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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2-01

신경숙의 이창

이런 시를 되풀이 읽었다.

아픈 친구와 밥을 먹었다. 그의 몸은 삶의 바닥에 닿아 더없이 어두웠다. 어둠의 소용돌이치는 말은 귀를 곤두세우고 몸을 구부려도 알아듣기 힘들었다. 입 안에서 씹히는 음식물 소리가 내 귀를 멀게 한 것인가. 허기를 채우는 동안 그의 어둠은 내 몸 밖에 있었고, 그는 배고픔도 못 느끼는 어둠 속에 있었다.

행려병자들이 웅크리고 잠든 분수대 광장을 걸어 그를 배웅하고 돌아설 때는 비가 내렸다. 그는 지하 세계로 내려가 당장은 그 비를 피했고, 나는 비를 맞으며 그의 고통 속으로 젖어 들어갔다. 아무도 대신 질 수 없는 짐. 속수무책의 짐. 혼자만의 짐. 그것들을 부려놓을 곳은 제 속밖에 없다. 그는 자의식 때문에 날이 밝으면 눈이 더 퀭해질 것이다. 고통의 돌기 같은 그의 육신은 제게도 낯설 것이다.

-조은, 고통의 돌기-

대가도 없이 시인이 막 발표한 시의 전문을 이렇게 통째로 옮겨 적어도 되는지 의문이지만 무력하기 짝이 없게 느껴지는 날들 속의 어느 새벽에 이 시를 읽었을 때는 못난 사람처럼 비질비질 울 뻔했다. 아픈 친구와 함께 먹는 밥. 나누어질 수 없는 고통을 사이에 두고 밥을 먹는 두 사람이 눈앞에 보이는 듯해서다. 시를 잘 읽었노라고 시인에게 메일을 보내봤지만 잘못 보낸 건지 어쩐 건지 오늘도 “읽지 않음” 상태로 떠 있다.

내 어머니는 전화하면 첫마디가 밥 먹었냐 이다. 밥 때가 아닌데도 늘 그런다. 나에게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밥은 먹었나 아침밥 먹고 가라…. 늘 밥이 중요했다. 그냥저냥 듣다가 때로 그 말이 아프게 와닿는다. 이제는 밥 먹는 일이 뭐 그리 대수일까마는 세끼 밥 먹는 일이 중요했던 시절에 젊은 날을 보내신 분이라 아직도 습관처럼 밥을 챙기신다. 어려서 초등학교를 십리를 걸어다녔다. 늦잠을 잔 날이면 책가방 챙겨 학교 가기도 바쁜데, 밥을 먹고 가지 않으면 어머니에게 어찌나 혼이 나는지, 찬물에 더운밥을 말아서 그야말로 꿀떡꿀떡 삼키고서라도 대문을 나서야 했다. 사람은 일단 따순 밥을 먹어야 그 힘으로 견딜 수 있다는 게 어머니 생각이었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한 세월이 이십년이 넘는데 지금도 시골에 갈 적이면 어머니가 챙기는 아침을 먹느라 곤욕을 치른다. 새벽에 일어나 만든 음식으로 상을 차려 반찬그릇 따위를 한사코 앞으로 당겨놓으며 많이 먹어라, 식기 전에 먹어라, 하시는 데 물리칠 재간이 없다. 신기하기도 하지. 일단 먹기 시작하면 또 한 그릇을 뚝딱 비우게 되니. 나이를 먹는 것일까. 먹을 때 먹게 되더라도 어머니의 밥타령이 귀찮기만 하더니 어느 날부터인가는 저분이 안 계시면 누가 있어 내 앞에 밥그릇을 당겨놓으며 많이 먹어라, 식기 전에 먹어라, 하겠나, 감상적이 되어서는 챙겨주는 대로 다 먹다가 나중엔 기분이 나빠져 울컥 화를 내기도 한다.

싫어하면서 닮는 모양이다. 살다보니 나도 어지간히 밥깨나 챙기는 사람이 되고 만 것 같다. 늙은이처럼 누굴 만나면 밥은 묻게 된다. 안 먹었다고 하면 그이를 밥집으로 데리고 가서 함께 밥을 먹었다. 밥은 차와 달라서 자주 함께 먹다보면 정이 든다. 입을 벌리고 떨어뜨리고 씹고 깨물고 삼키는 과정을 서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밥의 힘이다. 일월 초의 어느 날은 외지에서 친구가 잠시 귀국했는데 그녀에게 뭘 먹여볼 생각으로 소격동의 북촌에 데리고 갔다. 그 며칠 전에 내가 다른 사람이랑 그 집에 가서 먹어본 보쌈을 입이 닳도록 권했는데도 그녀는 보쌈은 거들떠도 안 보고 일인분에 5천원 하는 왕만두를 탐했다. 그렇게 맛있는 왕만두는 처음 먹어본단다. 그녀가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그 모습을 마주보고 앉아 있자니 되게 흐뭇했다. 며칠 전엔 좋아하는 분이 삼척에 계시는 어머니가 살아 있는 영덕게를 보내왔다면서 삶아놓을 테니 점심하러 오라고 해서 게으름뱅이가 부랴부랴 달려가서는 얼마나 맛잇게 먹었는지. 입이 귀밑에 붙도록 즐거워하며 열심히 흰 게살을 발라내는 나를 보며 그분도 흐뭇했을까

<씨네21>에 글을 시작한 지가 벌써 일년이 넘었다. 시작할 때는 아픈 친구와 함께 먹는 밥처럼,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처럼, 왕만두처럼, 영덕게처럼, 한순간이라도 미간을 활짝 펴게끔 맛난 음식 같은 글을 쓰고 싶었다. 마음뿐으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동안 간 안 맞는 국을 마시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제 마치며 <씨네21>과 독자들의 인내심에 고마움을 표한다. 신경숙/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