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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애>,멜로영화인가 재난영화인가
2002-11-28

해방은 어디에?

‘여성주의 다큐 감독’으로 알려진 변영주 감독의 극영화 데뷔작 <밀애>가 ‘격정 멜로’라는 카피를 달고 개봉되었다. 영화는 당연히 ‘여성영화’ 혹은 ‘멜로영화’로 감상/비평되고 있다. 그러나 <밀애>는 결코 여성영화가 아니며, 멜로영화로서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이 영화의 장르는 뜻밖에도 ‘재난을 당해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을 살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여자’를 그린 ‘재난(극복, 그러나 결국 실패) 영화’이다. Oh! Really

물론 <타이타닉>처럼 재난영화이자 멜로영화이고 여성영화인 경우도 있다. <타이타닉>은 거대한 스펙터클의 재난영화이자, 짧지만 평생토록 간직될 운명적 사랑을 그린 멜로영화이고, 한 여자가 자유로운 자의식에 눈을 뜨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도정을 보여준 여성영화이다. <밀애>의 그녀는 사고와 연애를 통해 어떤 진실을 깨달았으며, 어떤 해방을 맛보았는가 “그래, 어찌 됐든 죽거나, 미치거나, 혹은 죽거나 미친 것과 다름없는 삶을 사는 것보다는 성장이고, 성공이야… 아예 뭐라고요 ‘해∼방’이라뇨 그게 무슨 뜻이죠”

왜 여성영화가 아닌가? - 남성중심의 매춘적 성담론

그녀는 “온몸이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는 그의 말에 자신감을 얻는다. 그러나 남자에 의해 재평가받아 획득되는 자신감은 열등감으로부터의 회복일 뿐 성적 자아의 각성이 아니다. 대체 “통째로 빨아들이는…” 그녀들의 흡입력은 누구를 위한 기능, 혹은 효용인가 성의학적 견지에서, 오르가슴에 도달한 질의 율동적인 수축은 남근을 통째로 빨아들이는 작용을 하며, 사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렇다면 ‘섹스란 남자는 사정을, 여자는 오르가슴을 목표로 경주하며 상호 서비스를 교환하는 과정’인가 아니다. 오히려 섹스의 성의학적 함의는 여성의 흥분이 직접 남성의 극치감을 유도한다는 것이요, ‘섹스란 직접적인 극치감의 교류, 혹은 공유의 과정’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직접적인 상호교감의 과정에는 “내가 잘했나요” 따위의 질문은 필요없다. 섹스란 ‘나/너가 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것’이요, ‘내가 느끼는 바로 이것을 동시에 네가 느끼는 것’이라야 한다. 흔히 ‘잘한다’는 ‘변강쇠/옹녀’적 담론은 상대를 기능적 객체로 전락시키며, 심각한 소외를 양산한다. 또한 성기 중심의 페티시적 섹스관에는 여성이 아닌 암컷, 아니 하나의 거대한 구멍만이 남게 된다.

외람되게도 이 영화의 성기 중심적이고 기능적인 성담론은 “여성들이여 ‘예쁜’ 성적 대상에 머물지 말고 ‘잘 빠는’ 성적 주체, 아니 ‘잘 빠는’ 거대한 구멍이 되어 남자들을 만족시키고 그들로부터 인정받자!”는 것으로 귀결된다. ‘여성의 오르가슴을 위하여 더 많은 애무를!’을 주제로 삼았던 <결혼 이야기>가 10년 전에 나왔고, 비록 도구적이고, 성기 중심적이지만 (남성에 의한 인정이 아닌) 여성의 자족적 성을 강조하였던 <처녀들의 저녁식사>로부터 몇보나 후퇴한 이 영화를 단지 유부녀 혼외정사를 다루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의 성적 해방을 논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가(정부는~ <애마부인> 시리즈를 재평가하라! 재평가하라!) 남성에 의해 평가되는 여성의 ‘성기적 기능론’은 온몸의 성감이 오로지 성기로만 집중된 남성들에게 복무하는 남성 중심의 매춘적 성담론이자, 소외된 성담론이다. 남자는 여자를 빨판으로, 여자는 남자를 몽둥이로, 즉 살아 있는 자위기구로 보는 성, 나아가 음경확대시술과 질괄약근수축시술을 받아 모두모두 ‘잘하게 되는’ 성을 우리가 꿈꾸는가 소외가 아닌 해방을 지향한다면 성기적 성이 아닌 전신적 성, 나아가 전인적 성을 논해야 하지 않는가

‘악하고 나쁘고 못된’ 게 아니라 ‘약하고 아프고 못난’ 그녀

그녀는 선배였던 남자에게 찍혀서 졸업하자마자 결혼하였고, 믿었던 남편에 의해 치유할 수 없는 외상을 입어 한동안 좀비처럼 살다가(그녀가 가사노동을 소홀히 하는 것은 모든 생활을 방기하게 되었다는 것이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침내 ‘엥꼬’가 난다. 길 가던 남자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은 그녀는 얼빠진 상태를 눈여겨본 그에게 찜당해 섹스를 하게 되고 자신의 성적 ‘기능’을 재평가받는다. 빤짝 정신이 들어 잠시 생기를 되찾은 그녀는 그 특별한 남자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거절당하자 꿩 대신 닭이라고 남편과 잔다. 코딱지만한 동네에서 윗집 남자와 뒹굴며 좋아라 하다가 “너무 멀리 온 탓으로” 동네방네 소문나고, 남편에게 들킨다. 잠시 오리발을 내밀어보았으나 소용없었고, 흠씬 두들겨맞고 가정과 아이에 대한 아무런 권리도 없이 쫓겨나자, 애인을 불러내 질질 짠다. 사태가 이리 된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그다지 새로운 희망을 품지도 않는 그와 대책 없이 떠나보려 하였으나 운명의 장난으로 남자는 죽고 그녀 혼자 남는다.

자… 여기서 그녀는 어떤 주체적 선택을 하였으며, 어떤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가 그녀의 마지막 내레이션 “어느 때보다 활기차고…”는 어떤 장면으로부터 감지/유추되는가 그녀는 자발적으로 가족주의를 깨부수며 금기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는가 불행하게도 그녀의 모든 삶은 남자의 선택과 버림으로 점철된 삶이요, 남성 중심 사회와 운명(<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 “하느님도 남자더라”라는 대사가 나온다)에 의해 등떠밀려온 삶이다. 그녀는 무엇을 쫓아, 무엇을 위반하였는가 성기의 성능을 인정해준 특별한 남자와의 섹스를 위해, 언제부터 하찮아 죽겠다고 생각한 그놈의 가정의 울타리를 담치기 했을 뿐이다(<우묵배미의 사랑>의 최명길보다 뭐가 더 나은가). 그녀가 처음 남편으로부터 상처받았을 때, 그와의 섹스를 통해 뭔가를 느꼈을 때, 하다못해 온천장 앞에서 남편과 딱 마주쳤을 때 그녀가 먼저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하였나 신뢰가 파탄난 가정에서 멍~하니 살다가, 맞바람을 피우면서 온갖 거짓말과 변명을 너절하게 늘어놓다가, 끝까지 “목욕하러… 한 시간 전에…”라며 발뺌하는 그녀, 먼저 쪽박을 깬 게 누군데 손찌검이냐고, 내가 무슨 죽을죄로 내 딸도 못 만날까보냐고 맞붙지 못하고 딸의 사진이 없다며 신파를 연출하는 그녀에게 무엇을 기대하랴

그녀는 그와의 관계를 통해 무엇을 깨달았을까 과연 성을 통해 자아에 새롭게 눈뜨고, 성 혹은 사랑, 남녀관계 등을 일반화하고, 객관화하여 상처를 치유함은 물론 이후 확장된 사회관계에서 누구와도 능동적으로 사랑할 수 있으며, 당당하게 살 수 있게 되었나 그와의 눈물의 마지막 섹스는 ‘엉클어진 상황에 대한 피차에 대책없음’의 정서이지, 결코 희망 혹은 해방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의 사회적으로 변화된 삶은 감지되지 않는다. 그녀는 살아생전에는 그에게 집착하였고, 그 남자가 죽고 나니 “내 생에 꼭 하나뿐일 특별한 그”를 추억하며 살 것 같다. 처량하고 궁상맞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악하고, 나쁘고, 못된 여자”가 되지 못하고, “약하고, 아프고, 못난 여자”에 불과한 그녀를 젖혀두고 누구 탓을 하랴마는, 그녀가 만난 놈은 디카프리오가 아니었던 것이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똥폼 잡는 그

그는 게임을 제안해놓고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감정 기복에 쩔쩔매며, 이를 감추느라 시종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는 권태를 냉소로 치환해낸 쿨한 사내가 아니라, 절망과 혼돈의 와중에서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는 불안정한 남자이다. 그는 결혼이니 사랑이니 섹스에 대해 객관화하지도 못한 채, ‘어떤’ 실패를 반추하며, 자신의 불행과 허무의식을 상대에게 투사시키는 인물이다(356호에 기술한 자신의 입장과 한계를 명확히 하며 애인에게 결혼문제까지 상담해준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감우성, 혹은 묻지마 섹스를 즐기며 강수연의 팬티까지 빨아주며, 그녀를 프로로 키워내는 <그대 안의 블루>의 안성기와는 생판 다르다). 그는 “이런 건 가벼워야 하는데…”라고 짐짓 아는 척을 하였으나, 자신은 천근만근이다. 그가 게임에서 이겨본 적이 있기나 한 걸까 아니 넋나간 그녀말고 그런 재수없는 칙칙한 표정으로 입으로만 가벼운 게임을 제안하는 그에게 걸려든 여자가 또 있었을까

그의 장기는 오직 하나이다. 애무를 꼼꼼히 하고, 오럴을 해주며, 관계 중에나, 관계 뒤에 여자의 성기를 칭찬하는 “섹스매너가 좋은 남자”라는 점이다. 그녀는 그의 애무에 성감이 살아나고, 그가 ‘성기의 생김새와 기능’을 칭찬하자 자존심이 고양되어 희색이 만연해진다. 물론 그 바람에 그녀가 죽은 거나 진배없는 삶 속에서 살아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뿐이다! 게임을 제안한 그는 맥없이 무너져 자기 감정도 게임의 페이스도 추스르지 못한다. 결국 “너무 멀리 왔다”며 실패를 자인하는 그는 “너와 나는 예전에 품었던 가정에 대한 희망으로 돌아갈 수 없고… 다시 반복될 것이고…”를 읊조리지만, 애당초 그는 그녀에게 삶의 희망을 제시하기는커녕 자기 앞가림도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타이타닉>에서 여자의 가슴 속 열정을 발견하여 이끌어내고, 그녀의 아름다운 (성기가 아닌) 전신을 훑듯이 그려주고, 그녀의 함께 살고자 고군분투하다, 죽으면서까지 “반드시 살아남아… 원하는 모든 것을 다해보고, 손주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하게 죽으라”는 축복의 훈화말씀을 남겼던 디카프리오와 비교해보라. 하기야 남편 복 없는 년이 애인 복이나 있을라구

그러나, 해방은 어디에

이 영화는 스위트 홈의 꿈이 개박살나는 재난을 당해 좀비가 된 여자와 무슨 재난을 당했는지는 모르겠으되 허망해진 남자의 출구없는 연애담이자, 재난 극복(결국은 실패)기 이다.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그녀가 품고 살아갈 희망은 무엇인가 “내 성기가 예쁘고 쓸 만하다는 남자가 있었다네… 그 남자는 죽고 나는 집에서 쫓겨났지만 외롭지 않네… 내 성기는 내 자존심의 근간이라네…” 노래를 부를 그녀에게 유머 하나를 들려주고 싶다. 소대장의 훈시, “기쁜 소식 한 가지와 나쁜 소식 한 가지를 전하겠다. 기쁜 소식은 ‘모두 팬티를 갈아입는다!’와~ 나쁜 소식은 ‘김 상병은 이 일병 것으로, 이 일병은 박 이병 것으로 갈아입는다’. 실시!” 갈아입긴 하였으나 새 팬티가 아니다. 살아나긴 하였으나 새 삶이 아니다. 해방은 어디 있는가?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chingmee@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