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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믿음 너머, 직시하지 않을 때 더 또렷해지는, <계시록> 연상호 감독
이유채 사진 백종헌 2025-03-27

- 잘 믿는 편인가.

믿기로 결심하는 편이다. 의심만 계속하는 상태에선 진행이 안되더라. 답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 이젠 그냥 믿기로 했다. 다만 내 믿음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그럴 경우 책임을 진다는 태도로 뭔가를 믿는다.

- 그렇다면 희망이 있다고 믿나.

물론이다. 나는 엄청 낙천적인 사람이다. 주위에도 다 그렇게 얘기하고 다닌다. 비관적인 사람은 인디 애니메이션을 할 수가 없다. (웃음) 달리 말하자면 내가 하는 일에 분명 의미가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 “서로 연관성이 없는 정보들 사이에서 공통된 패턴과 의미를 찾는” 파레이돌리아는 믿음을 탐구해온 연상호 감독의 관심을 끌 만한 소재다. 이 심리적 현상이 <계시록>의 출발점일까.

복합적인데 예전에 다니던 개척교회에 목사님 한분이 있었다. 개척이 자신의 뜻대로 안돼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는데 어딘가에 몰려 있는 그 모습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그분과 원래 알고 있던 파레이돌리아를 연결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얘기를 최규석 작가와 처음 나눴던 때가 2021년, <지옥> 시즌1이 나온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한 호흡으로 만들고 싶었고, 그 정도의 길이가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처음부터 영화로 만들자고 생각했다.

- 포스터에서 눈길을 끄는 건 오른쪽 상단에 적힌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 알폰소 쿠아론’이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어느 단계부터 참여했고 어떤 의견을 주었는지 궁금하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제작사가 내 미국 에이전시에 연락을 준 게 시작이었다. 한국어 영화라도 내 작품에 함께해보고 싶다는 의견을 그가 주었다고 하더라. 마침 <계시록>이 어떻게 글로벌 관객도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될지 고민하던 시기라 반가운 마음으로 대본을 보냈다. 대화를 나눌 때면 그는 내 생각을 듣고 싶어 했다. “그래서 <계시록>으로 펼치고 싶은 비전이 무엇인지”를 항상 물었는데 그 과정에서 명확한 방향성이 생겼다. 편집본과 음악, 예고편까지 일련의 결과물이 내 첫 비전과 부합하는지 계속 확인해주었다고 알고 있다.

- <계시록>은 권양래(신민재)가 여중생 아영(김보민)을 뒤쫓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가 악인이라는 계시처럼 보이는 오프닝 시퀀스다.

명확한 답을 낼 수 없는 질문들을 초반에 던져놓은 뒤 시작하고 싶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소녀를 따라간다는 게 분명히 보이는 장면에 이어서 권양래의 전자발찌 장면을 통해 관객은 그가 악인이라고 명백하게 믿게 된다. 그 뒤로 성민찬 목사(류준열)의 아이가 실종된 것 같을 때 권양래를 의심하는데 결국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한번의 트위스트가 발생한다. 그렇다고 해서 권양래가 나쁜 놈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그가 다른 아이를 납치하면서 사건은 복잡해지고 두 번째 트위스트가 생긴다.

- 성민찬과 권양래 그리고 이연희(신현빈)는 믿음의 삼각구도를 이루는데 각자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하고자 했나.

옳든 그르든 자기 신념을 유지하는 사람, 그 신념 때문에 파멸하는 사람, 신념에 변화를 맞는 사람의 관계를 구상했다. 성민찬은 처음 권양래에게 교회는 죄지은 사람들이 오는 곳이라며 품 넓고 이치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처럼 군다. 그렇지만 아이가 없어진 상황에서 천장에 고인 물방울이 막 프린트된 권양래의 사진에 정확히 떨어지자 그걸 일종의 계시라고 믿고 즉각 그를 의심하는 태세를 취한다. 성민찬은 그렇게 상황에 따라 믿음을 바꿔버리는 인간이라는 걸 살리고 싶었다. 반면 권양래는 마지막까지 참회 없이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이연희는 권양래가 어떤 식의 사연을 가진 사람이라는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는 인물이다. 그랬지만 결국 그의 내면을 파고들어가길 택하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이야기가 추구하는 바를 내포했다고 볼 수 있다.

- 계시의 형상화를 <지옥>과 <계시록>을 비교해서 보면 흥미롭다. 지옥 사자들은 형체가 분명한 반면 민찬이 보는 신의 모습은 매우 불명확하다.

계시적 현상을 비주얼 작업할 때 어느 정도로 구체적으로 갈 것인가가 핵심적인 이슈였다. 관객이 보면서 ‘저게 뭐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자기 상상을 덧대기 좋은 정도였으면 했고 그러기 위해선 명확해서는 안됐다. 얼룩진 권양래 사진은 여러 가지였는데 결과적으로 그냥 얼룩진 것 같으면서도 어떻게 보면 악마처럼 보이는 정도의 버전이 들어갔다. 촬영할 때 이런 점이 재밌었다. 창과 액자의 포커스를 또렷하게 맞추면 그건 그냥 창과 액자인데 흐릿하게 처리하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있는 그대로를 명확하게 보지 않았을 때 더 또렷하게 보이는,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 “우리 보이는 것만 봅시다”라는 권양래 담당의(김도영)의 대사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이 대사는 믿음의 객관성을 가지라는 말과 일맥상통할 텐데 알다시피 인간이란 완벽하게 객관적인 시선을 가질 수 없는 존재다. 다만 무엇이든 다각도로 보려고 노력할 때 그에 근사한 시선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긴 필모그래피에 사극이 없다는 점이 흥미롭다. 먼 과거를 배경으로 상상력을 펼치는 데엔 구미가 당기지 않나.

앞으로도 사극을 만들 일은 없지 않을까 싶다. 보조출연자, 예산, 날씨까지 현실적으로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다. 사극은 아니지만 이번에 만든<얼굴>에 시대극 요소가 있다. 1970년대였는데 그 정도까지는 괜찮았다.

- <서울역> <부산행> <반도>까지 한국 배경이 두드러지는 작품을 만들어왔다. 외국을 무대로 한 연상호 작품을 볼 가능성은 얼마나 있을까.

내가 각본을 쓴 <가스인간>이 일본 배경이다. 넷플릭스재팬에서 촬영 중인데 막바지로 알고 있다. 일본 프로듀서와 소통을 계속하긴 했지만 기존 대본 작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몇년 전 인터뷰에서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준 뒤 작업실로 가 9 to 6 생활을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여전히 규칙적으로 작업하나.

촬영 때 빼면 여전히 그렇게 지낸다. 달라진 게 있다면 아이가 4학년이라 아빠가 데려다주는 걸 싫어한다. (좌중 폭소) 언제까지 데려다줄 거냐고 그래서 요즘은 집 앞까지만으로 자제하고 있다. 아이를 배웅하고 바로 집 근처 작업실로 향한다. 그리고 정확히 6시까지는 아니고 5시 반부터 슬슬 갈 준비를 한다.

- 마지막으로 엉뚱한 질문을 하자면 연상호 감독 작품이 내게는 포옹하는 이미지로 남아 있다. 떨어지는 루미(심은경)를 들어 올리는 석헌(류승룡)의 공중 신(<염력>), 튼튼이를 살리기 위한 영재(박정민)와 소현(원진아)의 마지막 선택(<지옥> 시즌1), 방 밖으로 나가기 전에 혜진(김현주)이 재현(오은서)을 꽉 안아주고(<지옥> 시즌2), 트럭을 탈출한 민정(이정현)이 자기 아이들을 품에 안는 순간(<반도>), 서현(강수연)과 22호(김현주)가 볼을 부비부비하던 모습(<정이>). 그리고 <계시록>에도 뭉클한 포옹이 있다. 이러한 포옹 신을 떠올리면 어떠한 생각이 드나.

당장 생각나는 건 집에 들어갔을 때 아이들이 뛰어나오는 모습이다. 그 순간이 내겐 소중한 일상인데 가끔 아이들이 놀러가 그런 장면이 펼쳐지지 않을 때 어떤 불안감과 쓸쓸함을 느낀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은 다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고 연결되기를 원한다. 그러한 인간의 본성에 여전히 관심이 많기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작품을 계속 만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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