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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마지못해 살아가는 이의 의지, <계시록> 배우 신현빈
이유채 2025-03-27

형사 이연희(신현빈)의 삶의 동력은 죄책감이다. 5년 전 납치됐다가 가까스로 탈출했던 동생 연주(한지현)가 목숨을 끊자 동생을 구하지 못했다고 자신을 책망하며 살아간다. 연주를 납치했던 권양래(신민재)가 출소한 뒤부터는 그를 지켜보는 일로 겨우 버티던 연희에게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긴다. 여중생 실종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권양래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번에는 반드시 구하겠다는 마음이 솟구친다. <계시록>의 신현빈은 불붙은 신문지 같다. 버석하게 시작해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다. 그늘진 역할을 다수 맡아오며 인물의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볼 줄 아는 눈이 생겼음에도 신현빈은 이연희가 쉽지 않은 캐릭터였다고 말한다. 세밀하게 표현 강도를 조절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고생 끝에 새로운 자신의 얼굴을 발견했다고 신기해하던 신현빈의 표정에는 앞으로 더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 연희는 죄책감이 만들어낸 동생의 환영과 환청에 잠식된 인물이다. 촬영하는 동안 악몽에 시달리진 않았나.

그렇진 않았는데 힘들긴 했다. 보통 어두운 작품을 하면 좀 차분해지고 밝은 작품을 하면 업된다. 그만큼 작품 분위기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라 <계시록>을 하는 동안에는 일상에서 나도 모르게 연희의 괴로운 감정이 불쑥 올라오곤 했다. 연희가 동생의 악몽을 꾸는 신이 내 첫 촬영이었는데 그런 하드한 감정 신을 중간중간 겪다 보니 더 그랬던 것 같다.

- <계시록>이 이연희 역할을 맡는 배우에게 주는 계시가 있다면 아마 이것일 거다. ‘너는 찍는 동안 고통스러울 것이다.’ (웃음) 고생길이 훤한데도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이야기가 가진 힘을 느꼈다. 연희뿐만 아니라 권양래, 성민찬 목사(류준열)까지 모두가 어떤 걸 믿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맞닥뜨리는데 그들 각자의 선택이 다 다르다는 게 재밌었다. 특히 사적 복수라도 해야 한다는 믿음과 끝까지 정의와 도덕을 붙잡아야 한다는 믿음 사이에서 후자의 옳은 선택을 하는 연희가 흥미로웠다. 어떻게 보면 연희는 피폐 전문이라는 말을 듣는 내게 익숙한 캐릭터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연희는 스스로 키운 고통을 해소할 생각 없이 떠안고 살기로 자처한, 아주 안쓰러운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동안 내가 맡았던 캐릭터들과 결이 달랐다.

- 연희는 <새벽 2시의 신데렐라>의 세련된 하윤서 팀장에 비하면 초라하고 세상 바쁜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장겨울 선생보다도 더 지쳐 보인다.

기본적으로 마지못해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였으면 했다. 여러 번의 헤어 커트와 펌, 가발 테스트를 거쳐 대충 자르고 기르다 만 쇼트커트를 완성했다. 피부의 거친 질감을 원해서 맨얼굴에 주근깨를 심고 다크서클을 강조했다. 입술에 립밤 한번 바른 적도 없었다. 감정이 피부로 그대로 올라오는 내 맨얼굴을 모니터링하는데 확실히 보통 때와 달라 신기했고 거기서 오는 힘이 있어 연기적으로 얻은 게 있다. <계시록> 시작부터 연희의 얼굴이 된 건 아니었다. 초반에 테스트 촬영을 하는데 <새벽 2시의 신데렐라>를 끝낸 직후라 사람이 생기가 있고 묘하게 웃는 상이더라. 그 차이가 보이니까 한동안 써왔던 얼굴 근육을 달리 써보고 표정도 바꿔가며 밝은 기운을 빼나갔다. 나중에 본촬영할 때 지금이 더 나은 것 같다는 얘기를 프로듀서님에게 들은 적 있다. 그때 “그럼 됐습니다”라고 답하면서 속으로 얼마나 안심했는 줄 모른다.

- 과거 재판 신에서 권양래를 동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연희는 “도대체 왜 저런 사람한테 이유를 만들어주냐”고 소리친다. 적당한 감정을 분출하기 위해 어떤 준비 과정을 거쳤나.

리허설 때는 최종보다 더 세게 갔었다. 그런데 감독님과 얘기할수록 연희는 이렇게까지 강도 높게 자기표현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허설대로 가면 전체적으로 놓고 봤을 때 이 신이 너무 튈 거라는 판단도 있었다. 그래서 감정을 누르는 쪽으로 톤을 조절했다. 심각한 신이지만 현장은 화기애애했다. 신민재 배우랑 “어때? 이 정도면 화난 것 같아?” “그럼, 충분해” 같은 말을 주고받으면서 모니터링을 하곤 했다.

- 연희는 “권양래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권양래 담당 정신과 전문의(김도영)를 찾아간다. 자기 의사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면서 연희가 처음 번뜩이는 순간이다.

여러모로 아주 중요한 신이었다. 여기서 연희는 처음으로 일상에서 타인에게 속내를 드러낸다. 동시에 외면해왔던 게 있다는 걸 인정한다. 인간적으로 배려받기도 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드라 여기서 감정을 어느 정도까지 펼칠지를 고민했다. 안 끊고 길게 가는 신이었는데 찍는 동안 감정이 쌓이고 점점 몰입돼 놀라기도 했다. 의사 캐릭터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보는 동안 그가 미워 보일 수 있다. 그렇다는 건 그를 나쁜 사람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 때문일 수 있다. 그렇지만 사실 그는 전문의로서 소견을 밝힌 것뿐이다.

- 무언가 붙잡을 게 필요할 때 어디에 기대나.

복잡한 마음이 도무지 정리가 안될 때 숲으로 혼자 여행을 간 적 있다. 거대한 자연 안에 들어가니 내 문제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일어나서 밥 먹고 한동안 걷다가 들어와서 책을 읽었다. 그렇게 단순한 하루를 반복하면서 나를 비워나갔다. 나에게만 집중한 시간이 나를 강하게 만들어준다는 걸 알고 난 뒤부터는 작품 사이사이에 ‘비움 여행’을 떠나고 있다.

- 최근 연상호 유니버스에 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하고 있다. <얼굴>을 마쳤고, 얼마 전에 <군체> 촬영을 시작했다고.

<얼굴>은 그동안의 연상호 감독님 작품과는 분리해서 봐야 할 영화라고 생각한다. <군체>에서는 연희보다는 덜 퍼석하게 나온다. 연상호 감독님 현장이 참 좋은 게 배우에게 많이 맡기면서도 명쾌한 답변을 주신다. 대사를 다양하게 바꿔보는 편인데 감독님이 대사 수정을 오케이해주셔서 많은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하도 여러 버전을 준비해 뭐가 맞는지 헷갈릴 때면 감독님이 딱 하나 골라주셔서 정말 편했다. 자유로우면서도 보호받는 현장 덕분에 연상호 감독님과 계속 작업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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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