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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사랑과 슬픔이 주는 복, <이응 이응>으로 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한 김멜라 작가
조현나 사진 백종헌 2024-07-19

작가의 필명인 ‘멜라’는 ‘멜르다, 멜라지다’라는 ‘찌그러지다’, ‘찌그러뜨리다’라는 제주도 방언에서 따온 것이다. “내가 스킨십을 너무 좋아하다보니 애인으로부터 ‘멜르지 마!’라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 (웃음) 내겐 멜를 사람이 있다. 그러니 소설을 쓰든 쓰지 않든 나는 항상 행복할 거다, 라는 마음으로 필명을 지었다.” 그의 필명은 집필 기간 동안 이어져온 사랑과 몸에 관한 탐색과도 긴밀히 연결된다. 2014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수상해 등단한 이후 김멜라 작가는 소설집 <적어도 두 번> <제 꿈 꾸세요>를 펴냈고, 2021년부터 출판사 문학동네의 젊은작가상을 4년 연속 수상했다. 올해로 데뷔 10년차를 맞이한 그는 글로 느낀 것보다 여유로운 태도로 소설과 삶, 세계를 아우르고 있었다. 10대 인물의 모험기부터 60대에 자신이 쓰고 싶은 글에 관해 들려주는 김멜라 작가의 말을 들으며 덩달아 시야가 트이는 듯했다.

- 2021년부터 한해도 빼놓지 않고 젊은작가상 수상자에 이름을 올렸다. 이 결과가 본인에겐 어떤 의미인가.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하는지.

=그런 측면도 있다. 하지만 동시대 한국 단편들과 엮여 독자를 만나는 시스템 안에서 소설을 발표할 수 있기에 감사한 마음이 크다. 등단한 지 10년이 넘어 이제 내겐 더이상 기회가 없지만, 앞으로도 많은 신진 작가들에게 이 자리가 주어지길 바란다.

- 신작 단편 <이응 이응>은 성욕을 해소할 수 있는 기계 사용이 보편화된 세계를 배경으로 성과 사랑, 인간관계에 관해 다각도로 탐구한다. 소설의 아이디어는 애인과의 포옹에서 얻었다고.

=그렇다. 연인과의 스킨십을 정말 좋아해서 이 감정, 감각을 잘 표현하고 싶었다. 한편으론 이러한 스킨십이 성적 접촉과는 어떻게 다른가에 관해서도 짚어보고 싶었다. 성폭력에 관한 기사들이 하루에도 수십건씩 올라오지 않나. 이런 성욕을 식욕, 수면욕처럼 해소할 수는 없을까, 그런 기술이 개발돼 모두가 이용할 수 있다면 그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그런 기계가 발명돼 감각의 장벽, 편견을 허물고 자기 욕구를 디자인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어떤 것을 느끼고 싶어 할까. 이게 내가 던지고 싶은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나의 경우는 내가 누군가를 안고, 누군가가 나를 안아줄 때의 감각을 가장 느끼고 싶었다. 소설에 나온 것처럼 사랑하는 강아지를 쓰다듬고 할머니의 손과 목소리를 감각하는 스킨십도 포함한다.

- 소설을 쓰면서 반드시 지키고자 한 원칙이 있나. 가령 ‘이응’이란 기계에 관해 명확히 설명하지 않고, 또 캐릭터들의 성별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 점들이 눈에 띄었다.

=방금 말한 지점들이 해당한다. 이응이라는 기계를 둘러싼 사람들에 관해 다루긴 하지만 자세히 묘사하진 않는다. 그 밖에 이응이 만들어진 과정이나 그 안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는지도 모호하다. 내가 소설을 쓰는 방식이기도 한데, 나는 어떤 존재나 순간을 명명해 꼴을 갖추기보다 애매모호하게 표현해 독자들에게 고민하는 시간을 안기고 싶었다. 이번에도 이응이라는 기계, 그 기계를 이용하는 시간을 떠올리며 그만큼 충만한 감정을 언제, 어떤 존재를 통해 느끼는지를 각자 디자인해볼 수 있길 바랐다.

- 몸, 신체성에 관한 탐구를 꾸준히 이어온 점이 흥미롭다.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시작됐나.

=돌이켜보면 어릴 때부터 스킨십을 굉장히 좋아했다. 그런데 그 대상이 항상 한정되어 있었고 어릴 땐 그게 엄마였다. 하지만 엄마가 안아주는 건 좋아해도 모르는 사람이 귀엽다며 볼을 만지는 등의 행동은 바로 울 만큼 싫어했다. 원치 않는 접촉에는 방어적이면서도 내가 원하는 접촉은 강하게 갈구하는 양면성이 어릴 때부터 존재했던 거다. 성인이 된 지금으로선 그 격차를 줄이고, 사랑하는 이를 더 잘 만지고 반대로 잘 만져지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런 마음을 글로 풀어내게 되는 것 같다. 만진다는 행위는 실제 살갗이 닿는 것 외에도 많은 것을 내포한다. 보이진 않지만 목소리와 같은 소리의 파동, 빛의 입자도 전부 우리가 접촉하는 것들이다. 이 세계를 하나의 커다란 몸으로 생각하면 추상적인 질문들도 구체적으로 와닿고, 소설을 쓸 때도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 소설에서 사랑에 관해 자주 다루는 것과도 맥락이 이어지는 듯하다.

=타인과 닿는 데엔 애정이 필요하니까. 볼을 만지는 게 누군가에겐 나름의 애정 표현이었지만 어린 시절의 내겐 폭력이었던 것처럼, 만진다는 행위는 자신의 몸과 타인의 몸에 대한 섬세한 배려가 필요하다. 결국 그게 사랑이 아닐까.

- 죽은 존재를 화자로 내세우거나(<제 꿈 꾸세요> <논리>), 먼저 세상을 떠난 이를 대하는 방식에 집중하는 등 죽음 또한 소설 속에서 자주 소환된다. 본인에게 ‘애도’는 어떤 의미인가.

=그동안 애도에 관해 자주 다루면서도 그에 관해 한 문장으로 정의해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애도가 주는 슬픔의 정서에 내가 자꾸 끌리고 그걸 표현하고 싶어 한다는 건 분명하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내 삶에 상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슬픔이 우리를 묶어주는 힘이자 자신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힘이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의 <팔복> 이라는 시에선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이 8번 반복되고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는 아주 슬픈 진술로 끝난다. 내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던 사람이 사라진 후에 느끼는 상실감은 한편으론 그와 나를 깊이 연결해주는 일종의 영혼의 고리로 존재한다. 그래서 나도 슬픔이 주는 복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슬픔을 복이라고 여기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 작품들을 읽으면서 사랑과 애도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신체와 사랑, 죽음, 애도는 별개의 주제지만 김멜라 작가의 작품 세계에선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인상이다.

=사랑에는 늘 슬픔이 있다. 사랑을 잃었을 때 상실이 있고 애도가 뒤따라오는데, 이것 없이 과연 사랑이 사랑다울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슬픔이 주는 복이라는 게 바로 그런 것 같다. 슬픔이 있을 때 우리의 삶이 훨씬 충만해진다. 사실 슬픔을 자주 다루는 데에는 그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는 이유도 있다. 사랑하는 것을 잃는 데 대한 두려움. 상황의 양면성이 주는 충만함을 알면서도 여전히 두려운 거다.

- 지금까지 써온 작품 중에 유독 마음이 가는 인물이 있다면.

=청소년이 될 시기를 앞둔 어린이에 관해 쓸 때 항상 마음에 오래 남는다. 지난해에 <없는 층의 하이쎈스>라는 장편을 썼는데 거기 등장하는 ‘아세로라’라는 친구도 미성년이다. 나도 이제 기성세대에 접어들었는데, 기성세대가 10대를 보호할 목적으로 만든 틀이 한편으론 그들을 억압한다. 그에 갇히지 않고 미성년들이 자기 뜻과 꿈을 활짝 펼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한다. 내가 정말 쓰고 싶은 소설도 미성년이 자기 꿈을 찾아 미지로 모험을 떠나는 내용이다. 설정에 관해서도 자주 구상하는데, 선사시대 중에서도 청동기가 배경이면 좋을 것 같다. 세상이 너무 발전되기 이전의 시기에서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개척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싶다. 이런 판타지를 쓰고 싶다고 첫 소설집을 냈을 때부터 자주 말해왔는데 너무 쓰고 싶어서 오히려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 에세이집인 <멜라지는 마음>을 펴내기도 했다. 소설을 쓸 때와 접근법이 어떻게 달랐나.

=소설이 내가 꿈꾸고 상상하는 밤 시간을 다룬 이야기라면 에세이는 낮 시간의 이야기다. 내가 관계 맺는 사람들, 실생활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것인데 개인적으로는 이 과정이 몇배로 힘들었다. 몸이 아플 정도였다. 애인은 그런 나를 개복치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웃음) 내가 에세이 쓰길 힘들어한다는 건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에세이를 더이상 쓰지 않을 마음은 없다. 자서전과 평전 읽기를 좋아하는데, 그들의 삶이 훌륭하지 않더라도 읽고 나면 그들의 작업을 더 잘 이해하고 입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더라. <멜라지는 마음>을 낸 것도 그래서다. 내가 왜 ‘멜라’라는 필명을 지었는지 그리고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소설 밖에서 한번은 이야기할 자리가 있길 바랐다. 다만 다음 에세이는 낮의 생활을 더 잘 다루고 끌어안을 수 있을 때 쓰고 싶다. 아마도 60대 즈음? (웃음)

- 2014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수상해 등단한 이후 올해로 데뷔 10년차가 됐다. 처음 소설을 쓸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무엇이 가장 많이 달라졌나.

=글의 영향력에 관해 체감한다. 그전까지 소설은 그저 내 글을 쓰는 걸로만 여겼지 누가 이걸 읽고 그에 관해 어떤 생각을 하며 그 생각이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러다 첫 소설집을 낸 뒤 들은 독자들의 피드백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쓴 글이 이런 영향을 줄 수 있구나. 나의 글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고, 예술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크게 깨달았다. 그게 가장 큰 차이다. 데뷔한 지 10년이 됐다고는 하지만 그중 6~7년은 거의 무명 작가였다. 소설가로서 제대로 활동하기 시작한 건 4년 남짓이다. 그래서 신인 작가들이나 소설가가 되기 위해 준비 중인 창작자들이 나를 보며 너무 좌절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공백기가 아니라 자신을 만들어갈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삶과 글을 잘 채워가다 보면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에게 호응해주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 하반기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환희의 책>이 7월 말에 나오고 올해가 끝날 때까지는 주간 문학동네에 연재할 장편 연재분을 쓰게 될 것 같다. 사변이 많아 항상 글이 길어지는데, 이번에는 긴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을 밀고 나가보려 한다. 그래서 너무 길어지고 있긴 하지만. (웃음)

- 그만큼 단편과는 다른, 장편이 가진 힘이 분명 있다.

=맞는 말이다. 장편의 세계 또한 무척 매력적이다. 또 소설가로선 장편 연재가 나의 스토리텔링의 역량을 시험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획이기도 한다. 잘 안돼도 시도해보는 거다. 긴 이야기를 풀어내는 나만의 방법을.

“안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잖아요?”(<이응 이응>, 17쪽)

소설가로서 느끼는 기쁨과 슬픔이 있다면.

“내가 쓴 이야기는 어떤 면에선 나 한 사람의 꿈이자 허황된 스토리일 수 있다. 그런데 그걸 읽고 그에 관해 말하는 독자들이 있다는 건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행운이자 기쁨이다. 반면에 소설가로서의 슬픔, 힘듦도 분명 있는데 이건 근력운동과 비슷하다. 운동을 할 땐 힘들지만 견뎌내면 그 근력이 내 것이 된다. 글도 마찬가지다. 어떤 글을 쓰든 매번 힘든 시기가 온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견뎌낸다면 그 시간이 쌓여 나를 좋은 곳으로 이끌어주는 길이 된다. 축적된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기에 소설가로서 겪는 힘든 순간도 버틸 수 있다.”

글 외에 내게 영감을 주는 존재는.

“첫째로 애인이다. 내 삶의 여러 지향점이 그 친구와 같이 바라보는 것이고, 우리의 삶과 관계가 하나의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공통된 생각이 있어 애인의 이야기를 많이 쓰는 편이다. 다만 사적인 이야기다 보니 글을 발표하기 전에 먼저 보여준 뒤 조율의 시간을 가진다. 또 하나는 자연이다. 나무와 새, 곤충과 같은 자연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면서 느끼는 해방감, 상쾌함이 있다. 자연을 알아갈수록, 자연의 시선으로 바라볼수록 나를 억압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느낀다. 7월 말에 <환희의 책>이라는 경장편 소설이 나오는데 톡토기, 모기, 거미, 그 밖의 다지류 관찰자들이 화자가 돼 인간에 관해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20~30대에 소설이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면 요즘엔 자연이 그런 존재가 되어 그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고 자연과 함께 내 삶의 레이어가 더 풍성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