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리 젱킨스는 마이애미에 가본 적 없는 관객에게도 그곳의 후미진 마약거리 공기와 마이애미비치의 짠맛을 단번에 느끼게 한 감독이었다. 나고 자라 자신이 잘 아는 공간을 <문라이트>란 걸출한 블랙퀴어영화로 옮긴 젱킨스는 이번엔 이미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의 세계를 새롭게 그려냈다. 12월18일 국내 개봉하는 <무파사: 라이온 킹>은 100% CGI로 탄생한 라이브 액션영화로, 현실의 중력을 강하게 받는 젱킨스의 이전 영화들과 현격히 다른 작품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잃지 않기 위해 분투했다고 <씨네21> 마스터스 토크에서 털어놓았다.
실사영화에서 CGI의 세계로 나아간 아카데미 수상 감독과 이같은 이야기를 나눈 한국 영화인은 애니메이션영화로 시작해 실사영화로 향해 간 연상호 감독이다. 얼핏 상반된 방향으로 전진한 두 감독은 화상으로 만나 <무파사: 라이온 킹>에 대해 밀도 있는 대담을 나누었다. 서로의 작업에 존경을 표하며, 다음엔 대면해서 만날 것을 약속하며. 두 영화인이 공유한 시간이 느껴지도록 <무파사: 라이온 킹>을 연출하기까지 젱킨스 감독의 고뇌와 그의 시그니처인 특유의 클로즈업, 쉽지 않았던 뮤지컬 넘버 작업, 한국영화에 대한 애정 고백까지 충실하게 옮긴다.
배리 젱킨스 연상호 감독님, 안녕하세요!연상호 네, 반갑습니다. 한국에서 영화감독하고 있는 연상호입니다. 반갑습니다!
배리 젱킨스 네, 연 감독님 잘 알죠! 만나서 반갑습니다. 사실 <부산행>을 <무파사: 라이온 킹>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봤어요.
연상호 아, 그러셨군요. 감사합니다. (웃음) 이번 작품을 제안 받으시고 처음엔 거절하셨다는 얘길 들었어요. 어떤 것 때문에 거절하셨는지 얘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배리 젱킨스 <무파사: 라이온 킹>은 그동안 제가 해왔던 영화와는 다른 결과 방식의 작품이라고 생각해서 고민했습니다. 시나리오를 읽어보지도 않고요. 시나리오를 읽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이후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곧바로 <무파사: 라이온 킹>에는 그동안 내가 해온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죠. 그게 이 영화에 잘 맞을 거란 걸 알았어요. 그런 다음 테크놀로지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무파사: 라이온 킹>을 만드는 데 필요한 테크놀로지를 두려워할 것인가, 테크놀로지를 받아들일 것인가.
연상호 영화를 보면서 감독님이 연출하기로 결정한 이유를 알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특히 무파사와 타카의 관계가 매우 내밀하게 표현돼서 재밌었어요. 저는 원작 애니메이션인 <라이온 킹>을 고등학생 때 극장에서 관람했고, 10살 된 딸이 있다 보니 최근 라이브 액션으로 만들어진 존 파브로 감독의 <라이온 킹>(2019)도 봤어요. 두 작품을 재밌게 본 관객이자 아빠로서 이번 작품도 딸이 엄청 좋아할 거란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저는 무파사와 타카의 서사를 볼 수 있어서 굉장히 좋았어요. 깊이 있고 농도 진한 이야기가 충분히 기술돼 있어 재밌었습니다.
배리 젱킨스 시나리오를 보고 연출하겠다고 한 이유가 바로 무파사와 타카의 관계였어요. 원작 애니메이션이 나온 후 지난 30년 동안 우리는 두 캐릭터의 관계가 한쪽 방향으로만 흘러왔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과거로 돌아가 두 캐릭터의 관계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어요. 그리고 시나리오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감동적이었습니다. 두 캐릭터가 사건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환경이 두 캐릭터를 어떻게 성장시키고 서로를 멀어지게 하는지 볼 수 있었죠. 그 점이 정말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이온 킹> 시리즈는 이처럼 복잡한 캐릭터에 대한 토론 거리를 아이들에게 주고 있어요.
교차편집, 음악, 클로즈업이라는 영화의 마술
연상호 <무파사: 라이온 킹>은 선형적인 내러티브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교차편집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런 구조를 선택한 이유도 궁금합니다.
배리 젱킨스 아이들이 이 영화를 본다는 걸 의식하고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 영화 안에 아이들을 매치할지 고민했고, 아이가 이 영화에 등장하면 좋겠다 싶었죠. 제게 무파사는 결점이 없는 완벽한 캐릭터입니다. 심바의 딸인 키아라도 무파사를 완벽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완벽해서 자신은 절대 그처럼 될 수 없다고 느낄 정도죠. 자신은 할아버지처럼 용기 있지도 않다고요. 그래서 전 (교차편집 구조를 통해) 라피키가 “그렇지 않아. 무파사 역시 한 마리의 어린 사자였고, 경험을 통해 배우고 성장했어. 너도 그처럼 성장할 수 있어”라고 이야기해준다는 점이 정말 좋았어요. 연 감독의 따님이 이 영화를 본다면 키아라라는 캐릭터를 발견하고 감정이입하게 될 거예요. 정말 멋진 일이죠. 새로운 관객들이 새로운 캐릭터에 감정이입하면서 옛 캐릭터를 이해하는 것, 이 점이 교차편집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연상호 이전에 딸과 함께 <겨울왕국2> 시사회에 갔었어요. <겨울왕국>이 뮤지컬 음악으로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과연 그걸 뛰어넘을 수 있을까 했는데, <겨울왕국2>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딸과 딸의 친구들이 영화에 나왔던 노래들을 흥얼거리더라고요. <무파사: 라이온 킹>도 <라이온 킹> 뮤지컬 넘버가 벽같이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작품을 보고 무척 놀랐어요. 처음 듣는 노래임에도 익숙한 느낌이 들고 따라 부르기가 쉽고 모든 노래가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적이었거든요. 그 노래들을 만들어낸 과정이 궁금합니다.
배리 젱킨스 우선 엄청나게 두려웠다는 말씀부터 드립니다. (웃음) <라이온 킹>의 음악적 명성에 합당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했으니까요.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속에 지난 30년 동안 살아남은 원작 <라이온 킹>의 노래의 명성을 이어가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어요. 할 수 있는 최선은 원작의 음악을 대체하려거나 능가하려 하지 않고 원작의 에너지를 그대로 가져와서 의미와 감정을 살리면서도 이번 영화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뮤지컬 <해밀턴>, 영화 <엔칸토: 마법의 세계>, <모아나> 등의 노래를 작곡한 린마누엘 미란다 음악감독이 <무파사: 라이온 킹>의 음악을 담당했는데요. 그는 천재 음악가죠. 그와 일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미 존재하는 노래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옛 노래들을 두려워했다면 새로운 곡을 쓸 때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만들었을 겁니다. 두려워하는 대신 우린 캐릭터들이 겪는 경험에 음악적으로 반응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원작의 노래들이 캐릭터들의 세계에 반응하고 있기 때문에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해요. 이번 노래들도 영화 속 세계를 잘 반영한다면 잘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연상호 저는 특히 어린 시절 타카가 불렀던 뮤지컬 음악(<I Always Wanted A Brother>)에서 ‘브러더’라는 후렴구에 꽂혔어요. 나중에 성장해서도 나오죠. 하지만 ‘브러더’란 가사의 톤 앤드 매너가 달라져서 되게 감탄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배리 젱킨스 네, 그 점이 바로 영화의 힘이죠. 린마누엘 미란다 음악감독은 먼저 한곡에 하나의 의미를 확립합니다. 그런 다음 캐릭터들이 변화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죠. 같은 가사지만 표현 방식에 따라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는 겁니다. 이 점이 바로 영화 만들기의 힘이라 생각해요.역시 잘 알고 계시네요, 연 감독님. (웃음)
연상호 <문라이트>와 <무파사: 라이온 킹>이 서로 전혀 다른 톤 앤드 매너를 가졌음에도 촬영 기법의 유사성 때문에 또 놀랐습니다. 특히 동물 캐릭터들의 정면 클로즈업은 감독님의 시그니처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도 정면 클로즈업이 많이 등장했던 것 같고, 동물 캐릭터한테 더욱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클로즈업 덕분에 전작보다 캐릭터 심리에 더 빠져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배리 젱킨스 클로즈업은 <문라이트>와 <무파사: 라이온 킹>의 제임스 랙스턴 촬영감독과 제가 영화를 만들어오면서 발달시킨 것 중 하나죠. <무파사: 라이온 킹> 제작을 수락한 다음 우리는 스튜디오에 캐릭터들을 이렇게 그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캐릭터들은 사자지만 감정을 표현하고 있으니까요. 촬영감독과 저는 관객이 동물 캐릭터에 친밀감을 느끼면서도 동물 캐릭터의 감정을 잘 포착하게 하고 싶었어요. 어려웠던 점은 실제 공간에서 실시간으로 영화를 찍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만 해결되면 클로즈업은 캐릭터들의 움직임에 따라 카메라가 반응하면 됐어요. 그래서 저희는 애니메이터들과 슈트를 통해 방법을 찾아냈어요. 애니메이터들이 슈트를 입고 캐릭터들의 움직임을 연기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언제 클로즈업이 적절한지 빠르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캐릭터가 다른 캐릭터와 가까이 있을 때나, 앞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또 캐릭터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클로즈업을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연 감독님이 이 영화에서 친밀함을 느끼셨다니 감사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제가 영화를 만드는 유일한 방식이고, 저만의 목소리라고 생각하거든요.
배리 젱킨스가 사랑한 한국영화, 한국영화인
연상호 재밌게 보신 한국영화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배리 젱킨스 물론 있죠, <기생충>이요! (웃음) 그리고 옛 한국영화 중에 <301 302>(1995)라는 작품도 있습니다. 연 감독님도 아시나요? 학생 때 이 영화를 봤습니다. 어쩌다보니 비디오가게에서 빌려본 영화였는데, 오래전 일이네요. 무작위로 골라서 봤었죠. <301 302>는 인간의 특이성에 대한 영화였는데, 그에 대한 감독의 생각이 담겨 있었습니다. 보고 나서 많이 고무됐습니다. 연상호 감독님의 <부산행>을 봤고 바로 이어서 <서울역>도 감상했습니다. 두 작품 모두 정말 훌륭했어요. 봉준호 감독의 모든 작품들도 정말 정말 감동적이고요. 그리고 이창동 감독의 <버닝>도 아주 좋아합니다. 한국에는 연 감독님을 포함해서 정말 놀라운 감독들이 많아요.
연상호 한국 관객들에게 <무파사: 라이온 킹>을 통해 말하고 싶은 메시지와 마지막 인사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배리 젱킨스 <라이온 킹>이 오랫동안 우리 안에 존재한 만큼 원작의 캐릭터들도 고정화됐습니다. 선과 악으로요. 그런데 이 부분을 다시 생각해보는 게 중요해요.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 키워진 방식, 그리고 환경이 무파사와 타카 두 캐릭터를 어떻게 형성했는지를요. 무파사와 타카는 한 가족 안에서 성장하지만, 한 사자는 어떤 한 부모에 의해, 또 다른 사자는 다른 부모에 의해 성장합니다. 이로 인해 두 사자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됩니다. 만약 두 캐릭터의 상황이 바뀌었다면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왕이 타카일 수도 있어요.
연상호 부모의 입장에서 많이 공감되네요. 오늘도 딸이랑 싸우고 왔는데…. (웃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나중에 화상이 아니라 대면해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배리 젱킨스 정말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연상호 감독님의 작품들을 정말 존경합니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영광이었어요.
연상호 감독의 ‘원픽’(One Pick) 캐릭터는?
왕의 자리를 물려받을 예정인 아기 사자 타카는 부모를 잃고 헤매는 무파사를 가족의 일원으로 데려온다. 무파사를 ‘브러더’라 부르며 환대했던 타카는 이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빌런 ‘스카’가 된다. <무파사: 라이온 킹>에는 티몬과 품바, 라피키 등 기존의 친숙한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연상호 감독은 타카가 가장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는 타카 캐릭터가 좋았다. <무파사: 라이온 킹>은 어떻게 타카가 <라이온 킹>의 유명한 악당인 스카가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스카는 조커만큼이나 유명한 악당이잖나.”
박철수 감독의 <301 302>(1995)
독신자들이 살기 편하다는 명성이 자자한 한 아파트의 302호에는 먹으면 곧장 구토를 하는 작가 윤희(황신혜)가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맞은편 301호에 송희(방은진)가 이사를 오는데, 그는 남편에게 끊임없이 먹을 것을 만들어 먹이다 이혼한 인물이다. 윤희는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데도 이 이웃은 남편에게 그랬던 것처럼 온갖 음식을 만들어 바친다. 먹을 것을 거부하는 이와 먹는 것과 또 먹이는 것에 집착하는 이의 조우는 인간이 식재료가 되는 극단적인 상상으로까지 나아간다. <301 302>는 촬영과 미술, 편집이 빼어난 90년대 컬트영화로, 그 시절 한국영화 중에선 드물게 해외 개봉에 성공했다.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에 의해 4K로 복원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