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인형의 집, 영국 애니메이션 명가를 가다
2001-04-13

춤추는 인형의 비밀, 그것이 알고 싶다

■인형 본뜨기에서 의상 만들기까지 , 수작업 인형제작사 매키넌 앤 손더스의 24시

‘영국 애니메이션’ 하면 누구나 쉽게 눈앞에 떠올릴 그림은, 아무래도 점토로 만든 동글동글한 아저씨와 강아지의 풍경이 아닐까.

침대에서 눈뜨는 순간부터 벨을 눌러대며 “그로밋! 아침식사”를 외치는 월레스와, 그의 곁에서 온갖 뒤치다꺼리를 도맡아하는 속깊은 강아지 그로밋.

그 밖에도 어린이용으로 꽤 인기를 누렸던 <안녕 노디>와 <가시덤불 울타리> <양배추인형의 클럽하우스> 등

영국산 애니메이션들이 틈틈이 국내에 소개되긴 했지만, 국적은 고사하고 제목도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애니메이션이라면 으레 TV는 <포켓몬> 같은 아니메, 극장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떠올리는 데 익숙한 국내 관객에게 <월레스와

그로밋>의 97년 스크린 나들이는 색다른 애니메이션의 영토를 선보였다. 치즈를 구하기 위해 달로 여행을 떠나고, 샛노란 달 표면을 잘라

크래커에 얹어먹는 상상력이나 재치있는 유머, 영국식 일상을 오밀조밀 점토에 새겨넣은 <월레스와 그로밋>은 맛깔스러우면서도 남다른

그림이었다. 그 남다른 느낌에는 익숙한 셀이나 컴퓨터그래픽이 아니라 유연한 점토의 질감과 물리적인 실재감, 지극한 수작업으로 점토를 세공한

손맛의 힘이 실려 있다.

미국과 일본을 필두로 세계 애니메이션 산업의 경향이 셀과 같은 전통적인 방식 대신 컴퓨터 모니터라는 새 화폭을 찾아가는 동안, 영국에서는 셀보다

더 고전적인 기법인 모델 애니메이션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인형, 점토 등 그림이 아닌 다양한 재료의 물체를 이용하는 모델 애니메이션은,

정교한 세공을 거친 모델을 움직이면서 한 프레임씩 끊어 찍는 스톱모션 기법을 사용한다. 좀체 서두르는 일이 없다는 영국인들만큼이나 더디고,

꾸준한 작업과정에서 담기는 체온은 첨단기술력으로도 만들어내기 힘든 것이다.

<씨네21>은 주한영국문화원 주관으로 지난 3월18일부터 약 8일간 영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짤막한 탐사에 나섰다. 특히 모델 애니메이션의

바탕이 되는 인형을 만드는 매키넌 앤 손더스부터 아드만, 가장 신생이라는 해밀턴 매트리스 등의 제작사까지, 차분하고 느린 걸음으로 영국 애니메이션의

한축을 끌어가는 이들 모델 애니메이션의 명가를 찾아나섰다.

알트린챔=글·사진 황혜림 기자

인형의 집. 영국 중부 맨체스터 근교의 알트린챔, 공업도시로 번성했던 맨체스터의 재력가들이 이주하면서 부촌으로 알려졌다는 도시에서도

좀 한적해뵈는 시몬스가에 자리잡은 인형제작회사 매키넌 앤 손더스(Mackinnon & Saunders)에 들어서면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입센의 소설처럼 박제된 삶의 공간을 은유하는 상징말고, 말 그대로 인형이 나고(?) 자라는 집. 여기도 인형, 저기도 인형이라 사람보다

인형이 많이 산다는 물리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3층 적갈색 벽돌집, 하얀 문을 열어 일행을 맞은 건 물론 인형이 아니라 사람이었지만, 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3명의 디자이너들이 고정된 돋보기 아래 정성스레 한땀씩 깁고 있는 손바닥만한 인형 의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인형의

집’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온 주인 이언 매키넌과 피터 손더스에 따르면, “정말 미안하지만 아드만 신작 장편에 쓰일 의상이라

아드만이 공개를 원치 않아서 카메라 촬영을 말아야” 하는 최신 인형패션.

<샌드맨>에서 <밥 더 빌더>에 이르기까지

매키넌 앤 손더스는 이언 매키넌과 피터 손더스가 1992년에 만든 인형 전문제작회사다. 유럽 최대 규모라는 코스그로브홀과 아드만 등 다양한

애니메이션제작사와 방송사, 감독들과 작업하며 TV, 광고, 단편과 장편 등 애니메이션 촬영을 위한 인형의 산실로 이름을 다져왔다. 93년 동시에

아카데미 단편애니메이션상 후보에 올랐던 <스크린 플레이>와 <샌드맨>, 올해 같은 부문 후보에 오른 <가발제작자>

같은 작품이나, 최근까지 영미권에서 아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밥 더 빌더>(Bob The Builder) 같은 다수

TV시리즈의 주연 인형들을 꼼꼼한 수작업으로 만들어온 것이다. 국내에서는 그 인형들의 자태를 볼 기회가 많진 않았지만, MBC 아침 시간대에

어린이 프로로 방영돼 인기를 누렸던 인형애니메이션 <안녕 노디>의 주인공이나 팀 버튼의 <화성침공>의 기괴한 가분수 우주인(이

친구들은 요즘 국내 모 PC 광고에도 등장한다)의 원조가 이곳 출신. 국내 극장가에 <양배추인형의 클럽하우스>란 제목으로 잠깐 개봉된

양배추인형 애니메이션 3부작 모음 중 ‘뉴 키드’ 에피소드에 전학생으로 나온 새 양배추인형도, 어린이용 비디오로 나온 <가시덤불 울타리>의

앙증맞은 생쥐도 모두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역시 비디오로 소개된 단편 <샌드맨>을 혹 봤다면 그저 귀엽고 깜찍한 인형에 머무르지

않으려는 매키넌 앤 손더스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을 것이다. 매키넌이 공동제작하고 손수 인형을 만든 92년작 <샌드맨>은 어둠을

두려워하는 창백한 소년과 어둠의 상징 혹은 악몽과도 같은 샌드맨의 관계를 기괴하게 양식화된 디자인과 동작을 통해 공포스런 동화로 그려냈다.

의도적으로든 인형이라는 특성 때문이든 과장된 감은 있지만, <가시덤불 울타리>에서 난롯불에 시린 손을 쬐는 생쥐, <드라큘라>의

키아누 리브스처럼 긴 손가락으로 펜대를 쥐고 일기를 쓰는 <가발제작자>의 주인공 등 매키넌 앤 손더스의 인형들은 매우 정교하고 표정이

풍부하다. 사람의 손에서 빚어질 때부터 고정형의 존재지만 빠르게 움직이지 않을 뿐, 다양한 시선과 팔다리 움직임에, 때로 그럴듯한 한숨을 내쉬는

인형을 보고 있자면 ‘인형같다’는 비유의 쓰임새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만 같다. 사람만큼 자유롭진 않아도 사람이 할 수 없는 연기를 능청맞게

보여주는 인형들, 기껏 16∼40cm에 이르는 모습 뒤 그들만의 숨결을 얻어내는 비결이 매키넌 앤 손더스의 작업실에 숨어 있었다.

플라스티신에 자유로운 숨결을

지난해 알트린챔으로 옮겨왔다는 ‘인형의 집’은, 인형을 직접 만드는 곳인 만큼 사무실이라기보다는 작업실 분위기다. 제작공정에 따라 작업공간은

크게 플라스티신(세공용 점토) 조각, 주형, 뼈대 만들기(armature building), 의상 등 네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그러니까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봤던 의상 파트는 거의 완성된 인형에 옷을 입히며 끝손질을 하는 마지막 공정이었던 셈이다. 현관 옆 계단을 따라 2층으로

가면, 모든 공정의 기본이 될 플라스티신 인형을 만드는 작업실이 나온다. 서너개의 책상이 들어선 방에는 벽면마다 2단의 나무 장식장 빼곡이

그동안 만들어온 캐릭터들이 줄지어 있다. 부리처럼 튀어나온 코에 양팔을 날개인 양 뒤로 들어올린 푸른 샌드맨, 페스트에 걸린 소녀를 사정없이

집에다 가둬두던 <가발제작자>의 조연, <양배추 인형의 클럽하우스>의 양배추 인형들, 그리고 원래 팀 버튼의 의도대로라면

<화성침공>의 주인공이 될 뻔했던 우주인들.

우주인 장면을 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찍고 싶어했던 팀 버튼을 위해 LA까지 날아가 반년 이상 작업했다는 우주인 인형들은, 그냥 특수효과로

대신하자는 프로듀서의 말에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든 가짜(?) 모델이 되는 데 그쳤지만 유리상자 안에 고이 보존된 채 예의 그 기묘한 생김을 과시하고

있었다. 형형색색 인형들 옆에는 회색으로 투박하게 조각된 <매직 스워드>의 캐릭터들도 있다. 인형 애니메이션은 아니지만 미국의 워너브러더스나

디즈니 등 2차원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메이저 영화사에서도, 애니메이터들의 입체적인 캐릭터 스케치를 돕기 위한 참고 모델을 주문해온다는 게

매키넌의 설명이다.

그런 경우는 좀더 단단한 재질로 모델을 만들지만, 인형들은 대부분 <월레스와 그로밋>을 빚어낸 점토 ‘플라스티신’에서 출발한다.

보통 주문자가 캐릭터의 기본적인 스케치를 보내오면 그것에 바탕해 플라스티신 인형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플라스티신으로 정교하게 만든 인형을

즐겨 써온 아드만과 달리, 매키넌 앤 손더스는 플라스티신 인형뿐 아니라 실리콘, 폼레이텍스 등 다른 재료로 주조한 다양한 인형들을 만들어왔다.

그래서 플라스티신으로 기본 모델 인형을 만드는 작업은, 이후 주형이나 뼈대 만들기, 의상 등 이후 공정을 끌어갈 자료인 크기와 생김, 움직임의

폭을 결정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단계라고 한다. 목과 양팔, 양다리 등 주요 연결부위는 다 분리할 수 있게 만들어 철심을 박아놓는다.

마침 찾아간 작업실에서는 미국 광고에 쓰일 인형 조각이 한창이었다. <샌드맨>을 보고 맘에 들어했던 미국의 티슈회사가 아이들용 티슈

광고를 위해 인형을 주문한 것이다. 이미 시리즈 광고 2편을 끝내고 3차분을 위해 만들고 있다는 소녀 인형은, <샌드맨>의 소년

캐릭터를 기본으로 하되 동화적인 분위기를 바랐던 광고주의 주문대로 머리가 크고 발이 작은 기형이나 분홍뺨의 밝은 캐릭터로 완성될 예정이다.

단편은 큰 수입이 안 되고, 장편은 작업 자체가 오래 가서 자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광고작업은 TV물과 더불어 주된 일거리며 수입원이

된다.

제작과정마다 꼼꼼한 손맛

플라스티신 인형이 완성되면 다음 공정은 주형. 주형 및 주조와 뼈대를 만드는 지하 작업장은 주형에 쓰이는 유액 냄새에다 공구로 철재를 두드리는

소리가 가세해 가내수공업 규모의 공장 같다. 한 귀퉁이를 차지한 주형 작업장에는 넓은 탁자에 여러 틀이 놓여 있고, 가마와 싱크대를 갖춰 놓았다.

여기서 플라스티신 인형을 본떠 튼튼한 재질의 주형을 만들고, 그 틀에 폼레이텍스 등을 부어 고온의 가마에서 굳힘으로써 부드럽고 탄력있는 인형의

살갗, 외형을 주조해내는 것이다. 싱크대 옆 조그마한 빨랫줄에 널린 허연 껍질들이 그 외형을 헹군 뒤 말리는 과정이란 것, 그 뒤에 찰진 그로밋의

점토 질감과 또다른 고무 질감의 인형이 슬슬 모양새를 갖춘다는 것이 공정 설명이 끝날 즈음 눈에 들어왔다.

속이 빈 인형은 얼굴과 손발 등 기본적인 채색 단계를 거친 뒤, 원래 모델인 플라스티신 인형에 맞춘 철제 뼈대를 속에 넣고 조절하는 과정을

지나며 움직임을 얻기 시작한다. 미대 작업실처럼 옹기종기 책상이 늘어선 철골 제조 공간에서는 남녀없이 조그마한 망치나 드라이버, 나사 따위를

손에 들고 인형의 동작을 살려낼 골격 만들기에 열심이다. 인형 몸체의 무게를 지탱하는 발목 관절은 잡고 흔들어도 끄떡않게 조여놓고, 손가락은

유연하게 움직이도록 마디를 잘게 구분해 자체 개발한 초미니 나사로 연결하는 식이다. 인공 안구, 박제동물의 눈을 만드는 회사에서 특별 주문한다는

안구 뒤에 자석을 붙여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눈이 제자리를 찾는 것도 이즈음. 그 위에 외피를 씌우고, 주형 단계에서 생기게 마련인 이음새 마무리와

세밀한 의상 손질을 마치면 드디어 하나의 생명체, 아니 인형체가 탄생하는 것이다.

10년 역사, 한결같은 장인의 고집

그렇게 매키넌 앤 손더스를 거쳐 나고 사라진 인형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10년 역사도 역사지만, 한 작품당 인형을 한번 만드는 경우는

광고를 제외하면 드물기 때문이다. 지금도 제작중인 TV시리즈 <밥 더 빌더>의 경우 주인공인 밥 인형 2개, 캐릭터 전부를 합해

25개 정도의 인형으로 시작해 이제껏 150개가 넘는 인형들을 만들어왔다. 인형이 더러워지면 피부를 갈아주고, 망가지거나 <밥 더 빌더>처럼

촬영팀 자체가 늘어나 똑같은 인형이 여러 개 필요할 때 새로 만들어주느라 30여명의 ‘인형제작자’들은 늘 분주하다. “지금 준비중인 아드만

장편 같으면 한 캐릭터당 똑같은 인형 5개씩은 필요할 것”이라는 게 매키넌의 말이다. 그 많은 인형들이 살아 있도록(?) 보관하기 어렵지 않냐고

누군가 묻자 “영국은 결코 (플라스티신이 녹거나 할 만큼) 더워지는 법이 없다”며 웃었다. 봄인데도 방문 일정 내내 수묵화의 먹색마냥 흐리고

쌀쌀하던, 때로 눈비까지 흩뿌리던 영국의 사나운 날씨도 한몫하려던 걸까.

하나의 인형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꼬장꼬장한 장인의 손길뿐 아니라 수개월의 시간, 개당 6천∼8천파운드의 제작비가 든다고 한다. 인형 디자인의

원안 대부분이 주문자들의 것이고, 수작업 자체가 워낙 복잡미묘한 데다 제작단가도 높기 때문에 매키넌 앤 손더스의 캐릭터사업 수익은 거의 없는

편. 하지만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라는 <밥 더 빌더>가 미국에서도 성공을 거두고, <가발제작자>가 세 번째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면서 매키넌 앤 손더스를 찾는 이들이 늘어나는 추세라는 것. 지금도 광고와 아드만 신작, 올 여름 의 애니메이션

스페셜로 방영될 <해밀턴 매트리스> 작업 등 몇 가지 일이 겹친 형편이다. “지난 몇년간 컴퓨터 애니메이션이 점점 발전하면서 인형이

덜 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오히려 더 바빠지고 있다. 아직은 인형에 관심을 갖는 대중이 있으니까”라는 그의 말대로, 이미지와 표현의

영토를 한겹 더 풍부하게 하는 인형의 매력이 아직은 유효한 것 아닐까. 회사가 성장하면서 손수 인형을 만드는 작업보다 운영에 바빠진다며 부끄러워하는

두 장인의 고집스런 손맛이 말이다.

▶ 애니메이션의

해는 지지 않는다

▶ 공동대표

이안 매키넌, 피터 손더스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