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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C영화제에 온 한국영화들을 통해 본 한국영화의 어떤 경향
2002-11-14

불확실성의 알레고리

지난 11월3일까지 미국 USC대학에서 열린 제3회 한국영화제를 끝내고 데이비드 E. 제임스 교수가 한국영화의 한 경향에 관한 글을 보내왔다. 이 대학 영화학교 이론과 교수인 데이비드 E. 제임스는 1996년, 2001년과 2002년 세 차례 한국영화제를 책임기획했다. 지난 1월에는 임권택 감독에 관한 최초의 영어연구서인 ‘임권택: 한국 민족영화 만들기’ (Im Kwon-Taek: The Making of A Korean National Cinema)를 책임편집, 임권택의 작품세계에 대한 국내외 학자들의 글을 모아 출간했다.

우리 USC대학에서는 지난 6년 동안 세 차례 한국영화제를 개최했다. 상영작들은 모두 우리 영화학교에 재학 중인 한국인 대학원생들에 의해 선정되었는데 아무래도 이들의 취향은 서로 비슷한, 어떤 일관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까지 우리 영화제를 통해 볼 수 있었던 작품들은 최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다양하고 풍부하게 제작되고 있는 한국영화들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에 하나의 경향으로 일반화하기에는 조심스럽고 무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영화들을 보면서 느낀 것은 하나의 분명한 유형이 감지된다는 점이다.

임권택, 박광수, 홍상수 - 한국의 감독들

김경현(지금은 졸업해 뛰어난 학자로 활동하고 있다)과 임현옥이 프로그램을 짠 첫 USC영화제는 지난 1996년 미국인들이 이제 막 한국영화를 알아가기 시작할 무렵에 개최되었다. 당연히 영화제는 당시 국제적 명성을 확고하게 세운 최초의 한국 영화감독인 거장 임권택의 회고전으로 기획되었다. 회고전에서 상영된 12편의 영화 속에서 우리는 임권택의 최신 작품들의 중심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특징을 간파할 수 있었다. 즉 그의 영화들은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의 파국적인 침략이 단행되기 이전의 시대를 되돌아봄으로써 민족의 정체성을 되찾고, 이를 다시 한국적인 영화문화의 기반으로 삼으려 시도한다는 점이었다. 아마도 <족보>에서 시작해 (우리 영화제에서 미국에 첫선을 보일 수 있었던) <축제>로 절정에 이르는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임권택은 그 자신이 예술가인 주인공들, 그래서 임 감독 자신이 하고자 하는 예술작업에 어떤 모델을 제공할 수 있는 인물들에 천착했다. 이러한 전략은 <서편제>에서 그 웅장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임권택은 <서편제>에서 이후 자신이 매우 성공적으로 재생산해나갈 하나의 양식을 완성시켰다. 이 양식은 먼저 <춘향뎐>으로, 그리고 이어 최신작 <취화선>으로 이어졌다.

곽한주가 프로그램을 짠 2001년 두 번째 USC한국영화제는 좀더 시사적인 문제, 특히 한국의 급격한 근대화로 인해 치러야 했던 사회적 대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영화제 초청손님이었던 박광수 감독은 임권택에 비해 훨씬 어둡고 단단한 리얼리스트 미학을 발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장 저명한 작품인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실제로는 임권택의 영화모델을 재생산한 것이었다. 즉 이 작품 역시 예술가에 관한 영화였으며 주인공은 감독 자신의 분신 같은 인물이었다. 박광수는 젊은 노동운동가의 전기를 쓰려고 고뇌하는 김영수의 이야기 속에 자기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 즉 사회적으로 급변하는 시대를 살면서 그 속에서 강력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해낼 수 있는,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영화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고뇌들을 드라마화한 것이다. 이같은 영화를 만드는 일은 민주화 투쟁에서 의미심장했던 한국역사의 에피소드들을 상상력을 동원해 재건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경우, 이러한 역사적 기억행위가 지니는 상상적 혹은 예술적인 측면은 박광수가 김영수의 이야기는 컬러로, 김영수가 재건하는 전태일의 삶은 흑백으로 찍은 것에서 명확해진다. 하지만 결말 부분에서 흑백 프레임의 전태일이 박광수 자신의 컬러영화로 점화되는데 이는 마치 전태일과 김영수와 박광수 세 사람 각자의 작업이 결국에 서로 동일시된다는 것과 모두 지속되는 하나의 정치적 비전의 연장선 위에 놓고 볼 수 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두 번째 영화제는 또한 우리에게 처음 홍상수를 접하게 했다. 그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한편으론 포스트모던 시대의 한국사회에 만연한 일상생활의 소외와 사회적인 관계의 미묘한 뉘앙스들을 날카롭게 잡아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처럼 홍상수의 영화도 자신의 투영이라고 할 수 있는 작가를 다루었다. 주인공은 시각적으로 감독을 닮았을 뿐만 아니라 술을 많이 마시기로 유명한 홍상수의 음주습관과도 닮아 있었다. 하지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이전 작품들과 비교해볼 때 의미심장한 차이를 보여주는데 나는 이것이 ‘뉴 코리안 시네마’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주인공 효섭은 관객이 본받아야 할 모델이 아님은 물론, 완전히 상식 밖의 혐오스런 인간일 뿐만 아니라-- 영웅이 아니라 반영웅-- 작가로서도 명백히 실패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실패, 혹은 불가능의 콤플렉스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우세는 곽한주와 이남이 프로그램을 담당한 최근의 세 번째 한국영화제 ‘한국 현대영화의 걸작들’(11월1∼3일)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홍상수의 <오! 수정> 또한 예술가, 이번엔 구체적으로 영화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등 영화인을 다루고 있었다. 그의 최신작 <생활의 발견>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효섭처럼 근본적으로 동정을 사기 힘든 인물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효섭만큼이나 예술가로서 실패한 사람들이다. 즉 이들은 모두 한때 지녔던 전도유망함을 잃어버리고 방향도, 동기도 잃어버린 채 방황하는 자기 모습을 발견한다. 이와 동일한 곤경, 혹은 예술가들의 처지는 이번 영화제에서 상영된 거의 대부분의 영화들에 공통적으로 등장했다. 상영작들이 다양하고, 서로 다른 스타일을 추구하는 데 있어 각기 탁월한 솜씨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율적이고 독창적인 한국영화의 공식을 만들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다른 예술가의 삶을 영화화하는 임권택과 달리 새로운 감독들은 그러한 사명 자체를 불가능한 것으로 마주대하는 듯했다.

첫 번째 상영작인 는 이러한 모순들을 선언한 작품이다. 즉 아름답도록 미묘한 연기, 억제된 사랑과 멜로드라마의 관습은 영화에 매혹적인 구조를 제공해주며, 영화의 촬영술 또한 최고의 경지를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화 속 주인공은 별 야망이 없는 사진사로 차마 사랑할 수 없었던 한 여성의 사진을 유일한 유품으로 남기고 죽는다. 이와 비슷하게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도 주인공 성우와 밴드멤버들은 가차없이 몰락의 길을 걷는다. 멤버들이 서로 싸우고 하나씩 떠나면서 밴드는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고, 영화는 성우가 겪는 절망의 나락에서 내가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서 가장 강력한 이미지로 예술가의 처절한 퇴락을 보여준다. 바로 성우가 술 취한 자본가들의 난교 파티를 위해 벌거벗김을 당한 채 알몸으로 연주하는 장면이다. 비록 영화가 성우가 고교 시절 사랑했던 여자 가수와 함께 팀을 이뤄 새출발한다는 결말을 통해 영화의 비관주의를 누그러뜨리긴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로 볼 때 그의 음악이 가장 미약한 사회적 기능 이상의 것을 성취하리라는 희망은 전혀 없다.

이번 영화제에 선보인 다른 영화들도 이러한 패턴을 이어갔다. <꽃섬>의 세 여자 중 한 사람은 비디오를 찍지만 그것 역시 어떤 진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작업일 뿐이며, 가수인 다른 한 사람은 예술가로서의 재능을 매춘하다시피 한 뒤 암으로 목소리를 잃고 죽음에 이른다. 심지어 <반칙왕>의 레슬링 선수인 대호조차 일종의 연기자이며 그의 예술은 속임수의 예술이지 않은가! 그리고 많은 반칙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큰 경기에서 지고, 영화는 그가 화난 상사 앞에 코를 박고 엎어지는 모습으로 끝난다.

위의 모델에 부분적으로나마 유일한 예외를 이루는 작품은 거장 감독이 영웅적인 예술가의 알레고리로 만든 임권택의 <취화선>이다. 임권택의 최고 영화들을 지탱해온 패러다임의 결정판인 <취화선>에서 장승업은 임권택이 부닥뜨려온 것과 비슷한 삶의 조건들과 마주친다. 즉 외국 작품과 자본, 권위주의적인 국내 정부, 그리고 외세의 위협에 둘러싸인 채 자기 자신을 표현할 예술을 창조하고자 하는 욕망 말이다. 장승업은(임권택의 영화처럼 특히 한국 풍경의 아름다움에 반응하면서) 확실하게 한국적인 그림을 이룩해내는 데 성공하지만 그의 그림이 지니는 사회적 생명력은 미약하다. 그의 그림들은 당시 진보적, 혹은 민족주의적인 정치와 연결되지 못했음이 명확히 드러나며, 그는 결국 사라져 현실이 아닌 전설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반복해 등장하는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 대학원생들은 영화 자체로 볼 때는 그 혁신성과 작품성면에서 그지없이 탁월한 일련의 작품들을 선정했지만 모든 영화가 공통적으로 실패 혹은 불가능이라는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영화는 이제 세계영화계에서 가장 성취도가 높은 영화의 하나이며 영화를 기업투자가들을 위한 돈벌이 수단이 아닌, 예술로서 존중하는 사람들에 의해 가장 높이 평가받고 있다. 만약 어떤 나라의 영화가 영화라는 매체의 지속적 생명력과 동시대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창조적 능력을 재확인시킬 수 있다면 그건 바로 한국영화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영화의 작품들은 너무나 자주, 끊임없이 불안감에 시달리는 동일한 콤플렉스 주변을 맴돌고 있다. 미국에서 작품을 볼 수 있었던 한국 최고의 영화감독들은, 그들이 가장 뛰어난 성취를 이룩해낸 작품에서조차 자기 자신의 불확실성에 대한 알레고리, 즉 은유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느끼는 듯하다. 데이비드 제임스/영화평론가 ·미국 USC대학 교수번역 이남/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