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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영화10 년,충무로의 빅뱅을 돌아보다(4)
2002-07-26

좋은 기획 있으면 소개시켜줘,제발!

그리고 10년

물론 90년대 중반 이후 이들 프로듀서가 주도한 작품을 ‘기획영화’라는 틀 안에 뭉뚱그려 바라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애초 이 용어는 제작사 외부의 기획전문사가 전담한 기획에 기반해 제작한 영화를 지칭하기 위해 쓰여졌기 때문이다. 치밀한 기획없이 진행되는 영화가 드문 요즘의 상황과 비교할 때, 기획영화라는 말이 통용되던 당시는 그만큼 기획이라는 과정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는 이야기기도 하고, 마케팅을 포함한 기획이 독자적인 영역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이 용어는 감독의 창작욕보다는 기획자의 상업적 의도를 출발점으로 삼는 영화라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이같은 기준에서 본다면 기획영화는 90년대 초반의 특정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영화나, 지난해의 <조폭 마누라> 같은 짧은 호흡의 트렌드성 영화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들 대다수가 대중과 호흡하고 접점을 넓혀나가면서 상업적인 성공을 일궈냄과 동시에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새로운 시도를 거듭해 한국영화의 지평을 넓혀나가려는 야심을 보였다는 점에서 90년대 초반의 기획영화에서 시작된 흐름을 이어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이런 비슷한 흐름 속에서 함께, 또는 따로 영화활동을 해왔으나 각 제작사는 프로듀서들의 성향에 따라 상대적으로 다른 노선을 전개해 나간다. 원조 기획자 신철 대표의 신씨네는 94년작 <구미호>를 위해 93년 당시 돈 7억원을 들여 컴퓨터그래픽 장비를 들여와 컴퓨터그래픽스라는 자회사를 차리는 등 테크놀로지에 대해 왕성한 관심을 보인다. 당시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시도는 2년 뒤 <은행나무 침대>에서 꽃을 피운다. 이토록 무모하다 할 정도로 첨단적인 것을 좋아하는 신씨네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면, <편지>나 <약속> 같은 다소 복고적인 코드를 담은 영화도 지속적으로 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들 작품 또한 뛰어난 기획력으로 흥행에서 성공했지만 말이다.

반면, 명필름은 안정적이고 짜임새 있는 기획을 통해 일정한 수준의 완성도를 갖춘 영화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한다. 특히 생경하지만 당대의 정서를 정확하게 포착한 새로운 멜로영화 <접속>, 할리우드 고전영화를 연상케 하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남북문제를 미스터리와 휴먼드라마로 엮어낸 <공동경비구역 JSA> 등은 명필름의 색깔이 짙게 묻어나는 작품들. 하지만 변종 장르영화인 <조용한 가족>이나 김기덕 감독의 <섬>,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 같은 대중보다 반 발자국 앞서 나가려는 시도도 계속해서 보여준다.

△ <비트><무사> 같은 싸이더스의 영화에선 남자

냄새가 물씬하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강조도 신씨네 못지 않아 <유령>이나 <화산고> 같은 작품을 낳았다.

<봄날은 간다> <플란다스의 개>처럼 강한 개성과 독특한 감수성이 스민 작품을 제작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싸이더스의 차승재 대표는 제작부 출신이라는 경력에서 보이듯, 대중의 흐름에 앞서 영화적 흐름을 선도하는 작품을 먼저 고려했다. 주요타깃이 아닌 남성적 감성의 영화를 여러 편 만들었다는 점도 특이한 점이다. <깡패수업> <비트> <태양은 없다> <유령> <킬리만자로> <무사>는 이같은 기획의 작품들. 물론 나 <플란다스의 개> 같은 독특한 감성의 감독 중심 영화 또한 그의 주요 메뉴였다. 한편 강우석 감독은 <투캅스> <마누라 죽이기> 등 대중과의 접점을 넓지만, 텍스트의 층이 그리 두텁지 않은 코미디를 추구해왔다. 하지만 <신라의 달밤>이나 <공공의 적> 같은 최근작은 한때 자칭타칭 ‘쌈마이 코미디’로 불렸던 장르에서 획기적인 자기혁신의 가능성을 현실화시켰다.

물론 이러한 기획영화라는 흐름은 비슷한 장르의 영화를 양산하면서 전반적인 작품의 질을 떨어뜨렸다거나 상업영화도 예술영화도 아닌 기형적인 ‘기획예술영화’를 낳았다는 일부의 비판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92년 이후 10년 동안 한국영화가 비약적인 성장하는 데는 이들 2세대 프로듀서들의 뚝심있는 기획과 제작이 가장 큰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런데 과연 2000년대에도 기획영화라는 단어가 필요할까. 현장의 프로듀서들은 기획영화라는 단어의 껍질은 없어지겠지만, 그 내용만큼은 계속 보존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지속적으로 관객의 생각과 호흡하고 눈높이에 맞도록 영화를 개발하는 일은 상업영화가 존재하는 한 이어진다는 얘기다. 또 하나. 한국영화의 주요 돌파구인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데 있어, 90년대 초반 기획영화의 흐름을 만들던 때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한국에는 현재 세계적으로 먹힐 배우도, 감독도 없고, 자본은 더더욱 그렇다. 결국 한국 안에서뿐 아니라 밖에서도 통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지속적으로 개발할 수밖에 없다”는 신철 대표의 이야기는 마치 90년대 충무로라는 상황을 2000년대 세계시장으로 치환한 듯한 느낌을 준다. 신씨네가 할리우드에서 디지털 기술로 이소룡을 부활시키는 프로젝트인 <드래곤 워리어> 작업을 시작한 것이나, 싸이더스가 중국, 일본, 홍콩을 분주히 뛰어다니며 <역도산> <시라소니> 같은 합작 프로젝트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점이나 명필름이 중국을 무대로 한 님 웨일스의 <아리랑>을 제작하려는 것 모두 이런 차원에서 출발한 현재의 기획영화라 할 수 있다.

과연 한국영화가 아시아 또는 세계관객의 눈높이에 맞는 영화를 만들어 성공을 거두게 될지, 그리하여 ‘글로벌 기획영화’라는 새로운 용어가 생길지 알 길은 없지만, 확실한 사실은 이미 이들의 세계시장을 향한 기획은 시작됐다는 점이다. 문석 ssoo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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