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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디 선데이> <티라나 영년> <불확실성의 원리> <월요일 아침>
2002-11-22

<블러디 선데이> Bloody Sunday

영국·아일랜드, 2002년, 110분

감독 폴 그린그래스, 22일 오후5시 대영1

<블러디 선데이>는 북아일랜드에서 벌어진 ‘피의 일요일’ 사건을 정면으로 그려내는 영화다.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분노와 폭력의 근원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를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미시적 수준의 구체성을 담아 묘사한다는 점에서 매우 드문 작품이라 하겠다.

베를린영화제 금곰상 수상작인 <블러디 선데이>는 북아일랜드에서 벌어진 ‘피의 일요일’ 사건을 정면으로 그려내는 영화다.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분노와 폭력의 근원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를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미시적 수준의 구체성을 담아 묘사한다는 점에서 매우 드문 작품이라 하겠다. 1972년 1월30일 북아일랜드의 데리에서 영국 정부의 억압적인 정책에 항의해 시민권을 요구하는 평화 시위가 열린다. 갈수록 높아지는 북아일랜드의 목소리를 경계하고 있던 영국 정부는 수천명의 군인을 파견했고, 이들의 발포로 시위대 중 13명이 사망한다. 이날의 발포는 단지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영국 정부에 대한 아일랜드의 타오르는 분노에 기름을 부으며 훗날의 역사를 뒤바꾸는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갖는다. 영화는 이 사건 직후 수많은 젊은이들이 아일랜드공화군(IRA)에 기꺼이 가입해 테러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영국과 아일랜드의 무장투쟁이 격화됐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얼핏 종군 뉴스기자가 담아낸 화면을 연상케 하는 생생한 이미지로 구성된 <블러디 선데이>의 또다른 미덕은 각기 다른 입장에 처한 4명의 주인공을 내세운다는 점. 영화는 이 평화시위를 주도했다가 돌발 상황을 맞은 이반 쿠퍼 목사를 비롯해, 이 시위에 참여하면서 영국에 대한 적개심과 아일랜드계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북아일랜드 청년 제리, 발포 명령을 내리는 영국군 장교 등으로 시점을 긴박하게 이동하며 사건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해낸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진정으로 살아있는 듯 느껴지게 하는 외적 요소가 있다면, 그건 아직까지도 양자 사이에 증오와 분노의 도화선이 남아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글/문석

<티라나 영년> Tirana Year Zero

알바니아·벨기에·프랑스, 2001년, 89분

감독 파트미르 코치, 22일 오후5시 메가박스5

<티라나 영년>은 낡아빠지고 쓸모없어 보이지만 여러모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니쿠의 트럭처럼, 알바니아에 대한 애정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영화다. 다소 거친 화면과 어수선한 구성이지만, 발칸 반도 영화 특유의 요란스러움과 유머와 판타지가 골고루 섞여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다.

최후의 사회주의 국가 중 하나였던 알바니아를 배경으로, 그곳에 깃든 삶의 모습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 사람들에게 한 가지 꿈을 말하라고 한다면, 모두 입을 모아 “이곳을 떠나는 것”이라고 답한다. 항상적인 물자난과 에너지난에 시달리는 곳이다 보니, 연료가 없어 기차가 중도에 서기도 하며, 정전으로 극장이 암흑 천지가 되기도 하며, 치안마저 불안해 걸핏하면 총을 동네 양아치들이 설치고 있어 이곳은 선량한 사람들이 마음 붙이고 살기엔 너무 힘든 곳이다. 하지만 듬직한 청년 니쿠만큼은 티라나를 끝까지 지키고자 한다. 덩치가 크고 소리가 요란하다는 점에서 닮은 고물 트럭은 니쿠의 진정한 동반자이다. 하지만 또 다른 동반자로 니쿠가 생각하고 있는 애인 클라라마저 이곳을 떠나 파리로 향하려 하자 니쿠는 갈등하게 된다.

<티라나 영년>은 낡아빠지고 쓸모없어 보이지만 여러모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니쿠의 트럭처럼, 알바니아에 대한 애정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영화다. 빈 벙커를 사가려는 서구인이나 마을 곳곳에 쌓인 전쟁의 찌끄러기 등은 이 을씨년스런 도시의 어수선한 풍경을 대변하지만, 니쿠를 비롯한 순박하고 정직한 사람들의 모습만큼은 이 도시에 새로운 희망을 걸게 한다. 정치와 역사의 삐걱이는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것은 결국 진득한 사람들 뿐이라는 듯이 말이다. 다소 거친 화면과 어수선한 구성이지만, 발칸 반도 영화 특유의 요란스러움과 유머와 판타지가 골고루 섞여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다. 지난해 테살로니키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인 골든 알렉산더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1994년작<사망자 명단>으로 몬트리올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받기도 했던 파티미르 코치 감독의 2번째 장편영화.

글/문석

<불확실성의 원리> The Uncertainty Principle

월드 시네마/ 프랑스·포르투갈/ 2002년/ 133분

/ 감독 마누엘 데 올리베이라/ 오후2시 대영시네마3관

여기서 제목을 통해 불려져 나온 하이젠베르크의 유명한 원리는, 삶에 개입하는 우연과 운명에 대한 통찰을 위해 끌어온 메타포다. 그러나 그 비극을 앞에 두고 올리베이라는 웃는다. 그것은 신들이 떠나간 자리에 들어서서 이 모든 우연과 운명의 게임의 질서를 관장하는 이가 다름 아닌 올리베이라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지금 올리베이라만큼이나 그의 신작을 애타게 기다리게끔 만드는 감독은 많지 않다. <불확실성의 원리>는 <프란시스카> <아브라함 계곡> 그리고 <편지>로 이어지는 올리베이라 영화의 계보에 놓일 만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불확실성의 원리>가 보이지 않는 섭리, 혹은 숨은 신의 주사위 놀이에 내맡겨진 여인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인 카밀라라는 여인이 영화 말미에 터뜨리는 기괴한 웃음, 즉 소명에 대한 확신을 잃은 이 잔다르크의 웃음이 가능한 것은, 올리베이라가 그려내 보이는 세계가 결국 만신전도 올림포스도 없는 신화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세계는 더 이상 신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게임판 위에 홀로 남겨진 인간들만의 비극적 세계가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목을 통해 불려져 나온 하이젠베르크의 유명한 원리는, 삶에 개입하는 우연과 운명에 대한 통찰을 위해 끌어온 메타포가 된다. 그러나 그 비극을 앞에 두고 올리베이라는 웃는다. 그것은 신들이 떠나간 자리에 들어서서 이 모든 우연과 운명의 게임의 질서를 관장하는 이가 다름 아닌 올리베이라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한편 <불확실성의 원리>에서 안토니오와 호세, 카밀라와 바네사라는 네 명의 남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은 종종 묘사되기보다는 발화되며 씬과 씬 사이에 생략된 시간은 어느새 인물들이 놓인 상황을 바꾸고 재설정한 것으로 드러나곤 한다. <불확실성의 원리>는 새로운 세기에도 여전히 흐트러짐 없이 자신의 세계를 완성해 나가고 있는 94세의 노대가가 보여주는 신기한 영화이다. 안타까운 것은 <불확실성의 원리>가 점점 시간의 지평선 너머로 다가가고 있는 작가가 만들어낸 영화이자 이해의 지평에 간신히 걸쳐 있는 영화기도 하다는 점이다.

글/유은성

<월요일 아침> Monday Morning

프랑스·이탈리아, 2002년, 120분

감독 오타르 요셀리아니, 22일 오후8시 대영1

24시간을 단위로 반복적인 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과연 탈출구는 있을까? 그루지야 출신 미지의 거장 요셀리아니 감독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이 슬픈 현실을 음영이 강한 블랙 코미디로 그려낸다.

현대인의 삶을 철학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시선에 녹여내는 작품이다. 주인공 뱅상의 삶에 탈출구는 없어 보인다. 거대한 공장의 용접공인 뱅상은 매일같이 꼭두새벽에 일어나 엄청난 시간을 들여 출근한 뒤 공장의 부품처럼 일하다가 무미건조한 가정으로 ‘홈 인’한다. 하지만 귀가는 그에게 탈출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내와 두 아이에게 그는 돈을 찍어내는 공장일 뿐이고, 스트레스 해소용 놀잇감이다. 이처럼 직장과 가정에서 완전히 소외당한 뱅상은 외롭고 비루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다. 어느날 아침, ‘공장 내 금연’이라는 문구가 커다랗게 적혀 있는 공장 문 앞에서 단호하게 발길을 돌린 뱅상은 쳇바퀴같은 일상을 탈출하기 위해 무작정 베니스로 향한다. 아름다운 도시 베니스 또한 탈출구는 아니었다. 소매치기에게 돈을 다 잃어버리고, 아버지의 친구라는 남자의 집에서 몰락한 지배계급의 모습을 본 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카를로를 만나 친구가 된다. 모처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지새운 그는 월요일 아침 허겁지겁 공장을 향해 퍽퍽한 발을 내딛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삶을 발견하고 허탈한 느낌을 갖는다. 결국 그는 뭔가 역동적이며 변화무쌍한 삶을 꿈꾸며 배의 선원이 되기로 결심한다. 8개월 동안의 항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의 가슴 속엔 희망이 있지만, 현실은 여전하다.

24시간을 단위로 반복적인 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과연 탈출구는 있을까? 그루지야 출신 미지의 거장 요셀리아니 감독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이 슬픈 현실을 음영이 강한 블랙 코미디로 그려낸다. 지극히 절제된 대사와 행동으로 웃음과 슬픔의 묘한 교차점을 만들어내는 이 영화는 관조적이며 명상적이지만 리얼리즘적 기반을 느끼게 한다. 올해 베를린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글/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