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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상실에서 벗어나는 로드무비, <문경> 신동일 감독
이우빈 사진 백종헌 2024-08-29

신동일 감독은 정말 꿋꿋하게 걷고 있다. 2006년 <방문자>를 시작으로 <나의 친구, 그의 아내> <반두비>로 독립영화계에 자신만의 뚜렷한 스타일을 각인시켰고 이후에도 <컴, 투게더> <청산, 유수> 등을 공개하며 단단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자신만의 길을 택한 신동일 감독이 로드무비의 형식에 이끌린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신작 <문경>은 도시 생활에 지친 문경(류아벨)이 문경에서 만난 비구니 가은(조재경)과 겪는 로드무비다. 각자의 상처를 지닌 이들은 유랑 할매(최수민) 집에 머무르면서 자신들만큼 혹은 더 큰 고통을 견디고 있는 소녀 유랑(김주아)을 만나서 치유의 길에 이른다. 번뇌에서 벗어난다. 전작들보다 한결 편안해진 마음과 풍경으로 관객을 찾은 신동일 감독은 멈추지 않고 더 멀리 가는 다양한 로드무비를 구상하고 있었다.

- <컴, 투게더> 개봉 때 만나고 훌쩍 7년이 지났다. <문경>을 구상한 과정은 어땠나.

= 차기작을 구상하면서 그간 만든 영화를 복기하니까 대부분 남자와 남자의 관계를 그렸더라. <방문자>가 그랬고, 아니면 <반두비>처럼 남자와 여자 사이를 그리기도 했고. 물론 <컴, 투게더>에 엄마와 딸의 서브 스토리가 있긴 했지만 여자와 여자 사이의 깊은 드라마는 다뤄보질 못했다. 자연스럽게 여자주인공들의 이야기로 선택지가 좁혀졌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등장인물이 거의 다 여성인 드라마로까지 넓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문경과 초월(채서안)의 라이벌인 하원(차서현)도 남자였는데 의식적으로 다 여성으로 바꿨다. 그렇게 설정한 뒤 실제로 직장생활 경험이 있는 이애리 각본가의 작업을 거치니 인물간의 감정이 훨씬 현실적이고 풍부해졌다는 느낌이 들더라.

- 문경이란 특정 공간을 다룬 이유는.

= 오래전부터 문경이 고향인 아버지께서 문경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으란 말씀을 하셨다. 난 계속 침묵으로 일관했다. (웃음) 그러다가 2020년쯤 후배랑 문경에 놀러가서 처음 차박이란 걸 하는데 저녁 준비할 때쯤 소나기가 확 내리더라. 그 빗물 젖은 밥을 먹으면서 ‘이야, 이거 영화적이네’란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도 문경과 가은의 스토리로 사용한 부분이다. 다음날 선유동계곡을 유람할 땐 그 자연 앞에서 내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느껴졌다. 이미 여성 둘의 로드무비 형태는 생각해 뒀던 터라 이 영감들을 잘 조합하게 됐다.

- 전작들보다 한결 편안해졌단 인상이 든다.

= 예전 영화들보다 조금은 더 대중적이면 좋겠단 바람이 있었다. 이애리 작가가 아무래도 대중적인 시선을 잘 알고 가는 친구여서 영화의 화법이나 인물들의 심리도 훨씬 자연스러운 작품이 나온 것 같다. 영상적인 접근에서도 예전에 롱테이크나 관조적 시점이 있었다면 이번엔 통상적인 숏-리버스숏 구도도 많이 썼고, 몽타주 신들이 꽤 있다 보니 음악도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됐다.

- 인물간의 관계도 더 느긋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전작에선 서로 싸우고 헐뜯으면서도 관계를 유지하는 이들이 나왔는데, <문경>의 인물들은 서로의 존재를 좋은 기억으로 남기고 각자의 갈 길을 가기도 한다.

= 가은은 진리를 좇아 어디론가 계속 가야 할 구도자이기에 문경이나 다른 이들과의 인연을 뒤로해야 하는 인물이다. 문경 역시 잠시 내려온 여행자일 뿐 일단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물론 서울에 가서 퇴사하든지 다른 삶의 형태를 택할 순 있겠지만 각자의 영역으로 귀환해야 한다는 사실은 같다. 인연이라는 게 막 억지로 되는 건 아니더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면 만나고 아니면 아니고. 불교 공부를 조금 하다 보니 이렇게 되더라. 탐진치라고 하는 세 가지 번뇌에서 좀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귀결된 것 같다. 나 역시 전작 <청산, 유수>의 개봉 과정이 험난해서 자괴감과 열패감을 느꼈는데 <문경>에 매진하면서 극복할 수 있었다. 문경이 사망한 동생을 추모하며 노래하고 마음의 정리를 해가듯이, 또한 유랑이가 나쁜 기억에서 조금 해방되듯이 어떤 상실감에서 벗어나면 삶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표현해보고 싶었다.

- 어떻게 보면 도시와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자연을 예찬하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 굳이 도시와 자연을 구분하려던 것은 아니다. 문경과 가은이 각자에게 익숙한 공간으로 되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주제는 어디에서 살든 어떤 태도로 살 것인지의 문제다.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을 찬양하거나 격하하려고 하진 않았다.

- 도시와 자연의 공간을 화면에 담는 촬영 방식은 확실히 달라 보인다.

= 맞다. 촬영감독과 논의해서 초월과 문경의 직장생활이 그려진 도시 시퀀스에선 야외 컷을 딱 하나만 썼다. 의도적으로 내부 공간을 답답하게 찍었고, 숏-리버스숏을 주로 사용해서 대화의 템포를 올렸다. 그리고 서울을 떠나는 순간 자동차가 넓은 도로를 주행할 때부터 시야가 트이도록 만들었다. 문경이나 시골에선 굳이 인위적인 숏을 잡지 않아도 자연 공간에서 오는 시각적 해방감이 있었다. 컷을 최대한 나누지 않고 자연스럽게 찍고 싶었다. 그래서 유랑 할매 집에서 문경이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장면은 현장에서 논의해 8분40초짜리 롱테이크로 찍었다. 콘티의 컷 3개를 합쳤다.

- 죽음을 다루는 방식도 전작의 연장이자 변주로 보인다. 가은에겐 사회적 죽음의 전사가 엮여 있다.

= 시나리오 막바지 작업할 때쯤, 내 생일인 10월29일경에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다. 충격과 슬픔, 그것보다 큰 분노가 찾아왔다. 그래도 예술 작품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외면할 수 없는 일 같아서 영화에 녹이게 됐다. 다만 아직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루기엔 이르고 너무 소재주의적으로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1999년 인천 인현동 참사를 모티프로 삼게 됐다.

- 차기작 계획은.

= <청산, 유수>로 충청도에, <문경>으로 경상도에 갔으니 다음은 전라도를 노리고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젊은 세대를 주인공으로 삼았는데 다음엔 나와 가까운 세대가 자식 세대와 겪는 갈등과 화해 가능성을 그려보고 싶단 마음이 있다. 더 나아가면 함경도나 평안도, 해외까지 나아가는 로드무비도 찍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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