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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잊혀진 공포의 그림자, <에이리언: 로물루스>
이병현 2024-09-11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연대기적으로는 <에이리언> 오리지널 시리즈 1편과 2편 사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실제로는 <에이리언> 프리퀄 시리즈 이후의 작품이다. 따라서 이번 작품은 어쩔 수 없는 ‘핸디캡’을 하나 안고 시작할 수밖에 없다. 더이상 영화 속 ‘에일리언’이 기원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공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프리퀄 시리즈에서 ‘제노모프’의 기원이 명확히 밝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프리퀄 시리즈가 인류의 기원과 함께 제노모프의 기원을 파고들기 시작하며 1979년 처음 스크린에 등장한 이 괴물의 신비함이 많이 희석됐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페데 알바레스 감독은 이러한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이 이미 성공을 거둔 바 있는 익숙한 공식을 극에 끌어들인다. 먼저 남루한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 누구도 그들을 도울 수 없는 고립된 공간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청년 무리가 있다. 이들은 고립된 공간에서 무언가를 찾아내야만 현실을 탈출할 수 있지만,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법에 어긋나는 일(절도)을 벌여야 한다. 그런데 운 나쁘게도 이 고립 공간은 평범한 장소가 아니라 살육자가 지배하는 곳이었음이 밝혀진다. 청년 무리가 공간에 진입한 이후 살육자가 잠에서 깨어나고, 첫 번째 희생자가 발생한다. 이 살육자는 시각이 없는 대신 소리만으로 희생자를 추적할 수 있는데, 끔찍하게도 살육자의 최종 목표는 희생자를 ‘임신’시키는 것(!)이다.

어딘가 친숙한가? 이는 감독의 전작인 <맨 인 더 다크>를 요약한 내용으로, 위에 나열한 설명은 <에이리언: 로물루스>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요컨대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우주를 배경으로 한 <맨 인 더 다크>다. 단지 여기에 <에이리언> 시리즈를 향한 애정 어린 윙크가 추가됐을 따름이다. 페이스허거에 시각이 없다는 설정이 (영상물 중에서는) 이번 작품에서 처음 언급됐다는 사실 자체가, 알바레스가 이 시리즈를 자신의 ‘홈그라운드’에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는 방증이다.

노력한 보람이 있어 알바레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훌륭한 호러 기술자로서의 면모를 뽐낸다. 특히 소리로 빚어낸 아이러니한 서스펜스, 즉 비명을 질러야 마땅하지만 질러서는 안되는 장면을 통해 (마치 게임 <에이리언: 아이솔레이션>에서처럼) 관객이 등장인물과 같이 숨을 참게 만드는 기법은 이번 작품에서도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주기적으로 중력과 무중력을 오가는 무대 설정은 산성피가 휘날리고 엘리베이터가 추락하는 몇몇 기발한 세트피스를 성립시키는데, 이는 이번 작품에서 가장 독창적인 액션이기도 하다. 비록 몇몇 설명적인 대사가 장점을 희석하고는 있지만, 도입부에서 뜸을 들이며 세계를 구축하는 것도 1편을 떠오르게 하는 좋은 시나리오다.

범인은 배 안에 있다

알바레스 감독은 성공적으로 이전 시리즈에 대한 향수를 불러오는 동시에 작품 말미에 굉장히 이상한 ‘반전’을 도입해 시리즈가 앞으로 더 확장될 가능성도 심어놓고 있다. 이번 영화 결말에서 우리는 인간이 낳은 아기인 동시에 외계의 피로 오염된 한 ‘두려운’ 존재와 마주치게 된다. 이 괴물은 우리가 이제껏 이 시리즈에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존재다.

여기서 잠깐, <에이리언> 시리즈 팬이라면 내가 앞서 한 말에 즉각적으로 반박하고 싶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 괴물을 <에이리언4>에서 보지 않았나?’ 그러나 이는 우리가 로물루스에서 목격한 괴물이 담지한 공포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반문이다. <에이리언4>의 정신적 후속작인 이 영화는 <에이리언4>와 비교했을 때 몇 가지 차이점을 보인다. 복제 리플리와 달리 케이(괴물을 낳은 모체)는 괴물에게 모성애를 느끼지 않으며, 괴물도 인간 여성에게 애정을 느끼지 않는다. 이에 따라 이번 영화는 <에이리언4>에서 어렴풋이 다뤄졌으나 흔해 빠진 모성애 테마로 빠지는 바람에 가능성이 온전히 발휘되지 못했던 어떤 원초적 콤플렉스, 즉 ‘살모(殺母)의 죄’를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작가 바바라 크리드에 따르면 “레비스트로스는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는 남자가 여자로부터 태어났느냐 아니냐’라는 질문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신화는 <에이리언>에서도 핵심”이다. 오이디푸스는 언제나 살부(殺父)와 근친상간의 죄를 저지른 것으로 이해됐으나 실은 그가 ‘신화 속 어머니’인 스핑크스를 죽인 것은 살모의 죄를 보여준다고 크리드는 말한다. <에이리언: 로물루스>의 이종교배 괴물은 이런 은밀한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보여주는 존재로서, 자신이 여자로부터 태어났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괴물이다. 이 ‘괴물’이 애초에 케이와 비요른 사이에 생겨난 존재로서, 사촌끼리 ‘근친상간’한 결과물이라는 점에 주목해보자. 영화는 언뜻 목숨까지 걸며 서로를 구하는 ‘남매’ 관계를 작중에서 내내 강조하며 정상 가족에 대한 강박관념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처음부터 이러한 정상성을 위협하는 씨앗을 품은 채 시작됐다.

이는 케이의 자식을 <에이리언>의 제노모프나 ‘뉴본 에일리언’(<에이리언4>)과는 다른 종류의 공포를 전달하는 존재로 만드는 과정이며, 시리즈에 새로운 종류의 공포를 도입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리지널 에일리언이 역겨움과 무서움을 자극한다면 <에이리언: 로물루스>의 에일리언은 두려움을 자극한다. 전자가 가슴을 뚫고 튀어나와 충격적이라면 후자는 일반적인 출산 과정을 거쳐서 태어난 존재라 더욱 두렵다. 뉴본 에일리언 역시 일종의 두려움을 품은 존재이지만, 이것이 인간 여성이 아닌 에일리언 퀸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 두려움을 반감시킨다(게다가 H. R. 기거가 지적한 대로 뉴본 에일리언의 디자인은 그리 미학적이지 않다).

흥미롭게도 이번 영화에서 괴물의 숙주가 되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는 캐릭터는 비백인 여성인 나바로와 케이뿐이다(남자인 타일러는 충분히 숙주가 될 수 있는 조건에서도 곧장 살해당한다). 수잔 제퍼드 작가에 따르면 <에이리언>을 포함한 초기 공포영화에서는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외계인의 점령을 당하거나 씨앗의 침범을 당할 가능성이 많았지만 새로운 변신은 거의 항상… 이성애 백인 남자들”에게 많이 일어났는데, 이는 “전통적 남성성의 부담 때문에 가장 고통받는 사람이 백인 남자… 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하드 바디> 216쪽) 그렇다면 할리우드영화는 이제 드디어 가장 고통받는 자가 백인 남성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일까? 오이디푸스콤플렉스 안에 살모 의식이 담겨 있을지 모른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일까? 그래서 이번 영화에서는 오직 여성들만이 씨앗의 침범을 당한 것일까?

안타깝게도 이 영화에서 케이는 ‘외계인을 자연분만한다’라는 끔찍한 장면을 위해서 모체가 된 것에 불과하다. 두려움이란 익숙한 동시에 낯선 것을 볼 때 느껴지는 공포다. 케이가 낳은 괴물이 ‘가슴을 터뜨리고/배를 찢고’ 튀어나오는 대신 자연분만 과정을 거쳐 알로 나온 이유는, 그래야만 이 두려운 이야기가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왜 태아는 영화 속 변형된 쥐처럼 끔찍한 포유류 형태로 진화하는 대신 알 형태로 변했을까? 왜 케이는 에일리언에게 ‘모유’를 줄 정도로는 변형됐으나 쥐처럼 다시 살아나 괴물이 될 정도로는 변하지 않은 것일까? 이 충격적인 전개는 잘 생각해보면 그리 논리적이지 않다. 단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매개체로서만 여성의 자궁과 질이 필요했다는 방증이다.

고양이는 왜 흑인 남성이 되었는가?

이 영화의 한계 지점은 희생자가 아닌 생존자에 초점을 맞춰보면 더욱 좁아진다. 주인공 레인은 리플리의 한계를 뛰어넘었는가? 오리지널 시리즈에서 리플리는 이성과 감성을 고루 갖춘 양가적 캐릭터로서, 모두를 살리기 위해 문을 열지 않는 동시에 고양이와 아이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인물이기도 했다. 특히 문을 여닫는 선택은 <에이리언>부터 <에이리언: 커버넌트>와 이번 작품에 이르기까지 몇번이고 반복되는 <에이리언> 시리즈 특유의 모티브인데, 이번 영화에서는 각각 나바로와 앤디가 동료를 구하기 위해 문을 여는 선택을 거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두 장면에서 레인은 나바로와 달리 문을 열었고, 앤디가 문 열기를 거부하자 뺨을 때렸다. 이는 마치 레인이 1편에서 리플리가 내렸던 선택, 리플리의 이성적 측면을 우회적으로 거부하며 리플리의 감성적 측면만을 물려받은 인물임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리플리는 <에이리언> 결말에 이르러 ‘강인한 생존자’에서 ‘여성적’인 모습으로 변해 동면에 빠지는데, 영화평론가 로빈 우드는 고양이 존스가 리플리의 이런 캐릭터 변화를 알리는 장치로 사용됐다고 지적한다. 이런 맥락에서 <에이리언>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병렬되는 외계인과 고양이 이미지는, 결국 리플리가 고양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전통적인 여성상에 부합한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칩이 바뀐 냉정한 앤디와 원래대로 돌아온 동생 앤디의 병치는, 레인이 후자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전통적인 여성상에 부합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결국 영화는 <에이리언>에 대한 우드의 다음과 같은 논평을 회피할 수 없는 것 같다. 주인공을 영웅으로 묘사해 씌운 ‘팝 페미니즘’적 외관이 궁극적으로 영화의 반동적 성격을 숨기고 있다는 그 유명한 지적 말이다. 레인은 리플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 맞이했던 눈부신 바람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영웅이지만, 그와 함께 리플리의 고양이와 아이에 대한 집착(만)을 물려받았다. 나는 어쩌면 40년 넘는 세월 동안 할리우드가 발전시킨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고양이를 흑인 합성인간 남성으로 대체한 수준에 불과한 것은 아닐지 되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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