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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의 배우 이자벨 위페르의 매력 탐구 [2]
2002-12-27

얼음의 외면, 불꽃의 내면

클로드 샤브롤 영화에서 이자벨 위페르는 결코 요조숙녀일 수 없다. 언제나 스스로 죽어가거나 누군가를 죽이는 악녀 이미지의 위페르는 결국 자기 파괴적 공격욕의 화신으로 주변의 사람들에게 일을 벌이고야 마는데, 그러한 가운데 드러나는 이자벨 자신의 균열과 살의는 결국 샤브롤이 겨냥한 부르주아적인 삶의 균열을 드러내는 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작용하게 된다. 나치 점령기에 불법 낙태와 매춘을 하며 정부와 놀아나는 지독한 여자 위페르나 고고하고 순진한 척하지만 약아빠진 습성이 몸에 밴 <초콜렛 고마워>의 이자벨 위페르를 어떤 여배우가 따라올 수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그녀의 눈빛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눈빛은 타락과 속물 근성에 젖어도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를 온전히 밀쳐낼 수 없게 만드는 촛농 속의 심지처럼 반짝인다. 그녀의 눈빛이 반짝일 때, 샤브롤이 만든 <마담 보봐리>는 단지 사랑에 대한 환상에 빠져 인생을 그르치는 부도덕한 엠마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자본주의의 희생양, 걸음마단계의 부르주아의 경제체제 논리에 따라 자신의 삶을 파산으로 몰고 간 한 여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샤브롤과 위페르의 공동 작업의 최고는 문맹 가정부 친구와 함께 일가족을 몰살한 우체국 직원 역을 맡았던 <의식>일 것이다. 여기서 샤브롤이 말하는 역전된 브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관계는 평소 도식화된 타락한 부르주아 들에 익숙해 있는 관객에게는 뒤통수를 치는 반전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게 된다. 위페르의 무표정하지만 아이 같은 연약함은 두 여인이 느끼는 중산층에 대한 공동의 살의와 질투와 결합되면서 영화 후반부 갑자기 무시무시한 폭발력을 지니게 되는데, 위페르와 상드린 보네르 콤비의 무표정하면서도 냉소적인 웃음은 이들의 문맹이 결코 동정어린 부르주아의 자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상기시킨다.

90년대 들어 위페르는 예전과 달리 좀더 편안하지만 여전히 독립적이고 남자를 조정할 줄 아는 중년 여성 역할도 맡으면서 이미지를 완화해가고 있다. 흐르는 세월은 그녀의 순진함 대신 냉철한 이성과 지성을 연마하는 쪽으로 나아갔고 이러한 점은 오히려 그녀가 중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성적 긴장감을 잃지 않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일본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 소설을 각색한 <육체의 학교>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위페르는 젊은 남자를 차지하려는 중년 여인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내 보인다. 위페르는 화장기 없이 늙고 피로한 기색을 보이지만, 이 영화에서 그녀는 중년이 되어도 어쩔 수 없이 육신을 지피는 욕정과 소유의 욕망 그리고 그 가운데 황량해져가는 중년 여인의 초상을 그윽하게 소화해냈다.

최근에 위페르는 다시 한번 깜짝 놀랄 만한 연기 변신을 통해 관객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예정이다. 프랑수아 오종의 화제작 에서 그녀는 전설적인 프랑스 여배우 다니엘 다리외와 카트린 드뇌브, 에마뉘엘 베아르 등과 나란히 출연한다. 이 영화에서 위페르는 죽은 남자와는 처제뻘인 기숙사 사감 같은 신경질적인 얼굴에 나비 안경을 쓴 오귀스틴으로 분했다. 감독 오종은 이 영화에서 여배우라는 아이콘에 붙여진 모든 이데올로기를 유머러스하게 전복시키는데 신경질적이며 주책맞은 오귀스틴은 평소 우아한 위페르에게서 사람들이 기대했던 모든 것을 뒤엎는 악동 감독의 장난인 것만 같다. 특히 에서 각 여배우들은 자신의 본질을 내보일 수 있는 단 한편의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여기서 위페르는 <개인적인 메시지>라는 샹송을 부르며 산다는 것의 의미를 반추시키는 색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눈과 손만을 이용하여 내면의 고독을 이야기하는 미니멀한 연기는 그녀가 왜 당대의 최고 배우일 수밖에 없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한 컷이기도 하다.

▣ 위대한 어머니의 좋은 나이, 오십

이제 이자벨 위페르는 오십을 바라본다. 세 아이의 어머니이자 카트린 드뇌브와 함께 프랑스영화의 ‘그랑 담’, 즉 ‘위대한 어머니’로 손꼽히며 16번 칸영화제 본선에 오른 이 여배우는 이자벨 아자니와 함께 프랑스 영화계를 이끌어가는 영원한 현역으로 뛰고 있는 행운도 함께 누리고 있다. 오히려 그녀의 색채가 상대적으로 다양하고 그녀의 얼굴이 평범한 편에 속한다는 사실은 관객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그녀의 연기에 질리지 않을 수 있는 그녀만의 행운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불어를 말하고 프랑스에서 태어났다는 것 역시도 행운일지도. 의 시사회가 있는 날, 또 한편의 영화 앨버트 브룩스의 <뮤즈>가 극장에서 선보였다. 여기에서 위페르와 비슷한 연배의 샤론 스톤은 약간은 얼이 빠진 I.Q 80짜리처럼 보이는 멕 라이언 흉내를 내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는데 아마 앞으로도 이자벨 위페르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에 개봉할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는 그녀 연기의 화룡점정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피아니스트>에서 그녀의 육체는 그녀의 감정과 마찬가지로 피아노의 검은 관처럼 그녀를 내리누른다. <피아니스트>가 자아내는 불편함 중의 하나는 기실 보는 여자, 즉 보는 남자가 아닌 포르노를 관음하는 여자가 바로 그 우아하고 아름다운 이자벨 위페르라는 데 있을 것이다. 그녀를 예술가로 교수로 사회적 지위가 있는 피아니스트로 사랑하는 어린 제자 발터는 끊임없이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하네케의 <피아니스트>에서 이자벨 위페르에게는 <육체의 학교>에서 보이는 달콤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던 남자가 요구하는 삽입성교는 결국 페니스 중심의 관통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고 그것은 결국 강간이라는 후자 형태의 폭력과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 입증된다. 인간의 심연을 연주하는 이자벨 위페르의 육신은 이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시대를 막론한 소외와 억압을 증거하는 시대의 장소가 되었다.

위페르는 지금도 부지런히 영화를 찍고 있다. 우리에게 <피아니스트>가 다가갈 즈음이면 그녀는 이미 <약속된 삶>과 미카엘 하네케의 차기작을 찍고 있는 중일 것이다. 영원한 ‘눈과 불’의 여신으로 비록 위페르가 얼음성에 갇힌 공주처럼 보일지라도 그녀를 위해 백마를 타고 달려가지는 말지어다. 이미 그녀의 인생과 연기가 보여주었듯이 그녀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여성이며, 죽는 날까지 최고의 연기를 펼칠 멋진 프랑스 여자가 틀림없으니까.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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