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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화 국적은 아시아입니다
2002-11-15

<광음적고사>부터 <비정성시>까지, 정성일의 대만 영화 유랑기

 

정성일/ 영화평론가

 

나는 85년 두편의 비디오를 통해서 처음 대만 신랑차오(新波電影)를 만났다. <샌드위치 맨>과 <광음적고사>였다. 이 두편의 옴니버스영화에는 허우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 창이, 완젠이 만든 영화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기에 나는 첸카이거의 <황토지>를 보았다. 아직 우리의 시대는 화염병과 거리의 시위와 격문과 걸개그림이 뒤흔들고 있던 ‘위대한’ 80년대였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지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또는 세상을 배우기 위해서는 좋은 스승을 모시는 것이 필요하다. 예술에 대해서 더 잘 알기 위해서는 훌륭한 직관을 지닌 친구를 가져야 한다. 마지막 한마디. 영화에 대해서 좀더 깊이 깨닫기 위해서는 동시대 시네아스트들의 성찰을 진심으로 훔쳐야 한다. 나는 여러분들의 명단을 알지 못한다. 이 자리는 나의 명단을 고백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자문자답. 말하자면 이 글은 그렇게 읽혀야 한다. 또는 이것은 나의 기억에 관한(그저 표지판만을 늘어놓은) 지도 그리기이다.

 나는 80년대 말에 세명의 영화감독을 만났다. 한 사람은 정말 만났고, 다른 두 사람은 그들의 영화를 발견하였다. 한 사람은 임권택이고, 다른 두 사람은 왕가위와 허우샤오시엔이다. 왕가위와 허우샤오시엔을 정말 만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다. 나는 이들 세 사람의 새로운 영화를 기다리고, 그들의 새로운 영화들이 지난 영화들과 만들어내는 그 거리의 너비를 채우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행복하게 그 이후 십년을 버텨왔다. 물론 그동안 홍상수와 김기덕을 만났다. 또는 차이밍량과 아오야마 신지, 허이의 (모든) 영화를 보았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영화를 보았다. 고다르는 여전히 가장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있었고, 에릭 로메르와 자크 리베트는 항상 위대했다. 아르노 데플레생은 심금을 흔들었으며(특히 <에스터 칸>), 다르덴 형제는 자꾸만 다음 영화를 서둘러 기다리게 만든다. 히치콕과 장 르누아르는 거듭 돌아가는 나의 영화적 바탕이다. 하지만 내가 지난 십년 동안 겨우 그 뒷발꿈치를 뒤쫓으며 그들의 그림자 자락을 움켜쥐고 내가 동시대 영화를 진심으로 배운 사람들은 임권택과 왕가위, 그리고 허우샤오시엔이다.

 내게 대만영화의 기억은 바로 그 자리에 있다. 나는 85년 그해 겨울 영국에서 막 돌아온 친구가 보여준 두편의 비디오를 통해서 처음 대만 신랑차오(新波電影)를 만났다. <샌드위치 맨>과 <광음적고사>였다. 이 두편의 옴니버스영화에는 허우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 창이, 완젠이 만든 영화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기에 나는 첸카이거의 <황토지>를 보았다. 아직 우리의 시대는 화염병과 거리의 시위와 격문과 걸개그림이 뒤흔들고 있던 ‘위대한’ 80년대였다. 문화혁명의 하방에서 돌아온 베이징전영학원 졸업생의 이 기이한 사회주의 신파극은 내 마음을 움직였다. 나는 곧 대만영화를 잊었다. 그리고 중국영화를 열심히 찾아보았다. 내 친구들도 그랬다. 그러나 장이모의 <붉은 수수밭>을 보던 날, 나는 중국 제5세대 영화들에게 결별을 결심했다. 이건 사기였기 때문이다. 서방세계를 향해 저 교태를 부리는 역겨운 몸짓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모두들 이 영화가 ‘죽인다’고 말할 때, 나는 그렇게 말하는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과 더이상 영화에 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저 못돼먹었던 이십대!). 그 시간에 나는 서대문에 있는 화양극장에서 좌석이 텅 빈 채 상영되고 있던 ‘후진 제목’의 <열혈남아>를 보고 ‘반쯤 죽었다’. 그리고 왕가위는 90년대 영화의 이름이 될 것이라고 그때 막 미국에서 돌아온 김소영씨와 김홍준 선배에게 거품을 물었다. 그는 나를 속이지 않았다. 그 이듬해 1989년 12월8일 오후 4시에 낭뜨영화제에서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를 정말 숨이 멎을 듯이 보았다. 그때 나는 스물아홉살이었다. 나의 80년대는 거기서 끝났다.

 대만영화의 재발견은 (적어도 나에게는) 허우샤오시엔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의 이름과 함께 따라다니는 시네아스트는 물론 에드워드 양이었다. 그의 <타이페이 스토리>와 <해탄적일천>, 그리고 <공포분자>를 보았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열렬한 지지를 보냈지만, 그 영화들은 안토니오니의 자장 안에 있었다. 또는 빔 벤더스의 타이베이 버전 같았다. 에드워드 양이 정말 자기 영화를 만들어낸 것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서였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상하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오히려 <독립시대>와 <마종>에서 그는 허우샤오시엔이 결코 만들 수 없는 영화를 만들어냈다. 물론 그의 친구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창이와 완젠만이 자기 영화를 만들었지만, 그들조차 누구도 <비정성시>에 버금갈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문제는 허우샤오시엔이 그의 친구들 사이에서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걸작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대만의 새로운 영화들은 모두 허우샤오시엔의 그늘 아래 남겨진 셈이다. 이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허우샤오시엔은 이제 그 자신과 경쟁해야만 했다. 그는 자꾸만 대만과 중국 사이에서 역사의 연속선을 찾아내려고 하였으며(<희몽인생>과 <호남호녀>), 그 안에 남겨진 아버지의 향수가 현재성과 기억 사이의 고리를 찾아 시간을 뒤죽박죽으로 만들면서 그것을 담는 숏의 길이를 점점 늘리고 있었다(<남국재견>). 허우샤오시엔의 긴 숏들은 그 안에 역사가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면서 버틴다. (<해상화>) 그러나 그것이 기억이기 때문에 신과 신 사이의 간격이 점점 더 벌어진다. 그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개벽>과 <서편제>를 거의 같은 시간에 보았다. 또는 <동사서독>과 <중경삼림>을 만났다.

 그러나 대만영화는 역사의 유령과 다투면서 현대성에 대해서 점점 더 눈멀어갔다. 그걸 다시 끌어안은 시네아스트는 화교로 외국을 떠돌다가 타이베이에 온 ‘낯선 이방인’ 차이밍량과 대만 원주민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대만의 허위-정체성을 드러낸 장초치일 것이다. 물론 황밍추안을 잊으면 안 된다. 내 생각에 린첸솅은 가짜이거나, 아니면 허우샤오시엔의 서투른 표절이다. 하지만 포스트 신랑차오들이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들의 숏이 길게 이어지고, 반면 신의 거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은 자꾸만 물러나서 사건을 사유하는 허우샤오시엔의 시네마토그라픽 성찰-모델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오지 못한다는 증거이다. 대만영화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없다. 그 대신 (내 생각에는) 큰형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남매 사이이다. 큰형은 아버지의 무게를 뒤집어쓰고, 하여튼 집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동안 그의 작은 형제자매들은 타이베이 거리를, 금문도를, 남국을 쏘다니면서 총에 맞아 죽거나(<펑크난 타이어>), 그저 하염없이 울거나(<애정만세>), 눈먼 채 거리를 떠돈다(<흑암지광>). 허우샤오시엔이 <밀레니엄 맘보>를 만든 것은 (사람들이 아버지의 자리라고 말하는 것과 달리 내 생각에는) 여전히 형의 자리이다. 하지만 이 큰형은 그들을 충분히 돌보지 못한다. 동생들은 그를 형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파산한 형제 자매이다. 거기서 나는 아무런 미학적-철학적-정치적 연대의식을 지니지 못한 90년대 한국영화의 가계도를 본다. 우리 시대의 일본영화가 오즈와 미조구치, 구로사와, 나루세의 영화로부터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면서, 저 무서운 아버지의 무게를 보면서, 그 반대로 고아의식에 사로잡힌 우리를 돌아볼 때, 한국영화와 대만영화는 기묘한 거울이다. 그들은 해방 이후의 역사를 서로 다르게 살아내기 위해 그렇게 몸부림쳐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내가 민족-국가(the National)영화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은 거기서이다. 나는 저 이상한 동질감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늘 궁금하게 여겨졌다. 나에게는 차이가 문제가 아니라 반복이 문제이다. 대만영화들의 미학이 다시 여기 한국에서 반복되고, 서로 앞서거니 뒤서면서 같은 질문을 하고 있을 때, 거기서 나는 아시아의 공동운명체로서의 역사의 반복을 본다.

 그렇다. 나는 임권택과 왕가위,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를 보면서 대만영화를 생각하고, 홍콩을 돌아보면서 한국영화의 영토 위에서, 결국 아시아영화를 찾아가면서 지난 십년을 버텨낸 것이다. 그것은 아시아에서 살아가는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었다. 그것은 세상은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연대기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영화 지도를 갖고 계십니까? 또는 당신의 영화적 영토는 어디입니까? 아니, 그보다는 이렇게 질문해야 할 것이다. 당신에게 영화의 국적은 어디입니까? 저의 영화 국적은 아시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