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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한 행랑채살이!
2002-07-18

조선희의 이창

84년 봄의 어느 날 청량리 성바오로병원에서 사체부검이 실시됐고 사건기자였던 나는 부검실 바깥에 있었다. 부검이 끝나고 문이 열리자 국과수의 부검의가 핏자국으로 얼룩진 흰가운을 입고 걸어나왔고 그뒤를 늙은 여자가 자지러질 듯 울부짖으면서 따라나왔다. 권투선수가 링에서 쓰러졌고 뇌에서 수종이 발견됐다고 했는데, 웬일인지 나는 지금껏 그것이 김득구였고 늙은 여자는 김득구 어머니였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소문을 듣자 감회가 서늘했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구나. 벌써 20년전이야.’

하지만 영화 <챔피언>을 보면서 김득구가 82년 11월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혼란스러웠다. 기억이라는 게 원래 장난이 심하지만 왜 그런 조작이 일어났을까. 나는 나름대로, 어떤 무명의 권투선수가 링에서 죽었던 것이라고, 그리고 그 선수를 비교적 가까운 과거의 김득구 사건과 결부시켜 기억했던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무명의 또 다른 김득구에 대해 잠시 묵념.

나는 <친구>를 보고 곽경택 감독이 유능한 감독이라는 사실을 다소 떨떠름한 기분으로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챔피언>을 보면서 그가 좋은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는 우리 모두의 뱃속 깊숙이에서 용틀임하는 허기의 황폐함, 뇌세포와 혈관이 으깨어지는 줄도 모른 채 스스로를 코너로 몰아가는 욕망의 비정함, 그런 것들을 들여다본 건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최후까지 싸울 용기와 의지가 있노라.’ 김득구 일기에 들어 있다는 이 말은 그 비정함으로 모골이 송연해진다.

나는 <친구>에 대한 과도한 환대에 비해 <챔피언>을 푸대접하는 우리 시대 대중에 대해 속이 불편하다. <챔피언>이 <친구>에 비해 밋밋하다는 관전평들인데, 얼굴이 피떡이 되어 링 위에 천천히 쓰러지는 헝그리 복서의 내면에서 ‘챔피언이 안 되면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메아리치는 무자비한 승부욕이 아마도 좀 밋밋했던 모양이다. 적어도, 깡패가 검술훈련용 허수아비처럼 사시미칼로 수십번 배를 찔리고도 아직도 폼은 남아서 “마이 뭇다”라고 말하는 정도는 돼야 짜릿한 모양이다. 선악의 대결도 불분명하고, 화끈한 악당도 없고, 음모나 살인도 안 나오고, 그러니 흥행이 되겠냐, 그런 얘기겠지. 어쨌든 나는 <챔피언>을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불만사항만 빼면.

한 가지 불만사항이란 이 영화에서 여자주인공의 ‘포지션’이다. 장르영화들이 여자를 다루는 방식은 주로 세 가지다. 관음증의 대상이거나, 희생적이고 의존적인 모성이거나, 남자주인공을 보조하는 인물로서 천사 또는 마녀이거나. 베드신이 없는 <챔피언>에서 김득구의 여자는 헌신적이면서 의존적인 모성인 동시에 천둥벌거숭이 남자에게 가정의 품을 만들어주는 천사다. 이 여인은 실제로 세숫대야에 물을 떠와서 김득구의 발치에 쪼그리고 앉아 발을 씻겨줬을지도 모른다. 안 씻겨줬다 해도 상관없다. 동거남이 세상을 떠난 뒤 영혼결혼식을 하고 유복자를 낳아서 키웠다면, 그런 비련의 여인에게 어울리는 삽화이기 때문이다.

남자의 시선에 찍히고, 남자의 손에 포획되고, 마침내는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비극적인 운명이 떠안겨지는 것. 유식한 말로 ‘타자’(他者)다. 내가 아니라 남이고, 주최쪽이 아니라 상대방이고, 보는 쪽이 아니라 보여지는 쪽이다. 김득구가 벽에 써붙여놓은 좌우명이 여실히 입증한다. ‘여자는 걸림돌’이거나 ‘여자는 디딤돌’이다.

<친구>나 <챔피언>이나, 전형적인 남자영화다. 남자를 위한, 남자에 의한, 남자의 영화다. 그러니 설령 감독이 여자주인공의 포지션을 아예 없애버렸다 해도 할말 없다. 곽경택 감독이 특별한 건 아니다. 한국영화가 여자를 다루는 방식이 대개 그 정도다. 여자들 포지션은 ‘행랑채살이’다.

하기야 개중에는 <피도 눈물도 없이>처럼 여자들이 크게 한탕하게 해주는 영화도 있긴 하다. 그러니까 행랑채붙이들도 운좋으면 간혹 훌륭한 주인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행랑채살이라는 게 원래 더럽고 치사하다. 여기가 맘에 안 든다구? 짐 싸! 억울하면 네 집을 사! 한국영화의 여자 캐릭터들이 지겨우면 직접 만들어보란 말이야!

‘카메라의 눈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고 예전에 김지하 시인이 말했다 한다. 카메라의 눈이 바뀌면 좋긴 하겠는데. 충무로 카메라의 눈이 90% 이상 남성의 것이니 어쩌나. 하는 수 없다. 카메라를 나눠달라고 하거나, 정 안 되면 훔치기라도 하는 수밖에.조선희/ 전 <씨네21>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