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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숙(리타)의 장르의 감정] 기후물(Cli-fi)이라는 허구 또는 미래, 그리고 그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이연숙(리타) 2025-03-26

<설국열차>

올해는 4월부터 11월까지 여름 수준으로 더울 거라는 뉴스를 봤다. 아니, ‘뜨거울’ 거라고 해야 할까. 몇년 전 유엔 사무총장은 이제 지구온난화의 시대가 끝났으며 ‘지구 열탕화’ (Global boiling)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성토한 바 있다. 아스팔트가 내뿜는 펄펄 끓는 열기를 견디며 길을 걷다 보면 사막화된 지구를 배경으로 행성적 단위의 대규모 멸종 이후를 묘사하는 <매드맥스> 시리즈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미래는 영화를 매개로 이미 현재에 편재한다- 혹은 반대로 영화가 미래를 현재로 불러들이는 영매이거나. 기후물(Climate Fiction, Cli-fi)은 이같은 현재와 미래의 상호피드백 관계를 토대로 최근 급격히 번성 중인 SF의 한 하위 장르다. 이 용어는 댄 블룸이 2011년 상업적으로 잘 풀리지 않았던 어느 소설의 홍보를 위해 처음 고안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후물은 “불타거나, 물에 잠기거나, 죽어가는” 지구 환경 속에서 소수의 인간들이 살아남으려 애쓰는 미래의 어느 한 시점을 “볼 수” 있게 하는 이야기로 정의된다. 사실 이러한 정의는 다소 모호한데 왜냐하면 종말을 앞둔 인류의 미래를 다루는 전통적인 두 장르, 즉 (포스트)아포칼립스물과 재난물과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신생 장르가 그러하듯 기후물 역시 ‘선배’ 장르의 리브랜딩에 불과하다. 하지만 반복은 필연적으로 차이를 낳는다. 이를테면 기후물은 일종의 교육 매체다. 매해 기록을 경신하는 폭염과 한파, 예측할 수 없는 태풍과 폭우와 같은 이상기후를 온몸으로 체감하는 관객이라면 기후물로부터 현재에 대한 긴급한 경고를 수신할 것이다. 핵전쟁, 소행성 충돌, 좀비 사태, 전염병 창궐, 외계인 침공과 같은 종말론적 시나리오를 다룬 (포스트) 아포칼립스물과 달리 기후물은 단지 지금처럼 지속한다면 피할 수 없는 치명적 결과를 시각적 비전으로 제시할 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알다시피 그 결과는 인종, 계급, 젠더, 국적에 따라 매우 불평등하게 분배된다. <기생충>(2019)은 갑작스러운 폭우로 반지하 집이 물에 잠겨 이재민 대피소에서 밤을 지새우는 주인공 가족, 그리고 고급 단독주택에서 ‘미세먼지 제로’인 ‘완전 파란 하늘’을 아무 걱정 없이 즐길 수 있는 부자 가족을 대비해 보여준다. 기상이변은 결코 평등한 재난이 아니다. 로리 파슨스는 <재앙의 지리학>에서 부유한 국가들이 가난한 국가들에 계속해서 탄소 배출을 ‘수출’하는 이상기후 붕괴는 가속될 수밖에 없다며 다음과 같은 수사적 질문을 던진다. “만일 한곳이 깨끗하기 때문에 나머지 한곳이 파괴된 것이라면? 만일 한곳이 안전하기 때문에 나머지 한곳이 위험해진 것이라면?” 이건 허구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진단이다. 기후물이 묘사하는 미래 또한 누군가에겐 이미 현재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먹고 마시고 자는 최소 생존 행위에 있어 계급 불평등을 다루는 기후물은 <기생충>뿐만이 아니다. 같은 감독의 전작인 <설국열차>(2013)에서도 꼬리칸에 배급되는 식량인 ‘단백질 블록’과 머리칸의 호사스러운 스시 오마카세가 교차되고, 기후물의 정전이라 부를 수 있을 <소일렌트 그린>(1973) 역시 영화의 반전을 담당하는 사각 ‘플랑크톤’ 초록비스킷과 고기, 야채와 같은 ‘자연’ 재료가 극적 대비를 이룬다.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결코 상상하고 싶지 않은 미래다. 하지만 기후물은 어떻게든 그런 추상적인 미래를 구체적인 감정과 감각으로 상상할 수 있게끔 만든다. 이는 교육매체로서 훌륭한 성과일 수 있다. 대체로 관객은 기후물로부터 그레타 툰베리가 한 연설에서 주장한 것처럼 공포와 불안, 체념과 우울을 배우겠지만 드물게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와 같은 작품을 통해 희망을 포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과 허구는- 현재와 미래처럼- 서로를 재현하고 재생산한다. 언어를 바이러스라 주장한 윌리엄 버로스의 관점을 따라 말하자면 현실에서 배양된 허구는 현실에 잠복하며 현실을 변형시킨다. 이게 당장 주어진 조건을 초월해 앞으로 지향해야 할 ‘급진적희망’(Radical Hope)을 품어야만 하는 유일한 이유다.

그런데 종종 기후위기 문제에 경각심을 주려는 감독의 의도가 때로 지나쳐 비극적인 사물로 승화되고 마는 기후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앞서 잠시 언급한 <매드맥스> 시리즈 중 일부인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와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2024)가 대표적인 예다. 이 영화가 제공하는 시각적 ‘체험’에 대해서는 불평할 게 없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기후 붕괴와 자원 고갈 앞에서 마치 자멸을 재촉하듯 폭력적 소진을 택하는 디젤 펑크 스타일의 남성 우월주의 집단만이 오히려 생존할 수 있는 그런 세계관이 바로 그 ‘체험’을 위한 가장 완벽한 배경이기 때문이다.

<테넷>

<와이어드>의 존 샘리는 다음과 같이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를 논평했다. “기후물은 등장 초기에는 좋은 우화였지만 이제는 장르의 요구에 종속되었다. 붕괴되는 세계는 이제 매우 재미있는 액션신이 펼쳐지는 캔버스에 불과하다.” 기후물은 기후물이라는 장르의 ‘팔리는’ 요소를 유지하기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찾는 대신 더 크고 화려한 붕괴를 추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나쁜 예시가 있다. 기후 문제를 언급하되 정작 영화 속에서 기후 문제를 소외시키는 영화다. 바로 <테넷>(2020)이그렇다.

<테넷>은 엔트로피 역전을 통한 시간 여행의 개념을 영화언어로 구현하는 데에 주된 목적이 있는 영화지만 결말에 가까워지며 영화에 동원된 이 모든 서사가 실은 망가진 지구를 복원하고자 하는 미래세대의 계획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미래세대는 주인공 세대에 빼앗긴 몫을 돌려받기를 원한다. 한편으로 이는 정당한 요구다. 예컨대 지구가 제공하는 물, 공기, 토양과 같은 생태 자원의 양을 인류의 수요가 초과하는 시점을 ‘생태 용량 초과일’이라고 부르는데 한국의 경우 2024년에는 4월4일이었다. 4월4일 이후로는 주어진 양을 초과해 사용했기에 미래세대로부터 생태 자원을 무단으로 ‘탈취’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인공과 주인공의 친구인 닐은 이런 상황에 전혀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그냥 ‘일어날 일이 일어나게’ 할 뿐이다. 벤 로스는 <테넷>을 “반동적”이라 칭하며 심지어 이 영화가 현대 우파 정당과 같은 정신을 공유한다고 본다. 그 정신은 “본질적으로 변화와 맞서 싸우려는 충동”이다. 폭군 가부장이자 급진적 환경 운동가라 할 악역에 반대해 주인공과 그의 충실한 동료들은 ‘현상 유지’를 택한다. 그러는 동안 영화가 적으로 돌린 미래세대를 향한 부채는 점점 불어나고 있다,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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