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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출신 4인조 밴드 시규어 로스의 3집 앨범
2003-02-05

미혹의 신비로운 추상화

아무런 정보없이 이 음반을 마주하게 된다면 당혹스러울 것이다. 흰 커버에 새겨진 것은, 발음도 부재하고 해석도 난해한 상형문자 ( )와, 그 안의 추상 같은 그림뿐이므로. 게다가 수록된 여섯곡은 곡명도 없다. 가사나 크레딧을 기대하고 6장짜리 부클릿을 열어봤자 백지와도 같은, 그렇다고 백지라도 할 수도 없는 흐릿한 잔영만이 감돌 뿐이다.

불친절한 이 음반의 주인공은 아이슬란드 출신의 4인조 밴드 시규어 로스(Sigur Ros)다. ‘승리의 장미’라는 뜻의 이 밴드는 1997년 데뷔작 <Von>(Hope), 1999년 2집 <Agaetis Byrjun>(A Good Beginning)을 통해 고국의 기린아로 단숨에 뛰어올랐음은 물론, 유럽에 진출하면서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같은 나라 출신 비욕의 극찬이나, <바닐라 스카이>의 사운드트랙에 그들의 곡이 수록된 사건은 이들의 신화 만들기를 가속화시킨 일화일 것이다. 그리고 3년 만에 3집 앨범이 당도한 것이다. 이 앨범은 시규어 로스의 여정을 전작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한 정점까지 부상시킨다.

빙하로 둘러싸인 고국의 ‘랜드 스케이프’가 소리로 반향되듯 장활하면서도 차가운 분위기를 보여주는 ‘사운드 스케이프’, 시규어 로스만의 상상의 언어 ‘희망어’(Hopelandic)에 의한 불가해한 울부짖음과 웅얼거림이 숭고와 미혹을 교차시킨다. 베이스에 드럼스틱을 사용한다든가, 기타에 바이올린의 활로 긋는 데서 오는(‘악기의 재발명’) 신비로운 사운드를 두고 ‘포스트 록’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주변을 부유하는 몽환적인 황홀함을 두고 ‘이스리얼’한 앰비언트라고 호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집이 더 접근이 용이하고 형태를 느낄 수 있었던 데 반해 이번 앨범은 무정형의 신비한 기운이 감돈다. 이 난독적 사운드를, 단아한 피아노, 깔끔한 기타, 특히 스트링 쿼텟 ‘아미나’ 등 고급스러운 인스트루멘테이션이 돕고 있다. 이들이 그려내는 사운드는 그림으로 치면 추상화에 가까운데 때로는 신비로운 성가(2번 트랙)를, 때로는 아름답고 영롱한 서정시(3, 4번 트랙)를 추가한다. 4번 트랙에는 30여 초 가량의 침묵이 내장되어 있는데 이는 앨범을 전반부 ‘sweet’와 후반부 ‘heavy’로 나누기 위함이다. 전반부는 그런 대로 밝고 정제된 듯한 인상이 드는 반면, 후반부는 미니멀한 화두에서 출발해 무한 증식하는 음열들을 보여주는 듯하다. 후반부가 전반부보다 더 긴 편인데 한없는 느림과 적막을 견디면(!) 말미에 일순간 증폭되며 터져나오는 장대한 풍취(혹은 우주로의 개방)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음반 제목 이야기. 음악 외의 외적인 것으로부터 ‘판단중지’를 위한 괄호치기라고 심오한 해석까지 동반될 형국인데, 사실 그 원형의 문양은 괄호가 아니긴 해도 어떠한 해석과 기술도 거부하는 그들의 무언의 해명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은 것인지도 모른다. 저토록 외적인 부분에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으니. 혹은 신비화 전략 혹은 폼잡기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사실 그간 행해온 콘서트 리스트를 통해서 곡명 역시 추적할 수도 있다. 참고로 그들의 ftp는 개방되어 있다. 또한 홈페이지에서 그들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다). 아무렴, 어떤가.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 )의 ‘음악 자체’에 몰두하라는 그들의 정언 명령을 일단은 받아들여 귀를 귀울인 뒤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이므로.최지선/ 웹진 <weiv>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