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읽기
통속적인 불륜영화의 틀을 깨뜨린 <밀애>
2002-11-14

페미니스트 아브락사스!

나는 언제나 내 안의 진정한 내면의 소리에 따라 살기를 원했을 뿐이었다.그러나 그것이… 왜 그렇게 힘들었던가 -헤르만 헤세-

한 여자가 빨간 원피스를 입은 채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사는 ‘뭐 오늘 특별한 날이라도 되는가’라고 물어보고 여자는 그저 사진이 없어서 찍는다고 대답한다. 대개 가족사진의 후면을 이루는 것 같은 환한 꽃무늬 빛깔의 배경은 더없이 화사한데, 여자는 소리없이 울다 웃는다. 채 얼굴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감독의 카메라가 점점 물러나며, 여자의 전신을 비추는 순간, 깨닫게 된다. 태어나서 혼자 처음 찍는 백일 사진이 자신의 생물적 탄생에 대한 증거물과 같다면 이 여자의 혼자 찍는 가족사진은 이제 갓 태어난 여자의 존재론적 탄생에 대한 증거물이라는 것을. 한 남자를 사랑했고 문득 그를 떠나보냈으며 가정을 벗어나 싸구려 음식과 시간제 일자리로 생계를 연명한다는 여자는 환히 웃는다. 존 바에즈의 고요한 목소리가 스크린을 채우고, 채 물기가 마르지 않은 여자의 뺨 위로 빛이 쏟아진다. 이제 그녀는 혼자 시작할 것이다.

불륜영화 현상, 왜?

올해 한국 영화계의 드문 수확 중 하나인 <밀애>의 마지막은 좀체 잊을 수 없는 긴 여운을 드리운다. 이 마지막을 통해 변영주 감독은 한국영화 역사상 멜로 혹은 불륜드라마의 자장 안에서도 여성이 살아 있음을, 여성이 살과 피와 가슴뿐 아니라 존재론적 볼륨을 가진 입체임을 고요하게 각인시킨다. <밀애>의 정사는, <밀애>의 주인공들은, <밀애>의 빛과 색깔은, <밀애>의 카메라와 미장센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단지 인공적으로 다듬어진 팬시한 아름다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여자의 내면을 종과 횡으로 엮어 그것을 사뿐히 즈려밟는 변영주의 미학적 완결성 때문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것은 <자유부인> 이래 한국영화가 탄생시킨 수많은 부인 시리즈와 여자 시리즈 그리고 <정사>와 <해피엔드> 등 불륜을 다룬 90년대의 한국 영화들이 차마 다루고 싶었으나 다루지 못한 것, 혹은 기꺼이 얻고 싶었으나 얻지 못한 전복성과 기존의 장르적 공식을 뿌리치는 거부의 몸짓에 있기도 할 것이다.

근자에 들어 가장 촉망받는 신인 감독들이 가장 통속적이고 축축한 장르로 인식되고 있는 불륜영화의 계보 안에서 기꺼이 데뷔하는 현상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밀애>의 변영주 외에도 단편 <생강>과 <호모 비디오쿠스>로 독립영화계의 스타가 되었던 정지우, 이재용 같은 명민한 신인들 역시 이미 <해피엔드>와 <정사>로 데뷔전을 치른 바 있으니 갈수록 불륜영화의 주가는 높아져가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불륜영화는 내심 ‘여배우들이 벗는다’는 입소문에 기대어 흥행의 선전을 기대하는 제작사의 바람과, 금기의 테제를 다룸으로써 자신을 실험해보려는 신인 감독의 야심이 일치하는 최소공배수의 영역에 자리하고 있는 장르인지 모른다. 살내음이 농밀한 정사장면은 육체라는 출입구를 통해 신인 감독들의 연출솜씨를 한눈에 가늠케 하게 하고, 일부일처제라는 금기를 위반하는 불륜의 속성에는 사회제도를 뒤집어보려는 도발적 시선이 똬리를 틀고 있다. 여기에 불륜이 야기하는 감정이란 한 인간의 내부에 자리잡은 그리움과 열정과 두려움이 범벅된 가슴벅찬 혼동, 그리고 불륜영화란 선천적으로 그 회오리 불꽃을 점화시키는 가장 손쉬운 발화점을 접착하고 태어난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불륜에 대한 환상은 결혼이란 제도에 발이 묶인 채, 이제는 무심하게 천천히 늙어갈 일만 남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꺼지지 않는 유일한 불씨, 언제나 매혹적인 ‘위반에 대한 충동’은 아니던가.

그래서 불륜영화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소모되며 화제의 중심에 서 있다 사라진다. <안나 까레니나> 이래 대개 불륜영화의 여주인공들은 누군가와 살을 부비며 사랑에 대한 환상에 젖다 바로 그 환상을 실현한 대가로 죽거나 쫓겨난다. 이러한 가운데 견고한 빌딩의 안쪽에 숨어서 서서히 부식해가는 녹슨 철골처럼 가부장제의 허실은 그렇게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운명은 주인공들을 희롱하고, 감독들은 저마다 아름다운 불륜이라는 좁은 경계선에 아슬아슬한 내기를 걸고 싶어서 안달을 내는 것이다.

한국의 조폭영화나 코미디영화 같은 장르영화들이 그러하듯 불륜영화의 장르 안에서도 어떤 관습적 공식이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멜로영화의 넓은 테두리 안으로 구겨넣거나 몇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이러한 공식들은 암암리에 관객과 감독의 은밀한 묵계처럼 스크린 위에서 거듭 재현되고 용인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마도 불륜영화의 가장 큰 관건은 불륜에 빠지고 불륜을 저지르는 여주인공들에 대해 관객이 느낄 부정적인 전이감정과 죄의식을 낮추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한국적인 장치는 흔히 남편과의 관계에 대한 여주인공의 불행감 혹은 가부장제하에서 심한 사회적 억압을 경험하는 여주인공의 가정상황에서 예비되어진다(이것이 얼마나 한국적인 장치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데이비드 린 감독의 <밀회>부터 최근의 <인피델리티>까지 불륜을 다룬 수 많은 서구의 영화들은 반대로 여주인공들이 더없이 좋은 남편을 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더 관습적인 공식 중 하나는 이러한 여성들의 불행감에 대한 기호학적인 장치로 요리, 제사와 같은 무의미한 집안일을 서비스하는 여주인공이 등장하고 공간적으로는 거실을 할당받지 못하는 여자, 부엌에 유폐된 듯 보이는 여자, 즉 가정이란 평면도에 공간적인 구획을 함으로써 그녀가 얼마나 고정된 성역할 안에서 신음하는지를 드러내는 일일 것이다.

그날 이후, 빛나는 `여성`

그런데 <밀애>는 이러한 도상을 과감하게 깨버리거나 혹은 무시한다. <밀애>의 주인공 미흔은 영화 내내 가족들을 위한 어떤 서비스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설사 요리를 할지라도 스스로 먹기 위해 하는 것 같다. 그녀는 ‘남편처럼’ 거실에서 아이와 함께 TV를 보고 여가를 보낸다. 기실 그녀가 겪는 상처는 어느 겨울, 크리스마스에 불쑥 들이밀어진 남편의 외도와 얽힌 불행감만은 아니다. 이후 미흔이 경험하는 깨질 듯한 두통과 멍한 눈동자는 남편의 외도가 그녀의 세계를 산산조각 내버렸음을, 혹은 이로 인해 그녀가 충만감으로 가득 채웠던 자신의 세계를 텅 빈 구멍으로 비워냈음을 보여준다. 변영주 감독은 창 밖의 화창한 빛이 한 조각도 들어오지 않는 질식할 것 같은 어둠이 드리운 집안의 풍경으로 미흔의 균열된 세계를 형상화한다. 동시에 당집의 대나무밭이나 휴게소의 정자 그리고 자동차의 프레임처럼 틀 안에 갇힌 그녀를 통해 그녀가 그저 불행하거나 우울한 정도가 아니라 일종의 넋이 빠져나간 상태임을 드러낸다. 그녀는 죄의식보다는 일종의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고, 그녀는 자신의 만들어낸 텅 빈 구멍에 포위되어 있다. 밀애의 유화 같은 질감은 마치 고흐가 <감자먹는 사람들>에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자의 고통을 칠흑 같은 어둠으로 표현했던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그러므로 미흔이 인규와의 첫 번째 정사 뒤 환하게 웃는 얼굴로 딸과 함께 미장원에 앉아 있는 장면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불륜이 그녀의 삶에 윤기를 준다는 사실, 가출했던 그녀의 넋이 다른 남자의 육체에 의해 제 집을 찾아 되돌아온다는 설정은 이전의 많은 한국의 불륜영화들이 보여주는 여성들의 ‘그날 이후’와는 상당히 차별화되는 지점에 <밀애>를 밀어올린다. 껍데기뿐인 가정이라도 자신의 울타리가 돼줄 가정에 대한 양가감정으로, 대개 불륜영화 속 여주인공들은 남편을 정면으로 직시하지 못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남편과 시선이 엇갈리는 그녀들의 외관은 영화 <정사>에서 내면으로 침잠한 이미숙의 얼굴로, <해피엔드>에서는 차가운 표면을 유지하려는 전도연의 얼굴로 형상화되어 있었다. 미흔이 이들과 다르다는 사실, 첫 정사의 나신을 보여준 이후 막바로 환한 웃음이 들어찬 여자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편집시킨 감독의 대담함에는 무엇보다도 <밀애>가 구현하는 여성 캐릭터가 기존의 남성 시각으로 그려진 여성 캐릭터가 아님을, 지나치게 조신하거나 지나치게 차갑거나 지나치게 나쁘거나 지나치게 엽기적인 그녀가 아닌, 매우 능동적이고 삶의 생기를 염원하는 ‘여자’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기에 정사 뒤 여자는 수줍게 남자에게 ‘내가 잘했나요’라고 물어볼 수 있었을 것이다. 마치 처음으로 섹스를 맛본 여인처럼. 미흔의 질문에 대해 인규는 ‘당신은 자신이 얼마나 유혹적이라는 것을 모른다. 온몸이 빨려드는 것 같았다’고 대답한다. 미흔의 남편과 불륜관계를 맺었던 낯선 여자 역시 미흔에게 ‘우린 아줌마가 평생 꿈도 꾸지 못할 사랑을 했어. 오빠는 내가 오빠를 통째로 빨아들인다고 했어’라고 내뱉었다. 아주 유사하게 들리는 이 두 대사는 <밀애>의 가장 도발적이면서도 유혹적인 화두이기도 할 것이다. 통째로 빨아들인다는 것. 여성성이 갖는 그로테스크함과 매혹을 동시에 표현하는 이 말은 불륜이 갖는 일탈의 핵심에 육체가 그것도 여성의 육체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그곳은 자신의 육체가 누군가를 유혹할 수 있고 갈망의 중심에 놓여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만족하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놀라운 각성에 도달하는 장소로서의 육체이다. <밀애>의 주인공 미흔이 다른 불륜영화의 여주인공과 달리 근심하기를 멈추고 생기의 에너지로 환히 빛났던 것은 그녀의 육신이 관객에게 보여지거나 한 남자의 손길에 의해 대상화되기 이전에 스스로가 스스로의 육체를 확인한 희열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로소 미흔은 인규뿐 아니라 남편과도 잠자리를 함께할 수 있게 된다.

너희가 섹스를 아느냐?

그렇다. 모든 불륜영화의 중심에는 섹스신이 놓여 있다. 좋은 싫든 관객은 그것을 봐야 하고 감독들은 그것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하는 것을 결정해야 한다. 그것이 정상적인 부부의 그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불륜영화의 정사에는 통속성과 도발성의 아말감이 함께 혼재한다. 지나치면 관음증의 끈적끈적한 게임으로 부족하면 밋밋한 그저그런 멜로로 전락할 이 위험한 게임은 신인 감독들에게는 흥미진진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리움과 정열과 결핍과 그것의 메움이 함께하는 정사신을 만들기 위해 그들은 고민한다.

이 흥미진진한 내기에 대한 가장 점잖고 고상한 태도는 뜨거운 입맞춤과 아름다운 몸을 지닌 두 연인의 상반신을 진열시킨 뒤 수돗물 떨어지는 소리나 창 밖에 부는 바람 같은 여백숏을 삽입, 병치시키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통상 불륜의 섹스도 행간을 띄엄띄엄 둔 시처럼 아름답고 우아한 것이 된다. 더 적극적으로는 롱테이크든 핸드헬드이든 정사에 젖어드는 주인공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격렬한 호흡과 열정을 그대로 담아내는 방도이다. 섹스의 강도와 관계의 진정성이 비례하는 것처럼 격렬하게 카메라는 떨리고 그야말로 주인공들은 몰아지경의 상태가 되어간다. 여기에 모텔이라는 공간은 너무 뻔하다는 듯 젊은 남성의 방을 밀애의 장소로 선택하는 관습 또한 잊지 않는다.

<밀애>는 이러한 공식 모두를 거부한다. 그리곤 자신의 섹스장면에 대해 무척이나 솔직하게 군다. 인부들의 새참을 주거나 아이를 학교에서 데려오는 것을 까먹을 정도로 육체에 새겨진 성적 욕망은 미흔을 뒤흔든다. 그것은 살아갈 힘을 주고 심지어 인규의 아내가 ‘여보 여보’라고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서 남편을 찾아도 버젓하게 남자의 몸을 탐닉하는 뻔뻔한 용기까지 선사한다. 동시에 그것은 부드럽고 위무적이다. 남해라는 장소, 천혜의 바다를 옆에 두고도 변영주의 카메라는 붉은 주단이 깔린 모텔의 침대 방으로 직행하고 두 남녀의 나신을 그대로 잡아낸다.

개인적으로 <밀애>의 정사신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인규의 몸을 애무하는 미흔의 손이었다. 남자의 완전히 벗은 육체에서 시작하여 허공을 가르며 남자의 육신을 애무하는 그녀의 손은 고즈넉하고 둥실했다. 풀숏으로 침대 위의 두 사람의 나신을 잡았을 때도 인규는 여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보통 거칠게 잡아내는 가쁜 숨소리 대신 변영주가 꾸민 화면에는 생생한 키스 소리가 가득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상황설정 숏 외에는 남해에 관한 어떤 풍광도 삽입하지 않은 변영주의 정사신이 미학적으로 무척 도전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카메라는 오감을 자극하는 동시에 여자의 성적 욕망과 판타지를 부드럽고 정성스럽게 잡아낸다. 그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밀애>의 정사신에는 두 남녀의 서로 육체와 영혼 모두를 보듬는 ‘쓰다듬음’이 있었다.

‘당신이 날 그렇게 잘 알아’' 정사가 끝난 뒤, 여자는 남자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나신을 드러낸 채 모텔의 창가로 걸어간다. 비로소 빛은 다시 방 안에 쏟아져 들어오고, 그녀는 어떤 자족함을 맛보는 사람처럼 가만히 그 창가에 기대어 서 있다. 그때 그녀의 뒷모습을 잡은 카메라는 고요하게 이 부드러운 각성의 시간, 여성이 스스로의 육체를 가지게 되는 시간을 지켜본다. 이후 여자는 더이상 남편과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불륜을 숨기거나 은폐하려들지 않는다.

여성 이외의 시선은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밀애>의 남자주인공 인규라는 캐릭터가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매혹적인 남성 캐릭터의 하나를 구현한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감우성과 함께 인규는 대한민국 멜로영화 속에서 가장 권력과는 거리가 먼 남성을 구현한다. 이 남자에게는 결혼제도에 대한 환상이나 사랑에 매달림으로써 다시 여자를 사회제도의 틀 안으로 끌어 잡아당기려는 자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자 잡지 않는 것 같은 그의 태도는 일견 바람둥이의 그것으로 전형화될 수도 있지만, 자신이 생각보다 매우 ‘구질구질’하며 ‘세상엔 스스로 나빠지고 싶어하는 여자들이 있다’고 말한 만큼 인간에 대한 너그러움을 드러낸다.

또 하나 이채로운 것은 미흔과 일종의 자매애적인 유대로 맺어진 쉼터 휴게소의 나은연이란 여성의 존재이다. 남편에게 맞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다소 중성적인 이미지의 은연은 결국 미흔이 남편에게 맞은 뒤 그녀가 살다 떠난 쉼터 휴게소에서 하룻밤을 보냄으로써 미흔과 은연의 상처가 매우 비슷한 부위임을 암시한다. <밀애>의 은연과 미흔, 두 여인의 관계는 전형적인 불륜영화에서 동생과 언니가 혹은 친구와 친구가 서로 연적이 되어 경쟁하는 지긋지긋하게 많은 드라마와 영화들보다 훨씬 의미있는 여성간의 관계를 이루어낸다.

변영주란 감독은 그렇게 도전적이면서도 부드러운 피부를 가진 여자였다. <밀애>는 제3의 시선이 개입된 흔적이 거의 없는 영화이다. <밀애>는 불륜영화인 동시에 온통 미흔이란 여성의 시선이 가득한 영화이다. 물 속에서 유영하는 미흔을 잡은 미디엄숏에서 다시 사진을 찍는 미흔을 잡는 미디엄숏까지, 그러니까 물 속에서 유영하는 미흔이 본능적인 여성의 원형적인 모습이라면 혼자 사진을 찍는 미흔은 그 여성성이 다시 사회의 표면에 떠올라와 스스로의 형체를 사회라는 감광원료로 인화시킨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둘 모두는 자족적이고 고요하다.

“내 이름은 ‘이미흔’이다 ”라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밀애>는 여성이 자신을 정의하고 자신의 세계를 깨뜨리며 또한 다른 세계로 날아가려는 나비의 거센 날갯짓을 담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변영주는 가장 통속적인 불륜영화에서 <데미안>의 헤세가 성취했던 아브락사스의 면모를 지니고 있지는 않은가. 거듭하는 암전을 통해 죽고 살아나기를 거듭하는 미흔의 영혼은 영겁처럼 그러나 또한 찰나처럼 아름답고 다사롭게 흘러간다. 그것은 빛과 어둠의 윤무, 주인공의 내면에 조금씩 스며들었던 변영주라는 감독이 만들어낸 미학적 완결성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 또한 길거리에 깔린 무수한 미흔을 만난다면 어떤 몸짓을 지을까. 자궁에 난 비슷한 상처를 내보이며 깔깔거리고 웃을까. 이제는 환해진 가랑이로 또다시 이야기의 물을 길을까. 새어나오는 울음을, 어금니를 통해 심장까지 이어진 울음을 삼키며, 사진을 찍던 그녀를 떠올려본다. 그리하여 힘이 되는 슬픔이 다시 내게 왔을 때, 어느덧 가을인데도 극장문을 나서니 찬란한 슬픔의 봄이 개화하고 있었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