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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간첩 리철진>과 <이중간첩>
2003-02-04

세 아버지를 닮았다,다르다

배우 한석규가 돌아왔다. 3년 만에 돌아온 그의 모습이 바로 어제 본 듯 낯익어 보이는 것은 웬 까닭일까 혹시, 영화 속의 그가 여전히 ‘정보부’ 소속으로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물론 <쉬리>와 <이중간첩> 사이에는 <텔미썸딩>이 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그는 여전히 수사관이지 않았던가 그 사이 그가 잠시 파견 근무 나가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자). 3년 만에 동일한 신분으로 영화 속으로 돌아온 한석규.

영화 <이중간첩>은 배우 한석규로 인해 그리고 그 서사공간의 동질성(남북 대립 체제의 최전선으로서의 정보부)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쉬리>(1999)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두 영화의 공통점은 딱 거기까지이다. 이 영화의 속살은 오히려 그 사이에 놓인 두편의 영화(<간첩 리철진>(1999),<공동경비구역 JSA>)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렇다. 한반도의 분단이라는 외상은 이렇듯 집요하게 한국영화(환상의 공간) 속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3년 동안 수행된 4번의 반복. 이 갑작스럽고 집중적인 반복의 의미는 무엇일까 반세기 동안 국책 반공영화라는 억압의 형식을 통해서만 귀환할 수 있었던 한반도의 역사적 외상. 이 네편의 한국영화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외상과의 마주치기를 시도하고 있다. 분단 한반도, 그것은 한국영화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서사적 상상력의 모태인 셈이다. 그런데 분단 현실은 한국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서사적 상상력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제약하는 근본적인 억압이기도 하다(남한 예비군 복장을 한 채 태연하게 침투할 수 있는 북한, 그들의 분방한() 상상력과 비교해보라). 그런 의미에서 이 네편의 영화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억압(저항)을 뚫고 나온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 돌파를 위해 선택된 네 영화의 서사구조와 캐릭터는 서로 닮아 있는 듯 다르고, 다르면서도 닮아 있다.

서사구조가 닮았다, 캐릭터가 닮았다

이 새로운 한국적 장르영화의 포문을 연 것은 <쉬리>였다. 그런데 <쉬리>가 가지고 있는 상상력의 구조에는 변화된 시대상황과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반세기에 걸친 체제 경쟁에서 이제는 남한의 상대적 우위가 확고해졌다라고 하는 자신감이 그것이다. <쉬리> 속의 북한은 절박한 생존의 문제에 직면에 있는 허약한 체제였고, 생존을 위한 마지막 돌파구로 테러를 감행할 수밖에 없는 분열된 체제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쉬리>는 그 화려한 장르적 화법에서뿐만 아니라 그 근본정신에서도 철저히 할리우드적(미국적)이라 할 수 있다(미국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꼽고 있는 것은 더이상 공산주의라는 이념 때문이 아니다. ‘독 안에 든 쥐’인 북한이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수단으로 고양이를 물지도 모른다라고 하는 끊임없는 위협, 이것이 탈냉전 시대에 새로워진 미국의 대북 이데올로기의 핵심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쉬리>가 단지 새로운 포장을 한 ‘반공영화’에 머물고 있다거나 기능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쉬리>의 ‘북한 사람들’에게서 이제까지의 반공영화에서와는 다른 인간다운 숨결과 매력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자신감 덕택이었을 것이다. 영화 <쉬리>를 본 대다수의 관객은 현실로 닥친 북한의 위협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면서 극장문을 나서는 것이 아니라, 불온하게도 이방희(김윤진)의 슬픈 사랑에 가슴 아파했고, 조국의 슬픈 운명에 대해 절규하며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남파 무장간첩’ 박무영(최민식)의 인간적 매력에 대해 이야기했다(사실, 매혹적인 반영웅으로서의 박무영의 존재가 없었다면 <쉬리>의 영화적 활력과 매력은 그만큼 반감되었을 것이다). 할리우드 대작 <타이타닉>의 흥행기록을 깬 <쉬리>의 신화에는 이렇듯 영화의 안과 밖에 변화된 시대의식이 반영되어 있었다. 어쨌든 <쉬리>를 통해 북한과 북한인들은 그렇게 인간의 얼굴을 하고 우리 곁에 다가왔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그 어조와 정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간첩 리철진>과 <공동경비구역 JSA>이 <쉬리>와 공유하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간첩 리철진>은 <쉬리>의 기본적인 상황 설정(식량난에 처한 북한의 체제 위기)을 반복하면서도 한층 더 인간적인 북한 사람(간첩)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감독의 재기발랄한 상상력과 화법으로 그려진 리철진의 모습은 순박하고 소박한 시골 청년의 그것이었고, 그랬기에 체제로부터 버림받아 죽는 그의 슬픈 운명은 정말 가슴아픈 것이었다. 무엇보다 생계 걱정이 우선인 평범한 소시민으로서의 고정간첩은 마음 쓸쓸한 연민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공동경비구역 JSA>에 이르면 북한 사람은 급기야 믿고 의지하고 싶은 든든한 맏형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아우의 생명을 구해주고 냉엄한 현실을 가르쳐줄 뿐만 아니라, 아우의 결정적인 인간적 허물을 너그럽게 덮어주는 맏형으로서 말이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최대 매력은 체제 대립의 최전선인 전방에서 이렇듯 가슴 찡한 형제애의 상상적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냉엄하다. 그 남북한의 조우는 상상의 공간에서조차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반복과 변주, 그리고 최후의 선택

돌이켜보면 <이중간첩>은 앞선 세 영화들의 많은 요소를 차용/반복하고 있다. <쉬리>와는 긴장감 넘치는 첩보 스릴러와 체제 대립이 낳은 남녀의 비극적 사랑이라는 장르적 설정을 공유하고 있다. <간첩 리철진>과는 체제에 의해 이용되고 버려지는 간첩, 그리고 남한 내에서 안착한 채 오랫동안 활동해온 고정간첩과 그의 딸이라는 인물을 공유한다. 내러티브의 전개를 위해 제3국이라는 공간(또는 제3국인)이 필요했다는 점에서는 <공동경비구역 JSA>와 유사한 점이 있다. 이러한 반복은 분단 현실이라는 것이 서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원천이면서 동시에 억압으로 작용하는 것임을, 다시 말해서 가능한 상상력의 범위에 어떤 임계점을 설정해주는 것임을 뜻하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이중간첩>이 단순한 반복만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중간첩>은 그 다양한 영화적 상상력의 자산(한계)을 가지고 80년대로 돌아가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 모험은 자꾸만 가벼워지려고 하는 한국영화의 현실 속에서 일정한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앞선 세편의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현재였다. 따라서 체제 경쟁에서의 상대적 우위라는 현재적 상황 설정을 통해 무리없이 인간화된 북한 사람들을 창조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중간첩>이 직시하고자 하는 우리의 80년대는 서슬퍼런 냉전의 기운이 한반도를 감싸고 있던 때였다. 이렇듯 어느 정도 여유있는 상상력의 공간을 허용하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삼엄하고 답답한 80년대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점이 앞선 세 영화와 <이중간첩>의 가장 큰 차이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체제의 핵심으로 들어간 주인공 림병호의 이중적 위치를 통해 80년대 남한의 진짜 현실을 직시하고 드러내는 데 많은 영화적 에너지를 투자하고 있다. 귀순 용사 림병호가 남한에 들어와서 받은 최초의 대접은 혹독한 물고문과 전기고문이었다. 자유가 그리워서 귀순했을 뿐이라는 림병호의 대답에 수사관은 이렇게 대답한다. “자유, 웃기지마. 여기도 그런 거 없어, 정보 계통에서 일했다는 새끼가 그것도 몰랐다는 게 말이 돼!” 북파 공작원 침투 작전에 실패한 남한의 정보부의 책임자 백승철(천호진)은 체포된 고정간첩 송경만(송재호)과 몇몇 해외 유학생들을 하나의 그림으로 엮어 간첩단 사건을 조작함으써 그 위기를 벗어나고자 한다.

삼엄한 80년대에 위장 귀순한 ‘이중간첩’ 림병호의 비극적 숙명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그의 비극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은 정작 마지막 죽음의 순간이 아니다. 끝까지 당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는 그는 자신의 계속적인 임무 수행을 위해 자신의 정치적 아버지인 청천강 송경만에게 고문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너같이 남한의 개가 된 놈에게는 한마디도 해줄 수 없다”고 외치는 송경만을 향해 그는 절규한다. “나를 개로 만든 것은 바로 당이었다”라고. 림병호의 진짜 비극은 그 위장된 절규가 단지 위장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체제와 신념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는 개가 될 것을 주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체제를 버려야 하는 개가 되고 마는 숙명. 아마도 그가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지키고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짜 배신자인 윤수미를 죽이는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는 그녀를 선택한다. 대물림된 모태신앙으로, 따라서 한번도 진정 자신의 것일 수 없던 이념의 굴레들 쓰고 화석화된 삶을 살아야 했던 윤수미의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을 림병호는 끝내 거부하지 못한다. 어쩌면 ‘운명의 여인’ 윤수미와의 도피 생활은 림병호 자신에게도 이념의 굴레 속에 화석화된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삶을 돌려받은 아주 짧은 구원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남북한 어느 곳에서도 가능하지 않았던, 제3국에서의 짧은 행복. 윤수미의 임신으로 진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되었을 법한 그들을 그러나 체제는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왜 제3국, 제3자인가

<이중간첩>의 서사공간은 제3국으로 시작(동베를린)해서 제3국(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끝맺는다. 궁지에 몰린 림병호와 윤수미의 탈출을 도와주는 인물 또한 제3국인이다. 분단된 한반도는 여전히 상상 속에서나마 자신의 이야기를 완결하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일까 그 옛날 제3국행을 선택해야만 했던 <광장>의 이명준은 <공동경비구역 JSA>를 통해 돌아와 서로 대면하지 못하는 남과 북의 형제들을 매개하며 서로의 진짜 진실을 알 수 있게 해주고 그럼으로써 비극을 완성한다. 이 새로운 한국적 장르의 포문을 연 <쉬리>가 과도할 정도로 제3자(할리우드)의 화법을 차용해야 했던 것도 어찌 보면 필연이었다. <간첩 리철진>에는 그러한 제3자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의 리얼리즘의 무게조차 의도적으로 지워버리고서야 가능했던 일이다. <이중간첩>에서 림병호를 암살함으로써 최종적으로 비극을 마무리하는 것이 국적 불명의 제3국인이라는 것 또한 하나의 필연처럼 보인다. 애초부터 제3자의 개입을 통해 탄생한 분단 한반도는 자신의 비극조차 제3자의 개입을 통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 변성찬/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