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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
2002-12-31

신경숙의 이창

대통령선거가 있기 전 어느 하루. 삼청동에서 아는 사람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약속시간이 다 되었는데 나는 그곳에 도착하지 못하고 거리에 서 있었다. 일본에서 온 번역가와 상의할 일이 있어서 그를 만나려고 명동에 나왔다가 촛불시위대와 마주친 거였다. 번역가를 만났던 롯데백화점 주위에는 마침 백화점이 세일기간이라 쇼핑을 하러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삼청동 약속시간으로부터 시간이 얼마간 남아 있다고 생각한 나는 번역가와 헤어지고 잠시 백화점 1층을 기웃거려봤다. 세일기간이라고 하니 아버지 모자나 한개 살까 싶었던 것이다. 머리숱이 별로 없으셔서 겨울이면 늘 모자를 새로 사드리곤 했는데 올해는 어찌된 셈인지 12월이 다 가도록 여유롭게 모자 하나 살 짬이 없었다. 모자가게를 찾아보려 했다가 나는 그만 인파에 밀려 이리저리 쓸려다니다가 겨우 빠져나왔다. 빠져나오기가 더 힘들 정도로 백화점 안은 인파로 북새통이었다. 안만 그런 게 아니라 바깥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에 떠밀려 택시를 잡을 수도 버스를 탈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차라리 시청쪽으로 나가면 택시를 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그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 촛불 시위대를 만났다. 연일 매스컴에서 주시했던 촛불의 행렬을 바로 눈앞에서 마주치게 되니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춰졌다. 모두들 시위하는 사람들답지 않게 표정들이 밝았다. 여자친구의 목에 목도리를 감아주는 남자도 눈에 띄었고 엄마 손을 잡고 있는 꼬마도 보였으며, 프라자호텔 꼭대기에는 취재에 여념이 없는 외신기자들이 보였다. 날이 추운데도 추운 줄 모르는 것 같은 사람들 속에 하염없이 섞여 있다가 뒤늦게야 나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이 생각나 다시 인파를 헤치고 걸어나왔다. 경찰차가 이중으로 길을 막고 있어 그곳에서도 택시를 잡는다는 것은 백화점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능하지가 않은 일이었다. 걸어가자, 생각하며 광화문쪽으로 걸어나오는 내내 내 어깨에 부딪치는 것은 시청쪽을 향해 걸어가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의 모자에 웃옷에 혹은 들고 있는 피켓에 써 있는 문구들을 읽느라, 초를 파는 아저씨가 여학생 서넛이 지나가면 초 세개를 한꺼번에 사면 싸게 해주겠다고 말하는 걸 구경하느라 내 발걸음은 한없이 느려졌다. 프레스센터 앞을 지나고 지하도를 건너고 교보문고 앞을 지나고 한국일보쪽으로 하여 사간동으로 들어설 때까지 내 앞을 가로막으며 돌아가라는 경찰들로 하여 자꾸 방향을 바꾸고 바꾸어야 했다. 그날 따라 발에 큰 신발을 신고 나간 참이라 자꾸 미끄러지며 삼청동으로 걸어오는 동안 비슷한 시간대에 마주친 백화점 쇼핑객들과 촛불시위대의 너무나 다른 모습에 마음이 착잡했다.

대통령선거가 끝난 뒤에 사람을 만나거나 전화통화를 하게 되면 으레 선거 후일담이 화제가 된다. 선거 다음날 택시를 타고 어딘가를 가야 했다. 구기동에서 나를 태운 택시기사가 대뜸 “손님은 좋은 동네에 사니까 2번 안 찍었겠네” 하더니 내가 뭐라 할 틈도 없이 곧 자기는 자신이 투표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며 얼마나 흥을 내는지 곁에 있는 사람조차 들뜰 지경이었다. 기쁨을 감출 수가 없는 게 역력했다. 산이 있어 여기 살 뿐이요, 내 혼잣말을 그가 들었을 리 만무하다. 이따금 김밥을 사러 가면 글은 잘돼요 느닷없는 질문을 해서 나를 당황시키기도 하는 김밥 파는 아주머니도 웃음꽃이 만발해 있긴 마찬가지였다. 늘 별 말씀이 없으신 시골 부모님조차 기쁜 목소리를 내는 걸 듣는 요즘이다.

화제에서 빠지지 않는 이야기는 선거날을 한 시간 반 앞두고 지지를 철회한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친구 하나는 그 일로 새벽 6시까지 잠을 못 이루었다고 했다. 이제 사십대에 접어드는 아는 시인은 전날 밤에 생긴 일 때문에 자신은 아침 일찍 투표를 한 다음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친한 선배의 투표를 저지하기 위해 그 선배네 집에 찾아가 하루종일 노닥거리다 왔다고 한다.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직도 불타고 있는 어떤 열망이 한편으로 감동적이고 다른 한편으로 착잡하면서도 안쓰러웠다. 신경숙/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