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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온전히 바라보는 시선의 힘’, <딸에 대하여> 하윤경
김소미 2024-08-28

밝음과 어둠의 온유한 공존. 배우 하윤경에게 내적으로 성숙한 배역이 곧잘 주어지는 건, 그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가 자신다움을 직시하고 성찰하는 사람의 것이기 때문일 터다. “캐릭터의 주축은 지키되 그 반대편의 면모를 불쑥 내보일 때 인물이 비로소 재미있어진다”고 말하는 이 배우도 스스로의 장점을 이미 잘 알고 있는 듯 보인다.

<딸에 대하여>에서 동성 연인 그린(임세미)과의 사랑을 7년간 지켜온 여성 레인은 퀴어 커플에게 쏟아지는 사회적 차별과 압력을, 그와 무관하지 않은 주거난의 불안을 온전히 마주하는 인물이다. 타인에게 밝은 빛을 나누어줄 때는 물론 숨겨지지 않는 그림자를 끌어안고 있을 때도 하윤경의 에너지는 맑게 뻗어나간다. 배우의 시선에 힘입어 <딸에 대하여>는 한결 더 진실한 촉감을 입는다.

-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이후 <딸에 대하여>를 촬영했다. 커리어의 전환점이라 할 만한 시기에 작품 선택을 할 때 고민한 부분이 있었을까.

드라마 출연 후 생활이 달라지지 않았냐고 물어보는 분들이 많았는데 나로서는 모든 게 똑같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열심히 노력한 것의 결실이 조금 나타나 기쁘다는 마음 외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꾸준히 독립영화를 계속 하고 싶은 마음도 확고했는데, 오히려 드라마로 유명세를 타면서 내게 독립영화 캐스팅 제안이 덜 들어오면 어쩌나 하는 괜한 노파심이 잠시 들 정도였다.

- 독립영화 프로덕션 경험에 특별한 점이 있다면.

우리끼리 복작복작하는 작업 과정, 세상의 소외된 지대를 보는 작가적 시선이 살아 있다는 점이 좋다. 아무래도 같이 만들어간다는 느낌이 더 짙고 배우로서도 시도의 폭이 좀더 넓어진다. 독립영화 현장에 있을 때마다 ‘아, 내가 이래서 연기를 좋아하게 된 거지’ 하고 새삼 자각하게 된다.

- <딸에 대하여>는 이미랑 감독, 제정주 프로듀서, 그리고 주연배우들까지 여성배우들이 함께 만들어간 영화라 현장의 온기와 정감이 더욱 돈독하지 않았을까 싶다.

말하지 않아도 공감대의 폭이 넓은 분위기였다. 덕분에 결속감, 안정감을 느꼈다. 배우가 느낀 이런 편안함이 작품에서도 어떤 에너지로 흘러나오리라 생각한다.

- 이미랑 감독이 레인 역에 하윤경이 필요한 이유를 배우에게 직접 말해준 적 있나. 인물이 지닌 선함과 의지적인 면모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와 맥을 나란히 하지만, 레인에게는 현실과 부딪치면서 생긴 그림자 혹은 상처가 더 감각된다.

감독님은 차분한데 마냥 어둡지만은 않고, 밝은데 마냥 들뜨지만은 않는 내 모습이 레인 같다고 말했다.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과 제법 비슷한 묘사여서 감독님이 마치 나를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확실하게 밝은 사람도, 어두운 사람도 아니라는 게 나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한편 늘 조곤조곤 말씀하시면서 차분하고 단단하다는 느낌을 주는 이미랑 감독님이 내게는 레인의 모델이기도 했다. 캐릭터를 만들어나갈 때 감독님으로부터도 힌트를 얻었다.

- 레인은 <딸에 대하여>에서 작품 주제와 맞닿은 태도를 이미 품고 있는 인물 같기도 하다. 자칫 이상적으로 비칠 수 있는 면모를 현실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과제가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레인은 마냥 살갑지 않은데 그렇다고 사회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직설적으로 할 말을 다 하는 것 같지만 누군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표현을 하지는 않는다. 솔직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단어를 골라 말한다는 느낌에서 그의 성숙함을 감지할 수 있다. 그린의 엄마를 대할 때도 상황 자체는 불편하지만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깊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 함부로 적대하지 않는다. 정작 현실의 나는 불편한 상황에서 주접을 떨고 말실수를 하고 마는데…. (웃음) 달리 말하면 레인이 이렇게 자기 중심을 단단히 세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유를 했을지, 자기 삶은 물론 타인에 대해서도 얼마나 깊은 고민과 배려를 거쳤을지 생각해보게 됐다. 아직 젊은 나이지만 자신과 타인을 깊이 고찰한 사람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 그린의 엄마를 대하는 레인의 태도는 배우의 해석에 따라 그 온도가 미묘하게 달라졌을 법하다. 의식적으로 더 살가울 수도, 혹은 더 불편한 기류를 형성할 수도 있었을 텐데 톤을 조절해나간 과정이 궁금하다.

원작 소설의 도움을 받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건조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오히려 레인이 누구인지 잘 느낄 수 있었다. 이미랑 감독님은 절대 캐릭터를 정의해서 디렉팅하지 않는다. 큰 코멘트를 주기보다 “이 장면에선 조금만 더 서로를 바라보면서 연기해볼까요?” 하는 식으로 가능성들을 던져준다. 작품이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해서 매번 꼼꼼히 체크하는 편은 아니다. 다만 시나리오나 원작을 볼 때 나의 초안에 관해 중요하게 생각한다. 첫인상을 배제하고 너무 많은 생각을 더하면 해석이 산으로 갈 때가 많더라. 물론 이 태도가 자칫 독선이나 자만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예민하게 가늠하려 한다. 배우에게 자기 확신과 독선은 항상 한끗 차이인 것 같다.

- 레인은 드라마틱하게 표현하는 사람이라기보다 맑고 직선적인 대사로 진심을 투영하는 캐릭터다. 이럴 때는 연기에 어떻게 접근하나.

기교로 표현할 수 없는 연기다. 무언가 하지 않고 절제할 때의 연기가 내게는 훨씬 더 어렵다. 표출하고 발산하는 연기가 오히려 편하다. <딸에 대하여>에선 호흡 하나하나를 눌러가면서 연기하는 과정이었다. 메소드연기를 지향하는 배우는 아니고 오히려 철저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이번 현장에서는 캐릭터에 맞는 무드는 가져가려고 했다. 오민애 선배님도 아주 밝고 쾌활한 분인데 이번 현장에선 서로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느낌으로 담담히 계셨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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