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빙환’은 최근 <재벌집 막내아들>(2022), <내 남편과 결혼해줘>(2024), <선재 업고 튀어>(2024)와 같은 드라마의 성공으로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진 웹소설의 한 장르다. ‘회귀’(주인공이 자신의 과거로 돌아감), ‘빙의’(주인공이 작품 속 다른 인물의 몸으로 들어감), ‘환생’(주인공이 작품 속 다른 인물로 태어남)의 줄임말인 이 장르는 근본적으로 주인공의 현실에 대한 불만과 좌절에서 출발한다. 주인공은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우연적이든 계획적이든 선택의 기로 앞에서 현실을 ‘다르게’ 이해하고 이용하기 위해 더 나은 버전의 자기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택하는 인물이다. 비판 이론에 관심이 있는 누구라도 ‘회빙환’ 장르의 지배적 인기를 정치적 무력감과 회의감으로 인한 집단적 퇴행과 마비의 증상으로 해석하고 싶은 충동을 떨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회빙환’ 장르는 대중으로 하여금 미래도 대안도 없는 현실을 제대로 직면하게 하는 대신 자위적 ‘정신 승리’의 도파민에 무한 리필로 뇌를 절이게 만드는 ‘적폐’라는 식으로 말이다.
기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과 같은 청년세대의 자조적 구호를 ‘회빙환’ 장르의 유행과 함께 언급하는 대부분의 비평이 이런 냉소적인 관점을 공유한다. 알다시피 ‘정신 승리’라는 용어의 원조인 루쉰의 아Q나 쿵이지 같은 인물들은 세상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까지 속인 결과 미련하고 바보스럽게 죽는다. ‘회빙환’ 장르는 단지 그런 죽음의 끄트머리에서 전개되는 주마등을 공동 체험이 가능한 엔터테인먼트로 만든 결과일 따름이다. 우리는 아Q가 억울하게 죽기 직전 봤을 법한 가능성의 파노라마에서 작은 만족을 얻는 그런 안쓰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적폐’라고 놀려도 ‘회빙환’ 장르의 최소 성립 조건 중 하나가 주인공의 죽음이라는 사실에는 희한하게도 안심이 되는 무엇이 있다. 대중문화 역사에서 이렇게나 직접적으로 죽음을 입구로 삼은 장르는 없었다. 어쩌면 ‘회빙환’ 장르를 매개 삼아서만 우리는 (심지어 우리 자신의) 죽음이라는 주제에 비로소 접근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회빙환’의 유사 장르라 할 수 있을 ‘루프물’ 역시 죽음이 필수 요소다. 주로 사적 복수를 목적에 두는 ‘회빙환’과 달리 ‘루프물’은 사회적 재난을 막아야 한다는 ‘퀘스트’를 목적에 두고 ‘플레이어’ 주인공의 특정한 시간대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장르다. 마치 게임 같은 서술이다. 그야 처음부터 ‘루프물’은 “게임의 소재를 차용하고 있는 서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원리를 서사적으로 번역한 장르에 가깝”기 때문이다(유인혁, ‘진보 없는 시대의 유토피아-타임루프 장르의 서사학적·기술문화적 맥락과 이데올로기 연구’, 2023). ‘퀘스트’를 깨기 위해 ‘플레이어’ 주인공은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 거의 죽음을 소망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다.
인류 절멸을 앞둔 외계 침공 전쟁에서 특정 시점의 ‘세이브 포인트’로 되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얼떨결에 얻게 된 군인 빌 케이지와 리타 브라타스키를 주인공 삼은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2014)가 ‘루프물’의 이러한 정의에 대한 전형적 예시일 것이다. 아무런 무장도 하지 못하고 인간 방패로 실전에 투입된 빌 케이지는 최초 죽음 이후 반복되는 하루를 통해 점차 살상 병기에 가까운 군인으로 변모한다. 영화 <소스 코드>(2011) 또한 군인 콜터 스티븐스가 열차 폭발 테러의 범인을 알아내기 위해 해당 열차에 탑승하고 있던 죽은 남성의 시지각 정보 조각에 ‘빙의’해 이를 반복적으로 학습하고 체험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8분이라는 짧고 제한된 시간 속에서 콜터 스티븐스는 때론 이라크전쟁 참전군인다운 인종차별적 사고에서 기인한 황당한 실수로 시간을 허비하기도 하지만 결국 수차례 열차 폭발 테러를 반복한(!) 끝에 진범을 추적하는 데 성공한다.
더 살아봤자 실망뿐일 ‘미래 없음’(No future) 시대의 장르일지라도 ‘루프물’의 주인공들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최적의 선택을 고심하며 나름의 자율성을 확보하려 분투한다. 이러한 자율성은 주로 ‘사이드 퀘스트’ , 즉 영화 혹은 게임의 목표인 ‘메인 퀘스트’에 수반되거나 혹은 그것과 아무 상관없는 일련의 행동 양식을 통해 실현된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빌 케이지는 반복되는 하루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행동 루트와 인명 피해를 가장 적게 낼 수 있는 시나리오를 고안하고 실행하며, <소스 코드>의 콜터 스티븐스는 이미 죽은 열차 안 인물들이 최대한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진짜’ 현실 속 아버지와 임무 지휘자 콜린 굿윈에게 메시지를 남긴다. 이 지면에서 길게 다룰 수는 없겠지만 무엇보다 주인공들은 자신들에 대한 그 어떤 기억도 축적할 수 없는 이성과 가망 없는 사랑에 빠진다. 이러한 강박에 가까운 (이성애적?) 습관의 생성과 유지를 통해 주인공들은 반복적인 시간 속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연속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주인공들이 가까스로 손에 쥔 한줌 자율성은 물론 ‘기특’하고 또한 안타깝다. 장르가 제공하는 환경 자체는 여전히 끔찍하기 때문이다. ‘루프물’의 조건인 특정 시간대의 강제적 반복은 ‘회빙환’ 장르와 달리 결코 즉각적 ‘사이다’, 즉 카타르시스를 약속하지 않으며 오히려 죽어도 죽을 수 없는 불사의 절대적 고독과 고통을 강화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결말에 이르러 주인공들이 마지막 ‘퀘스트’로서 무한루프라는 영원 회귀의 연옥적 순환로부터 최종적으로 ‘해방’ 되기를 택한다는 것은 결코 놀랍지 않다. 알다시피 ‘회빙환’ 장르에서 죽음은 ‘2회차’의 삶을 위한 기회이고, ‘루프물’에서 죽음은 ‘N트’를 통한 경험 누적을 위한 수단이다. 죽음은 개선 가능성을 내포한다. 하지만 그처럼 교환 가능한 가치를 창출하는 죽음의 반복은 또한 저주이기도 하다. <소스 코드>의 반전이기도 한 이미 죽은 콜터 스티븐스의 사지 없이 몸통만 남은 머리에 연결된 회로가 드러난 장면은 게임의 서사적 번역인 ‘루프물’이 원래 품고 있었던 문제인 “시신 경제”(영이, ‘게임과 시신 경제(Necronomics)’, 2025)의 한 측면을 폭로한다. 죽음마저 착취(혹은 반대로 낭비)되는 것이다. 죽음 없는 죽음의 장르를 거울 삼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미래 없는 미래를 본다. 무한루프의 연쇄를 끊어내고서야 가능한 주인공들의 ‘진짜’ 죽음이라는 결말만이 ‘루프물’이 우리에게 내리는 유일한 자비다. 불안을 배가할 뿐인 작위적 해피 엔딩을 한 꺼풀 벗겨낸 자리에 루프 노동을 끝낸 주인공들의 더미가 쌓여 있다. 그 광경은 어쩐지 아늑하다, ‘적폐’라 불려야 마땅할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