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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좋아하는 것에 미쳐 있는 시간이 우릴 구원할 거야,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선호빈, 나바루 감독
조현나 사진 최성열 2024-07-30

FC안양과 서포터스 ‘RED’가 뜨겁게 타오르는 순간엔 언제나 이들이 있었다. 다큐멘터리 <B급 며느리>의 연출자였던 선호빈 감독과 같은 작품의 촬영감독이었던 나바루 감독은 RED의 트레이드마크인 홍염 영상을 보고 서포터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시선을 끌다 못해 두렵다 여길 정도로 강렬한 RED의 행보는 한국 축구와 축구 서포터스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스포츠와 문화, 개인의 관계를 긴밀하게 엮어낸 선호빈, 나바루 감독을 만났다.

- 스포츠를 원래 좋아했나.

선호빈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둘 다 야구를 좋아하는데 그렇다고 야구도 대단히 깊이 좋아한 건 아니었다. 스포츠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나바루 나도 부모님을 따라 야구를 보곤 했다. 축구의 경우 직접 몸으로 하는 건 좋아하지만 경기를 보는 데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영화에 나온 것처럼 실제로 2019년에 안양 취재를 다니다 ‘왜 이렇게 시끄럽지? 경기 하나?’ 싶어 우연히 축구를 보게 됐다. 원정석에 앉았는데 당시 개막전 때라 사람들이 1만명 가까이 왔다. 상대편 좌석이 온통 보라색 유니폼으로 가득했다. 그 포도알 같은 사람들이 경기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에 내 세포도 반응하더라. 에너지가 대단했다. 그러다 소개를 받아 RED를 창단한 최지은씨를 만났는데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정말 재밌었다. 1990년대에는 경기 끝나면 무조건 패싸움을 했는데 져본 적이 없다는 거다. <야인시대>에서 시라소니와 김두한이 싸우는 모습이 연상될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이들은 2017년 FA컵 때 서울월드컵경기장을 홍염으로 불바다처럼 만든 장본인들이기도 했으니.

- 두 감독은 <B급 며느리>에서 연출과 촬영감독으로 이미 합을 맞추었다.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이하 <수카바티>)을 공동 연출한 배경은.

나바루 <B급 며느리> 이후로 선호빈 감독과 자주 만났고, 그때마다 있었던 일을 종종 털어놨다. 그중 하나가 FC안양 서포터스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느 날, 아까 말한 2017년 FC안양과 FC서울 경기 때의 홍염 영상을 보여줬는데 반응이 좋았다.

선호빈 내가 그랬다. “이건 장편이다.” 한국에도 이런 게 있나 싶을 정도로 너무 멋있었다. 처음엔 시리즈로 기획했었는데 결과적으로 장편 작업을 하게 됐다.

- 서포터스와 구단 모두 촬영에 협조적이었나.

선호빈 그렇다. 나바루 감독이 상대에게 잘 다가간 덕이다. 다른 촬영팀과 다르게 카메라를 들고 가는 대신 친해지는 것부터 시작했다.

나바루 겉모습이 이래서 뭘 무서워할 것처럼 안 보이겠지만, 막상 경기장에 가면 떨렸다. 한 20발짝 뒤에서 촬영하곤 했다. 항상 다들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애들도 화가 나 있었다. 그래서 결국 서포터스 홈페이지에 우리가 어떤 영화를 만들려 계획 중인지, 왜 이 취재를 하고 싶은지에 관해 장문의 글을 올렸다. 그 글을 좋게 봐주신 것 같더라. 나중에는 ‘우리가 돈 모아서 나바루, 선호빈 도와주자’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가까워졌다. (웃음)

선호빈 서포터들은 조금 경계심이 있었지만 나바루 감독이 잘 접근했고 구단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K리그 구단들은 미디어를 원한다. 이들과도 갈수록 가까워져서 우리가 들어가지 못하는 곳도 촬영해달라고 구단 직원한테 카메라를 전달했다. 중요한 경기는 구단 소속 피치캠의 영상을 요청하기도 했다.

나바루 지난해 즈음 친해진 구단 직원이 술자리에서 넌지시 말씀하셨다. 솔직히 영화가 나오긴 나오는 건가 싶었다고.

선호빈 방송국의 다큐멘터리는 한두달 정도 촬영하면 나오는데 우린 몇년이 소요됐으니까 믿음이 가지 않았을 법도 하다.

나바루 불만을 가진 분들이 계셨지만 그래도 영화가 나온 뒤엔 내 손을 붙잡고 “잘 봤습니다”라고 해주셨다.

- 영화의 전체적인 틀은 언제 잡혔나. 한국 축구의 역사, 한국 서포터스의 역사 등 수많은 내용이 들어가 정리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선호빈 기본적인 구성은 빨리 나왔다. 서포터들의 역사를 시간순으로 풀어내되 중간중간 다른 이야기를 붙이는 식으로 가자는 게 초반의 계획이었다.

나바루 작업하면서 바뀐 부분도 많다. 어디선가 보물 같은 영상들이 계속 발견됐다. 1차 편집본을 완성하면 갑자기 어떤 서포터의 하드디스크에서 중요한 자료가 튀어나오는 식이었다. 예를 들면 안양을 연고지로 하는 프로축구단 창단 가결 영상 있지 않나. 그 영상이 제일 늦게 발견됐다.

선호빈 그걸 받아보고 웃다 울었다. 다시 편집할 생각만 해도 힘들었지만 영상이 너무 좋았으니까. (웃음) 당시에는 휴대폰도 없고 CCTV도 많지 않아서 아까 말한 패싸움 상황 같은 게 기록된 자료가 많지 않았다. 그래도 다큐멘터리에서 과거를 재구성하는 건 연출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최대 전장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평범하게 사진 넣고, 인터뷰에 자막 까는 식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다르게 가보려는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

- 촬영은 정확히 언제부터 언제까지 진행했나.

선호빈 2019년 5월부터 촬영해 4년가량 촬영과 편집을 병행했다. 사실 촬영 종료 시점이 우리도 명확하게 인지되진 않는다. 지금도 RED나 FC안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찍으러 가곤 하니까.

나바루 가편집본이 잘 나와도 FC안양의 성적이 잘 나오면 다시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선호빈 2부 리그에 있는 FC안양이 1부 리그로 승격되면 가편집본을 뒤집고 팀 승격 스토리까지 반드시 넣어야 하니까, 그런 식으로 상황을 보며 몇 차례 최종 편집을 미룬 경우가 있었다.

- 그럼 어느 시점에서 이제는 완성본을 낼 때라는 결심이 서던가.

선호빈 아까 말한 가결 영상 자료를 받았을 때다. 마지막 퍼즐이 거기서 맞춰졌다고 느꼈다.

나바루 그래도 자료가 뒤늦게 나온 덕분에 다른 여러 구성에 관해 심도 있게 고민해볼 여지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 영화에는 코로나19 팬데믹 시절의 모습도 담겨 있다. 경기장에 서포터스가 없으니 찍을 대상이 없어 막막했을 것 같은데.

나바루 처음엔 큰일이다 싶었다. 작품의 주인공이 갑자기 없어진 셈이니까. 팬들의 부재를 연출해볼 기회이기도 했지만 사실 텅 빈 경기장을 촬영하는 게 나로선 쉽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그만두려던 차에 <수카바티> 작업에 들어갔다. 열정 넘치는 서포터들을 촬영하면서 나 역시 에너지를 되찾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 무관중 경기를 계속 마주하려니 기운이 빠졌다. 한번은 너무 힘들어서 경기 전반전만 찍고 나간 적도 있다.

선호빈 며칠 전에 축구 전문 기자와 인터뷰했는데 그분도 관객이 없는 축구장을 마주하는 게 힘들었다더라. 관계자 중에선 나바루 감독과 비슷한 감상을 느낀 분들이 더러 계셨다고 한다.

나바루 관중들이 주는 힘이 확실히 대단하다. FC안양은 순위가 중하위권에 머무를 때도 홈경기 승률이 굉장히 좋았다. 상대팀을 기죽이는 RED의 무서운 형님들의 기운 같은 게 있었거든. 그런데 무관중 경기 때는 신기하게도 개막 이래 8월까지 FC안양이 홈구장에서 1승도 거두질 못했다. 보면서도 신기했다.

-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마주하는 것이 다큐멘터리 촬영의 재미이기도 할 것이다.

선호빈 맞다. 다큐멘터리 작업은 고고학자처럼 과거를 발굴해내는 재미가 있다. K리그의 PC통신, 붉은 악마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내고 당시 상황을 들려줄 수 있는 인터뷰이를 만나는 일련의 과정이 정말 재밌었다.

- 전 FC안양 감독부터 기자, 평론가, 은퇴한 선수, 다른 구단의 서포터들까지 섭외 리스트가 다양하다.

선호빈 섭외는 사실 난관이었다. 팬데믹의 영향도 있었고, 또 우리가 다루는 이야기가 축구계에서 터부시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보니 여기저기서 거절을 많이 당했다. 공식 루트로 성공한 섭외 사례는 없고 전부 지인들을 통해 연결했다고 봐야 할 정도다. 오히려 외부 평가나 시설을 상관하지 않는 분들이 조금 거칠더라도 진심이 담긴 말들을 많이 들려주셨다. 결국 그게 <수카바티>라는 영화의 톤 앤드 매너를 형성하는 데에도 영향을 준 것 같아 마음에 든다.

- 촬영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

나바루 다큐멘터리를 찍다 보면 축구 경기를 못 본다. 선호빈 감독에게 “형, 우리가 이겼어!” 하면 “우리가 이겼어?”라는 반문이 돌아온 적도 있다. 우리는 계속 서포터스를 찍어야 하니 경기장을 등져야 하고 그래서 골이 들어가도, 경기에서 이겨도 상황 파악이 잘되질 않는 거다. 그래도 보다보면 벅차오르는 때도 있었다. 안산전 장면 중에서 내가 작게 나온 신이 있다. 그다음에 보면 (손을 흔들며) 이런 식으로 흔들려 찍힌 서포터스 영상이 뒤따라 나온다. 일부러 그렇게 찍은 게 아니라 골이 들어가서 같이 좋아하다보니 그렇게 찍힌 거다. 그런 생동감 있는 영상이 찍혔을 때의 쾌감 같은 것들이 있었다.

- 서포터스 개개인의 캐릭터를 잡아가는 방식도 독특하다. 가령 최지은씨가 과거에 그린 만화를 보여주는 장면은 극의 큰 흐름을 고려할 때 편집해도 무리가 없는 장면이다.

선호빈 이 다큐멘터리는 대상의 정서에 빠져들지 않으면 재미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정서에 빠져들게 하려면 사람 자체에 주목해야 했다. 최지은씨가 젊은 시절에 가졌던 열정, 취향, 꿈을 대하는 태도는 그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최지은씨의 집에 들렀을 때 그 방에 걸린 앨범 재킷이나 영화 포스터 등에는 당대 문화적 코드, 그리고 최지은이라는 사람의 세계가 잘 드러났다. 정리하면 이 영화는 무언가에 미쳤던 사람들의 사랑과 열정을 잘 전달하는 것이 의도이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라도 그 장면은 꼭 필요했다. 사실 나는 그렇게 무언가에 미친 오타쿠들에 대한 헌사가 있다. 뭐 하나에 완전히 빠진 사람들이 너무 멋있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 감정을 관객에게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나바루 한국에선 오타쿠를 괄시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나도 그렇고 선호빈 감독도 그런 걸 정말 멋있다고 생각한다.

- 최근에는 무엇 하나를 깊이 파고드는 사람들에 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선호빈 그건 맞다. 무시받으면서도 주체적으로 하고 싶은 걸 하고 표현하는 한국의 오타쿠들이 현재의 한국 문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수카바티>를 촬영하면서도 축구 문화가 거저 만들어진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체감했다. 그런 모습을 전달하기에 나바루 감독의 과잉된 감정의 시선이 이 영화를 중요하게 이끌고 가줬다.

나바루 나와 반대로 선호빈 감독은 감정이 반영된 촬영이나 작업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인데 나중엔 많이 변해 있더라. 가끔 새벽에 “편집하다가 울었다”라는 전화도 받곤 했다. (웃음) <수카바티>는 FC안양 서포터스에 관한 영화이지만 나는 K리그를 좋아하는 많은 팬들이 이 영화를 통해 극장에서 위로받았으면 한다. 이 작품이 누군가에게 작게라도 그런 역할이 될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선호빈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김세윤 작가가 <수카바티>를 멜로물, 로맨스물이라고 했더라. 덧붙이면 나는 이 영화를 ‘오타쿠 로맨스’라고 말하고 싶다. (웃음)

선호빈, 나바루 감독이 뽑은 ‘이 장면’

선호빈 최지은씨가 신호홍염을 찾아 인천 연안부두까지 찾아간 그 일렬을 하나의 시퀀스로 연출·편집하며 정말 많이 고생했다. 처음엔 애니메이션으로 작업하려고 했는데 다큐멘터리의 톤과 잘 맞지 않아 결국 진행하지 않았다. 서포터 청년들의 진지하고 바보 같은 열정을 잘 표현하고 싶었다.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길 바라 <북극의 나누크> 같은 고전영화의 몽타주를 많이 활용했다. 호불호가 좀 갈리던데, 그럼에도 좋아해주는 분들이 있어 즐겁다.

나바루 최캔디씨가 아들 승원과 함께 응원하는 신을 좋아한다. 승원이가 FC안양이 창단된 후에 태어났는데, 두 사람이 나란히 선 풍경이 뭔가를 물려주는 것 같기도 하고 아주 복합적인 순간이었다. 선호빈 감독이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 장면을 찍으면서 나도 울컥했어”라고 하더라. 선호빈 감독이 찍어온 그 장면을 보고 “형, 우리 게임 끝났다”고 했다. 그때는 영화에 대한 어떤 확신도 없었는데도. 그만큼 많은 걸 설명해주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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