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오즈의 마법사> 팬픽. 소설에서 뮤지컬 그리고 영화로 확장된 <위키드>를 이렇게도 칭할 수 있을 것이다. 1900년 처음 출간된 L. 프랭크 바움의 소설 <오즈의 마법사>는 시대와 국가를 초월한 문화적 시금석이 됐다. 1939년 주디 갈런드 주연의 영화 <오즈의 마법사>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증폭시킨 예술 작품에 영향을 미치며 100년 넘게 다양한 영역에서 오마주됐다. 1995년 그레고리 매과이어의 소설 <위키드: 사악한 서쪽 마녀의 삶과 시간들>은 <오즈의 마법사>를 기반으로 한 2차 창작물이었다. 원작에서 구체적인 서사가 등장하지 않았던 사악한 서쪽 마녀의 사정을 상상한 ‘안티히어로 오리진 스토리’로 세계관을 확장시킨 것이다. 이후 그레고리 매과이어의 책은 2003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위키드>로 만들어지면서 새로운 문화현상을 이끌었다. 2012년 말 개봉한 <레미제라블>의 흥행 이후 다양한 인기 뮤지컬의 영화화 가능성을 검토하던 할리우드는 <위키드>의 영화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감독 교체, 코로나19, <캣츠> 등 대형 뮤지컬영화의 흥행 실패로 인한 업계의 우려 등 여러 우여곡절 끝에 뮤지컬 1막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은 <위키드>가 먼저 개봉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키드>는 이 IP가 영화로 만들어졌어야 하는 이유를 내적으로 증명한, 역대 실사 뮤지컬영화 중에서도 손꼽힐 만한 수작이다.
파트1에 해당하는 <위키드>는 전체 뮤지컬 분량과 맞먹는 러닝타임(160분)을 자랑한다. 뮤지컬 <위키드>에 담기지 않은 원작 소설의 사건을 넣고 다소 어두웠던 원작에 가까운 각색을 시도해서는 아니다. 전체적인 플롯은 뮤지컬의 각색을 따르고 O.S.T 역시 동일하지만 각기 사건에 좀더 시간을 들이며 캐릭터의 감정을 면밀하게 보여주는 과정에서 러닝타임이 늘어났다. <위키드>는 뮤지컬과 마찬가지로 서쪽 마녀의 죽음을 축하하는 오즈의 시민들 앞에 착한 마녀 글린다(아리아나 그란데)가 등장하는 시퀀스에서 시작한다. 서쪽 마녀 엘파바(신시아 이리보)는 태어날 때부터 초록색 피부였다. 이 때문에 부모에게도 배척당하고 유모의 손에 자란다. 사실 서쪽 마녀 엘파바가 과거 쉬즈 학교에 다니던 시절 글린다와 친구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영화는 엘파바가 쉬즈 학교에 입성했던 시기로 돌아간다. 휠체어를 타는 동생 네사로제(마리사 보드)의 입학을 돕기 위해 동행했던 그는 우연히 숨겨진 마법 재능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발휘한다. 아주 특별한 학생이 올 때만 마법학 강의를 하는 학교 총장 마담 모리블(양자경)은 그를 눈여겨보고 정식 입학을 권유한다. 모리블의 특훈을 받은 마법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글린다는 일부러 엘파바와 룸메이트를 하겠다고 나서지만 너무 다른 두 사람은 끊임없이 부딪친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을 거친 뒤 마음을 터놓는 친구가 된 엘파바와 글린다는 오즈의 최고 권력자 마법사(제프 골드블럼)의 초대를 받아 에메랄드시티로 향한다.
<위키드>에서 사회비판적 텍스트를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엘파바의 초록색 피부는 자연스럽게 인종문제를(때문에 뮤지컬 초연 당시 백인 배우가 엘파바를 연기한 것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었다), 장애인 네사로제에게서 소수자 차별을, 딜라몬드 교수를 포함한 동물의 권리를 박탈하는 마법사에게서 파시즘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다만 <위키드> 그리고 그가 뿌리를 둔 <오즈의 마법사>는 이를 동화적 판타지로 풀어내면서 대중적 파급력을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개봉한 <오즈의 마법사>는 나치즘을 비판하고 우정과 사랑의 가치를 강조한 우화를, 당대 새로운 영화 기술인 테크니컬러를 화려하게 선보이며 풀어냈다. 캔자스의 현실은 흑백으로, 오즈의 마법 세계는 컬러로 대비해 그 변화를 보여주는 신은 영화사에서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로 아직까지 회자된다. <위키드> 역시 원작 소설의 냉소적인 태도를 따르기보다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정치적 메시지를 화려함으로 무장한 맥시멀리즘에 태우며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누군가는 이같은 각색이 원작의 날카로움을 퇴색시킨다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그렇기에 <위키드>는 20년 넘게 브로드웨이에서 흥행하며 문화적 현상이 됐고 1억달러 이상의 제작비를 투입한 실사 뮤지컬영화로 만들어질 근거를 얻었다. 소외된 여성과 특권층 여성의 우정이 어떻게 서로를 변화시키고 세계를 바꿀 수 있는지 매력적으로 역설하는 <위키드>의 태도는 시대와 국가를 불문하고 유효한 감동이 있다.
좀더 디테일하게 들여다보면, <위키드>는 복선과 반전 등 기본에 충실한 내러티브로 구성돼 있다. 원작 소설이 시간순에 따라 엘파바의 일생을 따라간다면 뮤지컬과 영화는 글린다와 엘파바의 우정에 집중한다. 원작에서는 마법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모호하게 묘사됐던 그에게 분명한 능력을 쥐어주며 다양한 사건과 갈등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독재자 오즈에 맞서는 반체제 혁명가 엘파바의 면모를 강조한다. 딜라몬드 교수가 동물들이 말하는 법을 잃어가는 것을 걱정할 때 엘파바는 마법사가 도와줄 수 있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반대였다거나 하는 플롯 구조는 모범적인 작법이다. 마담 모리블이 날씨를 바꾸는 능력은 향후 파트2에서 공개될 중요한 사건 및 <오즈의 마법사>의 발단과 연결될 예정이다.
무대에서 불가능한 영화적 기법, 이를테면 주인공의 표정연기를 클로즈업하는 카메라는 엘파바와 글린다의 감정 변화에 좀더 몰입할 수 있는 장치다. 먼치킨랜드, 쉬즈 대학교, 에메랄드시티 등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대규모 프로덕션디자인은 할리우드 자본이기에 가능한 마법적 매혹을 가져온다. 동시에 <위키드>는 화려함을 추구하되 주객이 전도되거나 현란한 컷 편집으로 오히려 본질을 잃는 최근 고예산 디지털영화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원작의 뮤지컬 넘버에 존중을 표하며 배우들의 군무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한다. 영화 <위키드>는 동명의 소설과 뮤지컬의 정수를 보존하되 스크린이기에 가능한 가장 기본적인 영화 매체적 속성으로부터 감동을 만든다.
공교롭게도 파시즘과 타자화의 문제를 다룬 <위키드>는 불법 이민자 배척 이슈와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으로 한창 시끄러운 시기에 개봉하게 됐다. 안전하게 재미있는 <위키드>는 민주당 지지자부터 극우 개신교까지 즐길 수 있는 영화다. 초록색 피부와 동물을 소외화를 부추기는 오즈의 통치로부터 현실 정치를 직접 읽어낼 것인가 여부는 관객 각자에게 달려 있고 다양한 리뷰가 <위키드>의 의미를 짚어낼 것이다. 그렇게 <오즈의 마법사>의 상상력은 제국주의의 시작부터 나치즘, 트럼프 집권 시대에 모두 통용되며 폭넓게 소비되고 확장된다. 시대와 정치는 달라져도 유효한, 테크니컬러에서 CG영화로 진화하기까지 여전히 살아남은 세계관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