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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판타지를 돌려줘!
2002-12-11

조선희의 이창

나는 각종 음모론들을 잘 안 믿는 편이지만 영화나 소설에서 성애묘사가 일대 장관을 이루는 걸 볼 때마다 혹시 모종의 음모가 배후에 작용하는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그러니까 섹스판타지라는 것이 영화나 소설 같은 ‘허구(虛構)산업’의 흥행전략에 의해 개발되고 장려되고 번창하는 건 아닐까. 섹스판타지는 그것으로 짭짤한 재미를 보는 자들에 의해 지나치게 과장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쉽게 자주 매번 침대 위에서 그처럼 절정의 판타지가 구현될 수 있단 말인가.

올해 칸영화제 이래 <죽어도 좋아>에 관한 기사들을 보면서 나는 드디어 흥행산업의 배후조종자들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러 나섰구나, 하고 생각했다. 성인 남자들을 다 골초로 만들어놓은 담배산업이 여자들에게 담배를 가르치면서 청소년들에게 조심스럽게 담배를 권하기 시작했던 것처럼, 흥행산업도 섹스판타지의 사각지대를 공략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70대 노인계층, 그것은 정말이지 상식의 허를 찌르는 바 있었다. 음모치고도 아주 기습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 시사회에서 <죽어도 좋아>를 관람하게 됐을 때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무슨 저런 판타지가 다 있어 저 배후에 어떤 음모가 있다면 필경, 섹스판타지를 고무하는 쪽이 아니라 분쇄하는 음모일 거야. 섹스판타지를 건설하기는커녕 다 파괴하고 있잖아.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불안불안했는데 영화관을 나온 뒤에야 불안의 정체를 깨달았다. 내게도 소정의 섹스판타지가 존재했다면 영화를 보는 동안 그것이 산산조각나버린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부르짖었다. “에이, 이 징한 리얼리즘! 제발 내게 판타지를 돌려줘!”

나도 최근에 어디서 들은 얘기다. 어떤 부부가 잠자리를 하는데 모처럼 오르가슴에 도달했다. 남편이 “당신 누구 생각했어”라고 묻자 아내가 “당신부터 말해!”라고 했다 한다. 그들이 누굴 생각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ㅇ재, 채ㅇ라, 뭐 그런 인물들을 생각했을까. 분명한 건, 판타지에는 상상의 자유가 허용되며, 환상은 아무런 비용도 피해자도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죽어도 좋아>는 가혹하게도 우리의 공짜 판타지를 자기검열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모두 <밀애>를 꿈꾸지만 현실은 왠지 <죽어도 좋아>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불길함을 떨치기 힘든 것이다.

이른 겨울추위가 막 닥쳐왔던 10월 말, 모처럼 과음을 한 나는 어떤 술집 시멘트바닥을 침대로 착각하고 잠시 눈을 붙였는데 그 후유증으로 2주일 동안 몸살감기가 들락날락했다. 내가 한 친구에게 “마음은 김완선인데 몸은 김정구”라고 했더니, 이 친구가 혀를 쯧쯧 차면서 이렇게 말했다. “언제 적 김완선이야. 그리고 김정구 선생은 돌아가셨어.” 한때 유행했던 그 수사법도 어느새 나와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나는 올해 우리 나이로 마흔셋인데, 이런 사실로 미루어 <죽어도 좋아>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상은 중년 이상의 남녀가 아닐까 짐작된다. 등급위는 언제나 청소년들을 걱정해서 등급을 까다롭게 구분하지만 이 영화의 경우는 그 반대였어야 했다. 실제로 젊거나 또는 스스로 젊다고 생각하는 부류에게 이 영화는 하나의 또 다른 판타지일 뿐이다. <죽어도 좋아>의 경우, 그 과도한 리얼리즘으로 인해 간혹 관람에 따른 부작용이 발생한다면, 그건 거의 전적으로 중년에서 노년에 이르는 계층이다.

이 영화는 지난 7월부터 등급위가 두 차례나 ‘제한상영가’ 등급을 내줘서 사실상 개봉을 금지시켰는데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나는 그 소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명쾌한 결론을 얻게 되었다. 이 영화에 등급을 내주길 거부했거나, 비판적인 평이나 기사를 썼거나, 자기 극장에 간판을 달기를 거부했거나, 그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동기가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을 것이다. “제발, 내게서 판타지를 빼앗아가지 말아줘. 리얼리즘으로 나를 괴롭히지 말아줘.”

우리에게 판타지를 돌려줘. 베드신을 찍을 때는 반드시 할리우드 고전시대 영화들이 여배우를 클로즈업할 때 사용하던 필터를 써서 화면을 뽀시시하게 만들어줄 것이며, 진행을 돕는 쌍방간의 실무적인 대사들을 좀 생략하고 대신 환락의 신음소리와 더불어 실내악 소곡을 배경에 은은히 깔아줄 것이며, 주연배우는 장삼이사의 남녀들과는 현격히 차별화되는 팔등신의 미남미녀로 캐스팅할 것이며….조선희/ 소설가·전 <씨네21>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