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2
[인터뷰] 운명을 믿냐고 물었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이세영
남지우 사진 최성열 2024-10-11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2022)으로 사극계 베테랑을 넘어 한국 드라마의 중요한 얼굴 중 하나가 된 이세영은 이제 30대로 진입하며 성숙이 주는 지위를 온전히 누리고자 한다. 쿠팡플레이 드라마 <사랑 후에 오는 것들>에서 주인공 최홍은 일본인 연인(사카구치 겐타로)과 처절하게 이별한 뒤 재회의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버석한 얼굴의 여인이 됐다. 작품 속 일본의 봄과 한국의 겨울 사이에 5년의 시차가 흐르는 동안 일본어를 기억하는 홍의 성대는 더 깊고 낮게 울린다. 현대 배경의 정통 멜로를 통해 새로운 나라, 너머의 시간대에 안착한 배우 이세영이 그러한 목소리로 물어온다. 사랑 후엔 무엇이 오느냐고.

- 첫 질문으로 일본어 연기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홍이 초등학교 5년 동안 일본에서 살았다는 설정이라 언어의 서투름이 설정 파괴로도 이어질 수 있는, 배우에겐 혹독한 작업이었겠다.

일본어를 접한 게 처음이었고 준비 시간도 짧아서 지옥 같았다. (웃음) 현장 상황도 체크하면서 문제없이 흘러가고 있는지, 상대 배우의 일본어를 듣고 적절한 시점에 리액션을 하고 있는지 판단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받아든 첫 대본은 한국어로 되어 있었다. 결국엔 일본어로 대사를 할 거란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게 어떤 느낌일지를 당시에는 잘 알지 못했다.

- 일본어를 먼저 익혀야 대본을 읽을 수 있나? 혹은 대사를 통째로 외우면서 정면돌파하는 건가.

먼저 대본 위주로 수업을 받았다. 기본적인 문법, 어휘, 조사, 어미를 배웠고 동사의 변형형도 배웠다. ‘타베루’(たべル, 먹다), ‘타베마스’(たべます, 먹습니다), ‘타베마시타’(たべました, 먹었습니다). 홍이가 되기 위해 받았던 여러 가지 수업- 운전, 자전거, 달리기, 기타, 노래- 중 가장 흥미롭고 열성적으로 배운 것이 일본어다. 일본어는 한국어와 어순이 같아서 내가 외운 문장에 새로운 단어를 갈아 끼우듯이 조립하는 것이 재밌었다.

- 외국어라는 부담스러운 과제가 있지만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귀한 프로젝트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 같다. “그곳이 어디든 집을 떠나 혼자만의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던 홍의 마음으로 선택한 작품일까.

초등학교 6학년 때 <북경 내 사랑>이라는 한중 합작 드라마를 촬영하면서 중국에서 몇달 지내본 적 있다. 그때는 어머니와 같이 있었으니 이렇게 성인이 돼 혼자 외국에서 살아본 건 처음이다. 올 3월과 4월을 꽉 채워 일본 촬영을 하는 동안 한국에 한번도 오지 않았는데 ‘새로운 이름을 지어서 여기에서 신인배우로 데뷔하고 싶다’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교토에선 부모님, 언니, 친구에게 엽서를 보냈다. ‘저는 이곳이 정말 좋아요.’ 인생에서 처음 경험해보는 휴식 같은 두달이었다.

- 사카구치 겐타로가 준고 역으로 먼저 캐스팅된 뒤에 여자주인공이 정해졌다. 양국의 배우는 서로를 알았을까.

겐타로상은 이세영이 누군지 몰랐을 거다. (웃음) 나는 겐타로상을 알았다. 정말 잘생겼으니까. (웃음) 겐타로상은 청량하면서도 깊이 있는 눈빛을 가지고 있다. 거기서부터 다양한 감정이 보인다. 대학 시절의 첫사랑 동아리 선배 같은 느낌. 나는 여대를 나왔지만 말이다.

- 두 배우뿐만 아니라 한일 양국의 스태프에게도 도전적인 환경이었을 텐데.

한국에서의 생활을 일부 내려놓고 온 사람들. 말이 안 통하는 어려운 조건을 택한 현지 스태프들이었기에 이 작품을 정말 사랑하지 않으면 애초에 모이지 못했을 거다. 도쿄는 촬영 허가를 받기가 정말 어려운 곳이라 현장 프로듀서들이 발로 뛰고 설득하고 조율하면서 승인을 받아냈다. 특히 일본 로케이션의 중심이 되는 이노카시라공원의 촬영 허가를 받은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드라마에서 “운명이나 기적을 믿냐”고 꾸준히 질문하지 않나. 한 작품을 오롯이 애정하는 사람들만 빼곡하게 모였다는 점에서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은 기적 같은 작품이다.

- 사실 오늘 홍이와 사랑 얘기를 하러 왔다. (웃음)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은 사랑한다면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만나게 되어 있다는, 운명론적 애정관이 뚜렷한 작품이다.

나 또한 운명 같은 사랑을 늘 꿈꾸고 그러한 기적을 믿는다. 힘든 이별 후에도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에너지를 유지하는 편이고 그게 나의 건강한 측면인 것 같다. 내가 홍이와 다른 건 이별 후에는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별의 이유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간다.

- 홍이와 준고는 왜 헤어졌을까.

진정한 이해가 부족해서 헤어지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사이에도 각자의 입장과 사정이 있다는 게 참 가슴 아픈 것 같다. 특히 국적이 달라 타지에서 한명은 외로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홍이와 준고는 정말 사랑했지만 부족함도 많았다. 사랑하더라도 헤어지게 되는 관계도 있는 것이다.

- 홍이 연인으로서 지닌 강점은 행복하다는 표현에 적극적이라는 것이다. 내가 너랑 있어서 행복하다고, 네가 나한테 행복을 준다고, 확실하게 말한다. 홍이에게 하나 배웠다.

내가 분석한 홍은 ENFP다(감정형). 반면에 나는 대문자 T(사고형)이지만 애정 표현은 퍼주다시피 한다. 전화를 끊을 때는 어머니와 언니에게 사랑한다고, 헤어질 때는 아버지 입술에도 뽀뽀해드린다. 습관처럼 긍정적인 표현을 하면 뇌에서도 관련 호르몬이 나온다더라. 현장에서는 ‘배고파’, ‘힘들어’ 같은 부정 표현도 있지만, ‘여러분, 진짜 행복해요’, ‘우리 스태프들 너무 소중해요’, ‘너무 감사해요’, ‘귀여워’, ‘사랑해’ 같은 말도 많이 하는 편이다.

- 표현에 따르면 홍은 “버퍼링 상태에 있는” 20대다. 대학은 졸업했고,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을 자신까진 없다. 그러다가 배낭 싸들고 해외로 훌쩍 떠나는 이런 나태 혹은 갈등 상태의 이세영도 있었을까. 4살 때 연기를 시작한 27년차 배우에게도.

정처 없이 걷는 법을 몰랐다. 나는 연기를 할 걸 알았기에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진로가 명확했지만 이미 들어선 그 길에서도 고민이 컸다. 얼마나 버티느냐에 대한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지, 연기가 안되면 다른 것을 준비해야 할지. 글을 쓰고 싶지만 쓰는 것보다는 잘 읽을 줄 알았기에 출판사 직원이 된 홍이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예전에는 명확한 방향 설정이 옳은 것이라 믿었지만 걷다가 궁금한 게 생기면 다른 길을 쳐다봐도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