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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과 일출
2003-01-15

신경숙의 이창

후배가 12월31일에 충청도 외목마을로 일출을 보러가자고 했다. 일출이라는 말만 들으면 먼저 떠오르는 기억. 칠, 팔년 전의 일이다. 그때는 주변에 운전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니, 없었다. 그런 때에 아는 남자가 자기 친구가 차가 있어 일출을 보러갈 생각인데 생각이 있으면 함께 가자고 했다. 1월1일 신 새벽에 동해에서 보는 일출이라. 근사할 것 같았다. 앞뒤 생각도 없이 나도 여자친구를 동행하고 12월31일 밤 11시쯤 길을 떠났다. 부푼 마음과는 상관없이 고속도로 진입할 때부터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동해 근처에는 가지도 못했는데 날이 밝아왔다. 게다가 그 조그만 프라이드는 히터가 고장나 있었다. 얼마나 추웠는지. 친구와 나는 뒷좌석에서 몸을 껴안다시피 하고선 발발 떨다가 겨우 잠들었다가 너무나 추워서 다시 깨어나 발발 떨곤 했다. 일출은커녕 경포대에 도착하니 다음날 정오 무렵이었다. 당연히 운전자는 지쳐 있었다. 그이밖에는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운전자의 마음 안 상하게 하려고 추워서 입이 얼어붙을 지경인데도 웃다보면 이가 턱턱 부딪쳤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운전자를 온천장에 밀어넣고 우리는 그가 나올 동안 달리기를 했던가 어쨌던가. 돌아오는 길 또한 얼마나 차가 밀리던지. 그래도 우리는 뒷좌석에서 졸거나 잘 수나 있지 운전자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해뜨는 건 보지도 못하고 헤매다 돌아와 보니 1월2일 아침이었다. 어찌나 허망하고 피곤했던지.

그걸 잊고는 이번에 또 길을 떠났다.

후배는 지지난해 12월31일 밤에 외목마을에 가봤는데 그때 길이 전혀 밀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적하기까지 했다고 했다. 서해에서 무슨 해가 뜨냐고 하니 그 마을에서는 뜬단다. 본인이 직접 봤다는데야 어찌 안 믿겠는가. 아직 외목마을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후배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요즘 심신이 메말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가득이기도 했다. 게다가 마흔에 이를 때까지 아직 1월1일 바닷가에서 떠오르는 해를 본 적이 없으니. 후배와 시간을 맞추기 위해 저녁 8시에 시작해서 11시에 끝나는 영화를 보고는 홍익대 근처의 찻집에서 일을 끝내고 나오는 후배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밤거리에서 오뎅까지 사먹고는 길을 떠났다. 후배 말대로 자동차는 수월하게 서울을 빠져나갔다. 서해대교까지도 무사히 제 속도를 내며 갔다. 어느 틈에 깜박 졸다가 깨어보니 후배가 자동차를 세워놓고 있었다. 그제야 살펴보니 이게 웬일인가. 자동차는 오도가도 못한 채로 그냥 서 있고 도로 옆 길가에도 차량들이 빈틈없이 차를 주차시켜놓고 있었다. 후배가 바깥으로 나가 사정을 살펴보고 오더니 하는 말. 외목마을은 아직 4, 5km가 남았는데 차가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 채 정체되어 있는 걸 보니 그곳까지 꽉 찬 모양이란다. 도로 옆길에 세워놓은 차들은 뭐냐 물으니 그 자리에서라도 해뜨는 모습을 보려는 사람들인 모양이란다. 아니 무슨 사람들이 죄다 길에 나와 있나 하려다가 하긴 나도 나와 있으니, 싶어 말았다. 후배는 어찌하면 좋겠는가 물었다. 그때서야 몇해 전의 악몽이 되살아난 나는 어찌하긴, 돌아가자, 했다. 어서 돌아가 내일 아침이라도 편하게 맞이하자. 정말요 되묻는 후배에게 돌아가는 게 최선이다, 머뭇거리다간 내일까지 계속 길에 서 있게 된다, 채근했다. 후배는 그래도 이대로 돌아간다는 게 아쉬운 모양이었다. 우리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우리 뒤로 자동차들이 연이어 줄을 섰다.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를 줄이었다. 차를 돌려오면서 보니 도로 옆에 세워놓은 자동차의 행렬도 몇 km가 이어졌다. 그저 갔던 길을 돌아왔을 뿐인데 아침 6시.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도 평소의 아침과는 달리 차량들이 줄을 서 있었다. 북한산에 올라가 새해 아침을 맞이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서였다. 강추위를 뚫고 산에 올라가는 사람들을 보니 안에서 저절로 존경심이 발동했다. 후배는 연신 지지난해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마치 무슨 발견이나 한 듯이 이게 다 월드컵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 뭔가를 함께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연대감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대통령선거, 촛불시위도 다 그 연장선상의 일이며 그것이 새해맞이 일출을 보는 일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거였다. 후배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 것 같았다. 나 같은 사람도 열광했던 일이 적지 않았던 지난해였으니까. 부디 새해에도 그 연대감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희망으로 연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신경숙/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