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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섬 오브 올 피어스>등 9 · 11 테러 이후 쏟아진 전쟁영화
2002-07-15

할리우드, 펜타곤과 함께 춤을?

짐 호버먼/ 영화평론가·<빌리지 보이스>

모가디슈에서 아이드랑 계곡을 거쳐 볼티모어의 도심까지, 파괴의 잔해들과 미국 병사들의 시체들로 어지러운 포연 가득한 전장의 풍경을 보라. 지난 22주간의 미국 박스오피스에서 전쟁 대작들이 전체 1위나 2위를 차지한 것이 무려 7주간이나 된다. <블랙 호크 다운> <위 워 솔저스> <더 섬 오브 올 피어스> 같은 영화들에 사실상의 전쟁영화로 처음부터 끝까지 시체 수 세기에 여념이 없는 <콜래트럴 데미지>나 <스타워즈 에피소드2: 클론의 습격>까지를 더한다면, 적어도 영화계에 있어서 2002년은 가히 학살극의 전성기라고 할 만하다. “반드시 아군을 구출하라”는 <블랙 호크 다운>에서의 명령처럼 지난주 흥행에서 <스쿠비 두>에 밀린 <윈드토커>를 구출하기 위해 더 많은 수의 전쟁 대작들이 뒤를 잇고 있는 형세인 것이다. 2차대전물의 계보를 잇는 <투 엔드 올 워즈>, 외계와의 전쟁이라 할 <맨 인 블랙2>, 냉전시대 핵잠수함 드라마로 돌아간 <K-19: 더 위도메이커>와 <비로우>, 남북전쟁 이야기의 부활이라 할 <가드 앤드 제너럴즈> 등의 영화가 대기하고 있다.

전쟁영화, 신났네

80년대 후반에 들이닥친 베트남전 영화의 열풍 이후 전쟁영화가 이렇게까지 대량으로 양산되고 또 수지가 맞은 적은 없었다. 그리고 레이건 행정부 시절의 <람보>나 <탑건> 같은 막가파 저급 전쟁물 이래로 정계의 거물들이 전쟁영화의 제작에 이렇게까지 협조적이고 기꺼워했던 적도 없는 것 같다. 국방장관 럼스펠드가 개인적으로 관여한 덕에 영화 <불랙 호크 다운>의 제작을 위해 사상 최초로 미군이 외국에 파병되기까지 했는데, 부통령 딕 체니는 업무 수행 중 모처에서 급히 돌아와 럼스펠드와 함께 워싱턴에서 있었던 대규모 시사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위 워 솔저스>나 <더 섬 오브 올 피어스>도 비슷한 방식으로 “국가 공식예술” 대접을 받고 있다. 조지 부시 대통령, 럼스펠드, 콘돌리자 라이스, 칼 로브 등의 행정부 요인과 주요 국방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위 워 솔저스>의 백악관 시사회는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는데 한 보좌관에 따르면 부시 대통령은 이 영화를 “폭력적”이지만 “좋았다”라고 평했다고 한다. <더 섬 오브 올 피어스> 역시 워싱턴에서 첫 시사회를 가졌는데 파라마운트 제작진은 CIA와 국방성이 전례없이 자료협조와 촬영지원을 제공해주었음을 언론매체에 환기시키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TV 프로그램들을 논외로 하면, 이번 봄에 개봉된 영화들은 사실 모두가 지난해 9·11 테러사건 이전에 기획된 것들이다. 이 영화들은 뉴욕과 워싱턴에서 있었던 항공기 테러사건이나 부시 대통령의 테러와의 전쟁 따위에서 촉발된 것이라기보다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대단한 흥행성적에 고무되어 기획된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르윈스키 스캔들로 말도 많고 탈도 많던 98년 여름 시즌에 한달간 박스오피스 정상을 지키며 모두 2억1600만달러를 벌어들였는데, 당시에는 클린턴 대통령 역시 자신이 사랑(?)만 할 줄 아는 게 아니라 싸울 줄도 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할리우드와 국방성이 노골적으로 동침에 들어간 것은 지난해 가을 이후의 일이지만 서로간의 구애행위가 시작된 것은 클린턴 행정부 시절로 거슬러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한 듯하다. 지금 할리우드의 파이프 라인을 따라 떠도는 프로젝트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말하자면 제리 브룩하이머가 오랜 세월 준비해온 <제3차 세계대전> 같은 영화) 구소련의 주석이었던 흐루시초프가 자신의 과학자들이 고안해내는 “가공할” 계획들의 결과를 상상하며 스스로 벌벌 떨곤 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떠올리게 된다.

테러를 예견하고 핵전쟁을 예언하다?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아니면 최소한 브룩하이머나 작가 톰 클랜시의 불가사의한 예지력에는 참으로 경탄을 금할 수 없다. 브룩하이머의 <진주만>은 지난봄 모두 2억달러를 벌어들였는데 9·11 사건을 겪고 난 이 시점에서 영화 <진주만>이 정말로 예언적이었다고 느껴지는 것은 이 영화가 초대형 역사물과 블록버스터 재난물을 성공적으로 버무려냈다는 점이다. 브룩하이머판 예술영화라고 할 수 있는 <블랙 호크 다운>(리들리 스콧 감독)은 미국민들의 새로운 호전적 정서를 흥행에 이용하기 위해 12월에 서둘러 개봉했고, 이어서 각지의 미군 기지에 비디오로 즉시 보급되었다. 소말리아인들의 포화 속에 포획된 미군 병사들에 대한 이 노골적인 전쟁 스펙터클은 지난해 겨울 내내 미국민들에게 일종의 심리적 가상전투로 효과적으로 역할을 수행해온 셈이다. <블랙 호크 다운>은 미국민의 애국심을 자극한 반면 유럽인들의 조소를 자아냈고, 아프간에서의 미군의 참패가 정말 벌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반전 시위를 유발하기도 했다(사실 아프간에서의 전투 상황은 과거 “사막의 폭풍 작전” 때만큼 외부에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영화의 시나리오가 오히려 실제 상황을 구조화하고 규정하는 셈이다. 브룩하이머는 <탑건>의 공동 제작자로 참여하기도 했는데 역사학자 로렌스 H. 수이드는 이 영화를 할리우드식 미군 이미지의 회귀라고 평가한 바 있다.

톰 클랜시는 군사적 상황 설정에 관한 한 가히 호메로스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클랜시의 1994년 작품 <적과 동지>는 테러리스트들이 납치한 비행기가 합동총회가 진행중인 국회의사당에 충돌하면서 미 정부 전체가 일거에 제거되어버린다는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예언적 내용으로 인해 작가는 9·11 당일 오후 무렵에는 이미 이 희대의 사건에 영감을 준 테러분야의 최고 권위자나 사전설계자격으로 인식되었다. 클랜시의 초기작을 각색한 <더 섬 오브 올 피어스>는 해묵은 카슈미르 분쟁이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핵전쟁을 유발할 수 있다는 국제사회의 팽배한 긴장감 속에서 개봉됐는데, 미국 본토에서 핵폭탄이 터진다는 설정을 통해서 60년대 이후 영화계에서 다소 잠잠했던 핵전쟁이라는 소재를 다시 부활시켰다.

할리우드는 전쟁준비 끝!

은폐와 회피로 점철된 위기의 케네디 행정부 시절에도 (어느 정부 부처의 지시에 따라야 할지, 즉 대통령의 편을 들어야 할지 국방부의 편을 들어야 할지는 불확실했지만) 할리우드는 언제든지 전쟁에 돌입할 준비가 된 듯이 움직였다. 당시 국방부는 컬럼비아에서 제작하는 핵전쟁영화 <페일 세이프>에 대한 협조를 거부하거나, (스타-제작자였던 커크 더글러스에 따르면) 당시 케네디 대통령 자신이 제작을 지지했음에도 파라마운트에서 제작하는 군사 쿠데타영화 <세븐 데이 인 메이>에 대한 지원을 거부한 바 있다.(<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제작진은 이런 비현실적 요청을 할 만큼 물정을 모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한편 핵전쟁을 다룬 앞의 두 작품이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한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21년간 공군에서 폭격기 조종사로 재직한 바 있는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프로듀서 시 바틀렛을 독려해서 1963년에 <게더링 오브 이글즈>를 만들게 한 바 있다. 이 영화는 공군전략지휘본부에 헌정되었는데 록 허드슨이 광적이리만큼 콧대가 센 부대 지휘관으로 출연했다.

사실 이 작품이 공군전략지휘본부가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제작을 이끈 첫 사례는 아니다. MGM의 1952년작 <어바브 앤드 비욘드>는 히로시마에 폭탄을 투하한 조종사 폴 티베츠 대령의 이야기를 다루었고 <타임>이 “날아오르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모병 포스터”라고 묘사한 바 있는 파라마운트의 1955년작 <공군전략지휘본부>는 장엄한 오르간 음악의 울림 속에서 최신 B-47 폭격기의 위용을 선보였다. 르메이 장군은 영화 <공군전략지휘본부>의 제작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극장주들에게 군악대 연주와 극장 로비에서의 무기 전시회 등을 제공함으로써 작품의 홍보에도 참여했다. 좀더 무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워너브러더스의 1957년작 는 당시 소련의 스푸트니크호 발사로 인해 다소 무색해지기는 했지만 유사한 방식으로 공군전략지휘본부의 최신 무기류를 전시하기도 했다.

<더 섬 오브 올 피어스>는 결코 위의 영화들과 같은 위안을 제공하지 않는다.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한 이 영화의 개봉을 일주일 앞두고 <뉴욕타임스 매거진>은 커버스토리를 통해 미국의 도시 어딘가를 강타할 핵테러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는데, 빌 켈러의 이 가공하리만큼 운명주의적인 “핵 악몽론”에 따르면 핵테러는 “만약이 아니라 언제인가가 문제”이며 방사능 먼지 폭탄의 설치는 “아이들 소꿉장난만큼 쉬운 일”이라는 것이다. <더 섬 오브 올 피어스>는 거의 모든 미국 정부 각료가 슈퍼 볼을 관전하고 있는 캄덴 야드 경기장에서 방사능 확산 무기가 터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친절하게도 직접 화면으로 보여준다. 사실 이 영화는 본토 방어를 고취하기 위한 최고의 선전물이다. 얼굴에 응원 문구를 그려넣은 치어리더들처럼 멍청하기 짝이 없는 미국민들이 곧 화장터로 직행할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서 바보스러울 만치 무지함을 보여주는 표독스러운 몽타주 장면은 가히 광적으로 느껴진다.

리얼한, 너무나 리얼한 핵전쟁

핵전쟁을 상상하는 것은 “생각해낼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더 섬 오브 올 피어스>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이런 핵전쟁의 모습을 직접 목도하게 된다는 점이다. 소용돌이치는 충격파와 내동댕이쳐지는 자동차, 곤두박질치는 비행기와 한때 볼티모어라고 불렸던 곳에서 피어오르는 거대한 검은 버섯구름, 이 백광의 방사능 지옥의 언저리에서 살아남은 주인공들이 고군분투한다. <더 섬 오브 올 피어스>가 2주째 박스오피스를 장악하고 있을 무렵 미 세관당국은 뉴스 컨퍼런스를 자청해 자신들의 폭발물 검색 능력을 시연해 보여야만 했다. 한편, 크리스 록 주연의 <배드 컴패니>가 코미디 버전의 방사능 테러영화를 선보이며 연이어 개봉했고 터너 클래식 채널은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페일 세이프> <차이나 신드롬>의 옛 핵전쟁영화 세편을 묶어 시의적절하게 방영했다.

국방성의 전략조정실은 해외 언론에 허위 정보를 유포한다는 공식적으로 천명된(?) 그들의 의도를 아마도 철회해버린 모양이다. 대신 작금의 상황은 마치 워싱턴과 할리우드가 서로 큐 사인을 주고받는 모양새다. 법무장관 애슈크로프트는 <더 섬 오브 올 피어스>가 두 번째 주에도 흥행세를 이어가자 다음주 월요일 아침에 맞춰 FBI와 CIA의 연합작전으로 브루클린 태생의 호세 파딜라로 알려진 압둘라 알 무하지르를 체포했다고 당당하게 발표했다. 영화 <더 섬 오브 올 피어스>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과 똑같이 동부 도시 일대에 방사능 폭탄을 터뜨리려는 알카에다 조직의 음모를 교사했다는 것이 그의 죄목이었는데 파딜라는 그가 시카고에 도착한 즉시 체포되어 이미 군 형무소에서 한달째 구금된 상태였다. 법무 관은 이번주에도 <마이너러티 리포트>의 개봉을 통해서 또 하나의 시의적절한 큐 사인을 할리우드로부터 접수할 것으로 보인다. 필립 K. 딕이 1956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을 각색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이 새로운 공상과학영화는 범죄자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이전에 미리 그들을 체포해버리는 미래의 경찰 이야기다.

영화를 위해서라면, 3차대전도 발발?

애슈크로프트가 파딜라의 체포를 발표할 때 모스크바에 있었다는 사실은 <더 섬 오브 올 피어스>에서 미국과 러시아가 최후의 순간에 협력해 서로를 구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물론 이와 같은 공조의 원칙이 지금의 이스라엘과 그들의 이웃나라들이나 미국과 이라크, 혹은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브룩하이머의 스펙터클 대작 <제3차 세계대전>을 위해 깜짝 선물로 제3차 세계대전이 실제 발발할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 리얼리티 재난극이 방송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번역 권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