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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하의 타인의 우주] 뭉크와 나

대학교 1학년 가을 어느 날, 아빠가 급하게 날 깨웠다. 얼른 나와보라며 재촉을 했다. 비몽사몽 거실에 나갔더니,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생명체가 꼬물거리고 있었다. 너무 작아서 인지하기까지 몇초가 걸렸다. 뭉크. 나의 반려견. 다리가 짧아, 힘겹게 한발 한발 내디디며 나에게 다가왔던 뭉크는, 얼른 온기가 필요한 듯 내 품에 자리를 잡고 쉽게 떠나질 않았다. 그렇게 뭉크는 2014년 우리 집에 선물처럼 나타났다.

꼬물이 시절과 사뭇 다르게 현재 약 30kg 나가는 뭉크는, 움직이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어디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으면 존재감이 상당하다. 어디에선가 에너지가 느껴져서 돌아보면 뭉크가 있다. 보통의 강아지 같은 경우, 간식을 꺼내면 바람같이 달려오지만 뭉크는 본인이 있던 자리에서 침을 흘리며 간식을 한번 쳐다보고, 날 한번 쳐다본다. 굳은 인내심으로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면 결국 나는 이기지 못해 뭉크에게 간식을 대령해준다. 뭉크는, 그렇게 가만히 있어도 본인에게 오게끔 하는 마성의 매력이 있다.

다소 무뚝뚝한 뭉크의 애정 표현 방식은 간단하다. 옆에 있어주기.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극내향견이지만 가끔 내 옆에 와서 엉덩이를 들이밀거나, 이마로 나를 툭툭 친다. 뭉크가 먼저 다가와주는 일은 흔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그녀가 꼭 다가올 때는, 내가 울고 있거나 아플 때다. 무엇이 그리 속상한지 이유도 잊은 채 정신없이 울분과 울음을 꺽꺽거리며 토해내던 날이었다. 나조차도 나를 돌주지 못하는 순간, 뭉크는 거실에서부터 느릿느릿 걸어와서 내 방문을 두드렸다. 믿기지 않겠지만, 혹은 내가 너무 정신없이 울부짖느라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있겠지만, 뭉크가 노크를 하는 것 같았다. 문을 열어주었고, 뭉크는 그저 조용히 내 옆에 앉았다. 그래도 내 울음이 멈추지 않자, 깊은 한숨을 쉬며 그 자리에 엎드려서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릴 뿐이었다. 남김없이, 후회 없이 다 쏟아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서러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고, 내가 옆에 있으니 아무 걱정 말라고, 눈치 보지 말라고. 괜찮지 않아도 괜찮고, 잔뜩 찌푸려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20분 정도 지났을까, 어느샌가 나는 뭉크를 쓰다듬고 있었고, 그녀의 두텁고 부드러운 털은 나를 안정시켜주고 있었다. 뭉크는 그날 하루 내 옆을 떠나질 않았다.

앞서 말한 뭉크의 무게(30kg)는 아마 귀여움의 무게일 것 이다. 막내로 자란 터라 동생이 있는 친구들을 동경해왔다. 그런 와중에 뭉크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동생으로 찾아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 귀여운, 그리고 예상 불가능한 그녀의 행동들. 뭉크와 10년을 살았지만 아직도 화가 나는 포인트를 잘 모르겠다. 대부분 질투가 나는 상황인 것 같은데, 가령 내가 엄마, 아빠에게 안겨 있거나(뭉크가 가장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은 우리 엄마다), 다른 강아지들을 예뻐할 때, 갑자기 짖거나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이마로 날 밀친다. 그러나 그것도 날마다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싸우기도 참 많이 싸우는데, 결국 뭉크의 귀여움에 패배하는 것은 나다. 사랑스러움은 타고난 것이라고 종종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그것이 주는 어마어마한 기운. 힘을 내서 웃을 수 있는 기원. 이는 어떠한 말로도 형용을 못한다.

낭만에 대해서 생각하는 요즘이다. 낭만이라는 이 두 음절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힘이 넓기도 하고 강렬하기 때문에, 이 단어는 굉장히 ‘크다’고 느낀다. 그래서 나의 낭만은 뭘까. ‘위로’ 인 것 같다. 쉼 없이 뛰고, 곤두박질도 치고, 박자에 맞지 않는 춤도 추며 마지막에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면서 뒤를 돌아봤을 때, 손끝에 스쳤던 풀들, 발에 걸렸던 멋진 돌들, 귓가를 스쳤던 악보 같던 바람들이 기억에 남아, 지금껏 내가 지나왔던 길들이 형편없지만은 않았다고 위로해주는 것. 그래서 결국엔 사랑할 줄 아는 것이 나에겐 낭만인 것 같다고 오랜 고민 끝에 내린 희미한 결론이다. 그래서 뭉크는 나에게 낭만이다. 강렬하지만 부동의 위로. 뭉크에게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사람에게서는 느끼지 못하는 육감적인 사랑과 계속 추리하게 되는 언어가 없기에 가능한 물음표들. 뭉크에게 받은 위로를 나의 방식대로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다. 연기를 하는 것도 그 방식 중 하나다. 어느 순간 단지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나를 보는 그 누군가에게 위로를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꾹꾹 눌러담은 나의 진심을 어떠한 장치와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전하고 싶었다. 여기 항상 있을 것이라고, 그러니 혼자가 아니라고. 언제든 다시 나의 연기를 봤을 때, 어떠한 형태이던 위로를 받았으면 했다. 몇년 전, 울부짖었던 내 옆을 지켜주었던 뭉크처럼, 교감만이 가득했던 그때 나의 방처럼, 나 자체도, 그리고 나의 연기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길 희망한다.

뭉크야, 지금 당장 널 사랑한다고 달려가서 말할래. 내일 너가 없으면 어떻게 하니, 내일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니. 내일이 아니더라도, 10분 후, 16분 후에도. 그런 가정을 한다는 것이 피곤한 일이겠지만, 워낙 기괴한 것이 세상 아니겠니. 2020년 6월3일 일기다. 사랑하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고통으로 변하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실제로 달려가서 사랑한다고 외치고 나서는 또다시 온전한 사랑의 마음으로 평화를 되찾았다. 그렇게 뭉크는 참 여러모로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다. 3일 후 뭉크의 10번째 생일을 맞이한다. 새삼 그녀가 축복으로 찾아온 그날이 벅차게 와닿기도 한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는 뭉크에게 언제나처럼 달려가서 안아줄 것이다. 변함없는 사랑에 관하여 또 느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