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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르 쿠스투리차 감독의 <집시의 시간>
2002-10-02

꿈과 현실 사이

Time Of Gypsies 1989년, 감독 에미르 쿠스투리차 출연 보라 토도로빅 EBS 10월5일(토) 밤 10시

“내 영화를 볼 때 펠리니의 영화에서 그렇듯 캐릭터들이 흥미로운 존재로 비쳤으면 좋겠다.” 에미르 쿠스투리차 감독에게 <집시의 시간>이 중요한 영화임을 새삼 거론할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아빠는 출장중>이라는 소품을 만든 뒤 쿠스투리차는 <집시의 시간>(1989)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언더그라운드> 등을 만들었지만 쿠스투리차의 상상력은 대부분 <집시의 시간>을 원류로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의 특정 공간과 공동체에 관한 애정어린 묘사, 현실과 상상 사이를 오가는 독특한 시선은 쿠스투리차 영화의 특징으로 이야기된다.

가난한 집시인 페란은 할머니, 여동생과 함께 생활한다. 생계를 잇지 못할 수단이 없어 가족은 늘 빈궁하다. 병을 앓는 여동생을 치료하고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페란은 길을 떠나야 한다. 사랑하는 여인이 있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이탈리아에 온 페란은 패거리와 어울려 전통적인 방식으로 돈을 번다.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때론 타인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다. 페란은 곧 원하던 돈을 손에 넣게 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연인은 아이를 임신했고 페란은 동생을 찾기 위해 다시 길을 재촉한다.

에미르 쿠스투리차 감독의 <집시의 시간>은 여러 면에서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의 영화를 연상케 한다. <잊혀진 선조의 그림자>(1964)는 구소련에서 활동했던 파라자노프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영화. 우크라이나 지방의 농부들 삶을 다룬 이 영화는 신화적 모티브를 중심으로 하면서 고전적 스토리텔링의 묘미를 전해준다. 몽환적인 상상력과 자유분방한 카메라의 움직임은 <잊혀진 선조의 그림자>와 <집시의 시간>의 유사점으로 거론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집시의 시간>은 파라자노프의 영화에 비해 형식적인 관심이 덜하다. 쿠스투리차 감독은 영화를 특정한 틀에 가두는 대신, 형식면에서 최대한 자유를 즐긴다. 영화의 절반 정도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서인지 한편의 거친 스케치처럼 소박하고 비논리적인 영화의 서사 역시 그다지 거슬리지 않는다. <집시의 시간>에서 인상적인 것은 영화음악의 사용이다. 각 인물은 자신의 테마곡에 해당하는 곡을 하나쯤 지니고 있는데 주인공인 페란의 경우는 재치있다. 그는 화면에 등장하면서 아코디언으로 직접 테마곡을 연주하기도 한다. 영화음악은 실제 밴드가 출연해 연주하고 있으며 그들은 카메라를 따라 이동하면서 노래한다. 신비로운 능력을 지닌 집시들의 희비극이 교차하는 드라마에서, 그들 육성이 실린 노래들은 <집시의 시간>이라는 몽환적 리얼리즘의 설득력을 높인다. 집시들이 강변에서 벌이는 축제의 시간과 페란이 물 위에서 부유하는 장면의 아름다움은, 여전하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wherever70@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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