으면 했다. 작품들이 쌓여 소설집을 준비하게 된 어느 시점에 내가 그동안 쓴 이야기들의 마지막이될 작품을 구상하고 쓴 것이 <팍스 아토미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소설은 무조건 활주로에서 끝나야 한다는 생각만은 쓰기 전부터 갖고 있었다. 크고 작은 온갖 문제들, 통속의 일들로부터 인물들이 제 갈 길을 가도록, 그리고 독자들도 책을 덮은 뒤 자기 인생으로 나아가고 싶도록 개방적인 느낌으로 놓아주고 싶었다. 그리고 <팍스 아토미카>는 빠르게 많은 작품을 토해내고 지친 상태에서 나 자신을 위해 소설을 하나 쓰고 싶었다. 조직하지 말고 직관적으로 따라가자는 마음이었다.

- 김기태의 소설은 한자리에 머물러 집요하게 서술하기보다는 흘러가는 생애를, 이어지는 지속의 상황을, 열린 국면을 스케치한다. 서사의 방법론에 있어 선호하는 방향이 있나.

= 그게 지금까지의 주요한 방법이었던 건 맞다. 하지만 방법론이기 이전에 체질적으로 선택된 것이라 느낀다. 어떤 종류의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에 접근할 때 내게는 아주 가까이 들어가는 방법보다 떨어져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한 장면에 너무 오래 머물러서 묘사를 하는 것보다 어느 정도 시간을 흘러가게 만드는 것이 쓰는 사람으로서 더 즐겁기도 하다. 짧은 이야기를 쓸 때 어느 정도 시간과 공간적 스케일을 확보해 3인칭으로 바라보는 것. 언제까지고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만 일단은 계속 가져가보고 싶은 방법이다. 시간만큼은 우리 중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이 체감하는 분명한 것 중 하나이니까.

“속을 보이면 어째서 가난함과 평안함이 함께 올까”(<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74쪽, <롤링 선더 러브> 중)

글쓰기에 몰입하기 직전에 내가 하는 일

“집중이 필요한 일을 하기 전에 샤워를 한다. 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물로 씻어내고 좀더 깨끗하고 편한 옷을 입고 나면 기력이 좀 돌아온다고 해야 할까. 물을 적셔줘야 정신이 깨어나곤 한다. 아무래도 수용성 인간인가보다.”

나의 첫 번째 소설, 마지막(최근의) 소설

“어릴 때 집에 있는 60권짜리 양장본 문학전집 중 유독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좋아했다. 처음 읽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하이디가 도시에서 밤이 되면 알프스를 그리워할 때마다 이상하게 슬펐다. 왜 도시로 와야 했을까, 왜 여기에 있어야 할까, 그런 감정을 더듬었던 것이 강렬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 가장 최근에 읽은 소설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다. 준비하고 있는 장편소설을 위한 일종의 자료 조사 차원에서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