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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옆집 아가씨가 지킨다?,새로운 여성영웅 <킴 파서블>
2002-12-26

anivision

여성 영웅들을 한번 꼽아보자. 귀밝은 ‘소머즈’와 고혹적인 미소의 ‘원더 우먼’. 그리고 근육질의 ‘소냐’와 재기발랄한 ‘미녀 삼총사’. 아, 두툼한 입술의 ‘툼레이더’도 빼놓을 수 없다. 거의 마초 스타일로 힘만 앞세우는 남성 영웅들과는 달리, 여성 영웅들은 때론 그 존재만으로도 강력한 무기가 된다.

디즈니는 지난 6월 미국 텔레비전을 통해 여성 영웅들의 대열에 이름 하나를 새로 등록했다. ‘킴 파서블’(Kim Possible). 열다섯살난 여고 2년생이다. 나이가 어리다고 얕보면 곤란하다. 학교 과제물 준비와 교내 치어리더 연습에 바쁘고, 새 옷을 사고 싶어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도 빠질 수 없는 평범한 학생이지만 악당 드라켄이 출몰하면 금세 지구를 지키는 여전사가 된다.

이런 일상성과 환상을 넘나드는 이야기 구조야말로 <킴 파서블>만의 매력으로 보인다. ‘옆집 사는 처녀’(어느새 누나라고 부를 수 없는 나이가 돼버렸다!) 같은 평범함에 스노 보드, 스케이트 보드, 암벽 등반, 공중제비 돌기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아주 적절히 배합하고 있다. 지금까지 미키 마우스나 푸 같은 전통적인 캐릭터에 안주하는 것처럼 보였던 디즈니가 어떤 변신을 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지난 7일부터 주말마다 위성방송인 스카이라이프의 디즈니채널(CH 654)을 통해 방영되는 그녀의 활약을 보고 있으면 이 작품의 독특함을 금세 느낄 수 있다. 배꼽이 드러나는 탱크톱에 헐렁한 힙합바지를 입은 눈 큰 소녀 킴에게는 우선 악당을 물리치기 위한 특별한 장비가 없다. ‘007’에게 첨단 무기를 전해주는 닥터 Q처럼, 악당 드라켄의 출현을 알리고 새로운 장비를 전해주는 10살짜리 천재소년 웨이드가 있긴 하지만, 그 장비라는 것도 헤어드라이어 모양의 갈고리이거나 특수유리가 부착된 콤팩트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자동차 번호판을 떼어내 부메랑처럼 날리거나 친구들의 도움을 얻어 악당 드라켄을 제거하는 킴의 모습은 여자 맥가이버쪽에 가깝다.

그녀의 남자친구 론은 평소엔 어리숙한 덜렁이지만, 마음속 깊숙히 킴을 신뢰하고 결정적인 상황에서 킴을 도와주는 역할을 해낸다. 그래서 눈치빠른 시청자들은 작품이 론이 있음으로써 킴의 활약이 종결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된다. 백마 탄 왕자가 등장하는 가부장적 구조의 사고를 디즈니가 여전히 끌어안고 있지 않느냐는 지적이 나올 법한 대목인 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젊은이들의 건강한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킴과 론의 학교생활은 지극히 모범적이다. 킴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 역시 전형적인 중산층의 모습이다. 크리스티나 밀리안이 부른 주제곡 <Call Me, Beep Me>는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진지한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경쾌한 음악으로 풀어낸다.

디즈니에서 14년간 일해온 베테랑 감독 크리스 베일리는 <인어공주> <라이온 킹> <헤라클레스> 등의 제작에 참여한 애니메이션 제작 경험과 실사영화 <가제트 형사> 등을 만든 특수효과 노하우, 뮤직비디오와 독립단편영화 등을 만들어오며 익힌 재주를 이 작품에서 유감없이 발휘한다. 숙련된 조각가의 두툼한 손 안에 들어 있는 도자기처럼, 자연스런 화면에서 느껴지는 농익은 연출력은 지난 3/4분기 미국에서 이 작품에 200만통이 넘는 이메일이 답지하게 만든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엔딩 크레딧에서는 국내 한 업체의 이름과 익숙한 한국식 영어이름 십 여개를 찾을 수 있다. 외국 작품에 등장하는 한국 이름을 보고 괜스레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이 치졸한 애국심 아니냐고 한다면 굳이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정형모/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hy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