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사람들
<라이터를 켜라> 영화음악 맡은 가수 윤종신
2002-08-14

영화에의 접속,그 경쾌한 외도

“얻어 피운 한 가치 담배 속에서 내 하루 시작되고/ 그 한 모금이 내뿜는 연기 내 하늘을 덮네/

끊으라는 어머니 잔소리는 고마운 삶의 의미/ (중략) 매맞는 나의 청춘 짓밟힌 자존심을 단 하나 달래주는 건/ 참다 참다가 뒤돌아 서서

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담배 한 모금 저 하늘에 뿜는 순간.”

- <담배 한 모금>

처음, 혹은 첫 만남에는 늘 미묘한 긴장과 설렘의 줄다리기가 벌어지곤 한다. 음악을 업으로 삼은 지 어언 13년째, <라이터를 켜라>로 처음 영화음악에 접속한 윤종신씨의 작업도 그랬다. “내 얘기가 아닌 남의 얘기에 내 음악을 얹는” 과정은 다소 낯설었지만, “음악을 하면서 지휘를 받는 게, 따라주고 맞춰보는 재미”가 쏠쏠했던 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를 끌어내는 것만 하다가 음악적 감정을 집어넣는 대상이 확실히 보이니까” 재밌더라는 그의 말에는 새로운 과제를 마친 즐거운 흥분이 남아 있다.

지금보다 좀더 소년적인 미성을 들려주던 015B의 객원 보컬로 데뷔한 90년부터, 윤종신은 한결같은 목소리로 우리의 귓전에 머물러온 가수다. <너의 결혼식>이나 <오래전 그날>처럼 애잔한 발라드를 주축으로 <내사랑 못난이> 같은 발랄한 리듬을 섞어가며, 만남과 이별의 속내를 세심하게 드러내거나 지고지순한 사랑가를 들려주는 음악으로 주류 댄스가요와는 다른 줄기를 일궈왔다. 얼핏 멜로드라마에 더 어울렸을 법도 한 그가 ‘코믹액션’으로 영화음악에 입문한 것은 장항준 감독과의 인연 때문. 인터뷰 전날에도 늦게까지 술잔을 나누다 그 집에까지 갔었다는 장 감독과는 8년지기 친구 사이다. 라디오 DJ를 하던 95년, 장항준이 <격동 30년>의 패러디 형식으로 스타들의 개인사를 코믹하게 재구성한 코너의 게스트로 고정 출연하면서 가까워졌고, 1년간 룸메이트로 함께 살기도 했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장항준이 입봉하면 음악을 맡기로 의기투합한 것도, 이미 오래 전 약속인 셈이다.

감성적인 발라드로 윤종신을 기억하는 이들은 <라이터를 켜라>에 합류한 것을 의아히 여기기도 했지만, 정작 그는 “코믹액션에 남자영화”라는 게 더 좋았다고. 그날의 전 재산인 300원짜리 라이터에 목숨을 거는 백수 봉구의 서른 즈음, 약속된 돈을 받아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막 나가는 조폭 보스 철곤의 캐릭터, 두 남자의 이야기에서 느꼈다는 페이소스가 음악에서도 짙게 배어난다. 서글픈 하모니카와 선율이 처량함을 드러낸 두 사람의 테마곡이나 담배 한 개비를 위안 삼는 봉구의 무기력한 표정을 담은 <담배 한 모금>의 가사에서처럼. 또 “액션장면이라면 무조건 록음악을 많이 쓰는”것과 달리, “<더티 하리>에서 쿨한 재즈가 쓰인 것처럼 한국영화에서 안 해본 것을 하고픈” 욕심도 음악에 다양한 결을 불어넣었다. 철곤의 회상 속 액션에는 이주한의 트럼펫과 훵키한 베이스가 어우러진 재즈가, 몇번이고 덤벼드는 봉구 위로는 <수사반장> 타이틀의 모티브를 연상시키는 복고풍 선율이 흐르는 식이다.

유희열, 하림 등 적은 보수에도 힘을 모아준 지인들과 함께 O.S.T 작업을 마무리짓고, 지금은 11월경에 선보일 10집 작업에 한창. 9집의 <팥빙수>처럼 경쾌한 변신도 해봤으니, 새 음반에서는 다시 진한 발라드로 돌아갈 생각이다. 대학 후배가 프로듀서로 있다는 멜로드라마 <밑줄 긋는 남자>, 장항준의 차기작 <불어라 봄바람> 등 벌써 2편의 영화음악과 <순풍 산부인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의 김병욱 PD가 연출할 새 TV물의 음악작업도 대기중. “1, 2등의 경쟁이 아니라 부채살처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내 음악과 다른 음악들이 있다”는 오랜 길 위의 깨달음과 함께, 그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조급함 없이 자신의 음악을 들려줄 작정이다. 글 황혜림 blauex@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