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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패는 죽지 않는다. 다만‥
2002-11-13

조선희의 이창

남들 다 보는 TV드라마를 안 보고 버티기는 쉽지 않다. 저녁에 집에 놀러온 언니는 <야인시대> 할 시간이라며 바삐 돌아간다. 초등학교 4학년짜리 딸은 “그거 우리 반 애들도 봐. 엄마만 못 보게 해”라고 따진다. 밤 10시면 아이들 재워야 하는 시간이라 TV를 켤 수 없는 게 내가 <야인시대>를 안 보는 이유다. 민족주의 깡패든 막가파 깡패든 간에 깡패 얘기 앞에 입을 쩍 벌리고 넋을 놓게 될까봐 두려운 마음도 조금은 있다.

20년 전쯤 김두한 전기를 읽었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대목은 이런 것이다. 김좌진 장군이 숨어지내던 집 딸에게 임신을 시켜놓고 심야에 도주하면서 그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들을 낳으면 두한, 딸을 낳으면 두옥이라 지어주오. 김두한은 한번인가 중국에 들어가 아버지를 만났다는 것으로 기억난다. 장군과 아들의 관계는 생각보다 조촐했던 편이다.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을 보면, 전장에서 돌아온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장군을 위한 축제가 열리자 이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을 가진 열일곱명의 아들들이 모여든다. 장군이 정복전쟁을 벌일 때 어떤 마을에 들어가면 장군의 씨앗을 얻고 싶은 집안에서 딸들을 장군의 막사로 앞다퉈 들여보내곤 했던 것이다. 핏줄 하나는 확실하게 타고난 장군의 아들들은 축제에서 생난리를 핀다. 물론, 계모하고 결혼하고 숙모에게 사생아를 낳게 하는 마르케스 소설 속의 라틴아메리카를 식민시대 한국에 빗대선 곤란하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그저 세세무궁히 재생산되는 ‘장군의 아들’ 신드롬을 한번 찔러나보자는 취지다.

나는 요즘 진지하게 걱정한다. 남자고등학생들의 장래희망 인기순위에 깡패라는 이색 직종이 출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실제로 경주에 있는 어느 남자고등학교에 차승원이라는 체육선생이 담임을 맡고 있던 학급의 학생들이 단체로 깡패 두목을 찾아가서 “행님. 거두어주이소”라고 해서 물의를 일으켰던 사건이 불과 1년 전의 일이다. 그때 그 깡패 두목은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좀 했던지 “성적 20등 안에 들면 다시 와라. 나는 무식한 놈은 안 받는다”고 말했대나 어쨌대나.

지난 2∼3년 한국영화 시장점유율 40% 위업을 주도한 것은 깡패영화들이다. 깡패영화가 번창하면서 인근 장르들과 무차별 합종연횡, 다양한 하위장르들을 생산해냈다. 깡패코미디나 깡패멜로가 대종을 이루는 가운데 작가주의 깡패(<파이란>), 여성주의 깡패(<조폭 마누라>)나 서사주의 깡패(<친구>)물도 출현했다.

<친구>가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경신하고 <가문의 영광>이 역대 랭킹 2위를 차지했다는 건, 깡패들에 대한 우리 대중의 너그러운 태도를 말해준다. 깡패 판타지가 먹히는 것은 현실이 너무 쫀쫀하기 때문이다. 탈법의 공간에는 판타지가 있다. 자기 밥그릇을 건드는 작자는 사시미칼로 배를 쑤셔서 즉각 응징한다. 갈등이 생기면 인내와 관용의 정신으로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각목을 들고 떼거지로 몰려가서 그야말로 작살을 낸다. 법과 상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양지에서 주류 문화의 훈육과 통제에 의해 야만성이 거세된 현대인들은 아마도 깡패 판타지를 보면서 ‘짐승의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모양이다. 전쟁없는 시대, 태평성대의 무용담 노릇이다.

게다가 깡패 보스들은 하나같이 카리스마의 화신들이다. 한국영화의 깡패 판타지들은 리얼리즘과 결별한 지 이미 오래라서, 간혹 그 지사적 풍모를 볼 때 대학엘 갔으면 영락없는 운동권학생이고, 인격적인 완성도면에서는 옆에 서 있는 형사나 스님들이 오히려 양아치처럼 보일 정도이며, 자기 여자를 끝까지 지켜주는 태도를 보면 진짜 사나이들이 제대해서 모두 조폭이 된 듯하다. 그리고 대단원의 마지막에는, 감독들이 서로 짠 것처럼, 깡패 두목들이 하나같이 독립운동하다가 형무소 가는 폼으로 장렬하게 떠나간다.

자, 우리 한번 복창합시다. 깡패는 깡패일 뿐이다. 미화하지 말자.

내가 그나마 <가문의 영광>을 즐겁게 볼 수 있었던 건, 유동근의 재평가와 김정은의 발견, 뭐 그런 영화적 성과들 외에도 주류 ‘후까시즘’ 깡패영화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깡패들을 근엄하게 그리는 것보다는 코믹하게 다루는 게 그래도 정치적으로 더 참을 만하다. <가문의 영광>은 전국 500만 돌파의 위업을 달성하고 조만간 간판을 내리겠지만, 충무로는 지금 비밀장소에서 또 다른 깡패들을 한 다스쯤 밀봉교육시키고 있을 게다.

깡패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갈 뿐이다. 자기 순서가 끝나면. 조선희/ 소설가·전 <씨네21>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