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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 서 있는 사람,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와 1990년대 한국의 영화 문화
김이석 2024-08-13

<희생>

1990년대는 한국의 영화 문화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던 시기였다. 코아아트홀과 동숭아트센터 같은 예술영화관들이 호황을 누렸고, <씨네21>과 <키노> 등 영화 전문 잡지들이 잇달아 창간되기도 했다. 또한 대학가에서는 극장에서 볼 수 없는 고전영화나 미개봉 영화들을 비디오테이프로 상영하는 행사들이 연일 열리곤 했다. 레오스 카락스, 뤼크 베송,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테오 앙겔로풀로스, 에미르 쿠스투리차, 왕가위, 기타노 다케시, 이와이 슌지 등은 1990년대 한국의 시네필이 각별히 아끼는 감독들이었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역시 이들 중 한명이었다.

타르콥스키 감독의 영화 <희생>(1986)은 1995년 2월에 개봉했다. 제작된 지 약 10년이 넘은 오래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반응은 뜨거웠다. 누군가는 당시 <희생>의 관객이 3만명이 넘었다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5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심지어 10만명이 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굳이 이 영화를 수입한 관계자의 말을 빌려 정확한 관객수를 밝힐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희생>에 대한 이야기 대부분은 <희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한국의 영화 문화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1990년대 한국의 영화 문화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설명하려다 보니 <희생>의 관객수가 조금 부풀려졌는지도 모른다. 큰 문제는 아니다. 분명한 사실은 <희생>이 전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성공을 한국에서 거두었다는 점이다. 국내 평론가들도 타르콥스키를 ‘영화의 구도자’로, <희생>을 ‘품격 높은 예술영화’라고 소개하는 등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호응에 힘입어 1996년에는 타르콥스키의 또 다른 영화 <향수>(1983)가 개봉했으며, 미개봉된 영화들도 비디오로 출시됐다.

그런데 타르콥스키가 국내에 소개되는 과정에는 몇 가지 이색적인 부분이 있다. 첫째로, 그의 이름이 영화가 아니라 책을 통해 먼저 국내에 알려졌다는 점이다. 창작과 이론을 병행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소련의 영화인답게 타르콥스키도 자신의 영화에 대한 생각을 담은 <봉인된 시간>이라는 책을 1984년 독일에서 출간했는데, 이 책이 1991년 분도출판사를 통해 출판된 것이다. 영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많았지만, 읽을 만한 영화 서적은 부족하던 당시 상황에서 타르콥스키의 책은 국내 시네필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비록 타르콥스키의 영화를 본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국내 시네필 사이에서 그의 이름은 반드시 알아야 할 이름이었고, 그의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었다.

타르콥스키의 국내 수용 과정에서 또 한 가지 이색적인 부분은 그의 영화가 역순(逆順)으로 소개되었다는 사실이다. 국내에서 가장 먼저 개봉된 <희생>은 타르콥스키의 마지막 영화였으며, 그 뒤를 이어 개봉된 <향수>는 <희생>보다 3년 앞서 제작된 영화였다. 타르콥스키의 영화 중에서 국내에 정식 개봉한 영화는 이 두편이 전부였다. 이로 인해 국내에서는 타르콥스키에 관한 논의가 대부분 이 두편의 영화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희생>과 <향수>는 모두 타르콥스키가 소련을 떠나 서유럽에서 연출한 작품들이었다. 물론 이 두편의 영화도 타르콥스키의 대표작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하지만 타르콥스키가 2차대전 이후 소련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라는 점이나 그의 영화가 러시아의 예술적 전통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소련에서 만든 영화가 국내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의 모든 영화가 실제 작품이 만들어진 시기와 짧게는 9년에서 길게는 30년이 넘는 시간적 격차를 두고 국내에 소개되다 보니 작품들의 영화사적 가치나 작품을 둘러싼 정치적 맥락이 제대로 전달되기 어려웠다. 따라서 일종의 오독 혹은 오역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러시아 문화와 타르콥스키

국내에는 <향수>와 <희생>의 감독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타르콥스키는 스탈린 사후(死後) 소련영화의 부활을 상징하는 감독이다. 1962년 첫 장편영화 <이반의 어린 시절>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타르콥스키는 단숨에 소련영화의 기수로 주목받는다. 그의 영화는 이전의 소련영화들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나 지가 베르토프로 대표되는 기존의 소련영화들이 사회주의 이념에 기반하고 있던 것과는 달리 타르콥스키는 푸시킨, 고골,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로 이어지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영화라는 20세기적인 예술형식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다. 러시아적 전통과 가치 회복을 특징으로 하는 이런 성향은 소련 정부로서는 다민족국가인 소련의 정치적 안정을 위협할 수 있는 위험한 사상으로 간주되었다. 이로 인해 타르콥스키는 1960년대 후반부터 소련 정부와 불편한 관계에 접어들게 된다.

도스토옙스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타르콥스키는 인간을 “서로 다른 두 심연을 동시에 들여다보는” 존재이자 “내면에 온갖 것들을 동시에 갖고 있는” 존재로 묘사한다. 선과 악, 숭고함과 추악함을 내면에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탓에 인간은 불안정하고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타르콥스키는 이런 인간의 나약함과 불안정함을 자신의 영화 속에서 낱낱이 드러낸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절대적 고독, 삶에 대한 불안, 죄의식 등과 같은 문제로 고통을 겪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처럼 수난과 고통을 겪는 인물들을 가리켜 타르콥스키는 ‘약한 인간’(weak men)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실존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로 내적 고통을 겪는 인간은 기존 소련영화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존재들이다. 타르콥스키의 주인공들은 존재론적 고민에 사로잡힌 개별자들이며,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포로가 되어버리는 나약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타르콥스키는 이런 ‘약한 인간’들이야말로 구원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체험한 이후에야 비로소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희생>, 아들을 위한 제의

<희생>

<희생>은 타르콥스키가 구상하고 있던 여러 영화 중 하나였다. 원제는 <마녀>였지만 영화 제작 과정에서 <희생>이라는 제목으로 변경되었다. 타르콥스키 본인도 말했듯이 <희생>은 감독이 소련에서 만든 전작들과는 차이가 있는 영화다. 실내를 배경으로 한 가족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데, 스벤 닉비스트가 촬영을, 엘란드 요세프손이나 알란 에드발 등 베리만의 단골 배우들이 주요 배역을 맡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희생>은 전작인 <향수>와는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두 영화는 모두 타르콥스키가 서유럽에서 만든 영화다. 또한 묵시록적인 비전이 강하게 제시된다는 점, 제물을 바치는 제의적 행위가 주요 소재라는 점, 그리고 그 행위를 하는 인물을 엘란드 요세프손이 연기한다는 점 등이 두 영화의 공통점이다. 그런데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인간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최후의 심판’을 그리기를 거부하면서 고통받는 인간들을 위로하는 ‘삼위일체’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예술가의 임무라고 주장했던 타르콥스키가 세상의 종말에 관한 영화를 잇달아 만들었다는 사실은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이 두 영화는 타르콥스키가 서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였는지도 모른다. 정치적 억압에서 벗어나 더 많은 영화를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 망명을 선택했지만, 타르콥스키가 경험한 서구 사회는 물질주의에 완전히 포획되어버린 세상이었다. 신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인간은 어리석은 욕망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결국 세상은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은 그를 종말을 경고하는 예언자로 만들었다. 이 예언자는 때로는 자신의 몸을, 때로는 자신의 재화를 제물로 바침으로써 세상을 구하려고 한다. 특히 <희생>의 주인공 알렉산더에게는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구해야 할 대상이 있었다. 바로 그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알렉산더의 아들은 곧 타르콥스키 자신의 아들이기도 했다.

<희생>을 만들 당시 타르콥스키의 아들은 부모와 떨어져 모스크바에 있었다. 타르콥스키가 <향수>를 연출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날 때 망명을 염려한 소련 정부가 그의 아들을 볼모로 잡아두었기 때문이다. 창작의 자유를 위해 망명을 선택했지만 아들을 버려둔 것은 타르콥스키에게 감당하기 힘든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아들을 돌려받기 위한 정치적 노력과는 별개로 타르콥스키는 아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기로 했고, 그 영화가 바로 <희생>이었다. 애초에 치명적인 병에 걸린 남자와 치유 능력을 가진 여인에 대한 이야기였던 영화는 종말로부터 아들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아버지에 대한 영화로 바뀌었다. <희생>의 첫 장면에서 아버지는 마른 나무를 심으며 아들에게 매일 나무에 물을 주는 행위를 반복하면 나무에 잎이 돋아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첫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아들을 위해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든다’는 자막과 조응한다.

놀랍게도 이 영화 덕분에 타르콥스키는 마침내 아들과 재회한다. 하지만 기뻐할 수만은 없는 재회였다. <희생>의 촬영을 마친 직후, 타르콥스키는 자신이 암에 걸렸음을 알게 된다. 이후 프랑스 대통령까지 나서서 소련 정부를 압박하면서 부자간의 재회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희생>은 1986년 칸영화제에 초청되어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병이 깊어져 영화제에 불참한 타르콥스키를 대신해 그의 아들이 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겨울, 타르콥스키는 세상을 떠났다.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봉헌했던 영화의 주인공처럼 그는 자신을 제물로 바쳐 아들을 되찾아온 셈이다.

두 그루의 나무와 두명의 소년

<희생>

타르콥스키의 첫 영화 <이반의 어린 시절>의 첫 숏과 그의 마지막 영화 <희생>의 마지막 숏은 모두 나무 아래 있는 소년의 모습으로 시작해서 나무를 따라 카메라가 천천히 하늘로 올라가면서 끝난다. 타르콥스키의 절친이기도 했던 크리스 마커는 이 두 장면을 언급하며, 타르콥스키의 영화 전체가 “두 그루의 나무와 두 소년 사이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타르콥스키는 <희생>을 촬영할 때,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영화가 될 줄 몰랐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힘이 그의 영화 전체를 두 그루의 나무와 두명의 소년으로 단단히 연결해놓은 것일까? 기적이나 신비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우연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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