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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행제로>의 `별난 형제` 작가 이해영,이해준 이야기 [4]
2003-03-07

두 남자가 권하는 시나리오-<살인의 추억>시나리오계의 만루홈런

우연히 접한 시나리오 <살인의 추억>. 소문대로 그 시나리오는 ‘죽였다’.

장점 하나하나 나열하자면 홍보대사로 오해 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 시나리오는 드라마를 기본적으로 제한하는 설정들이 있다. 관습적으로 터부시되는, 그래서 작가가 비겁하게 피하려 하는 소재들을 품고 있는 것이다. 정면승부가 가장 좋은 전술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내공이 부족한 이가 섣불리 달려들었다간 본전도 못 찾기 일쑤다. <살인의 추억>은, 대단히 많은 장애들을 태생적으로 품고 있다. 시나리오의 배경은 한국의 상처뿐인 80년대. 게다가 스릴러의 배경이란 곳이, 경운기가 시도 때도 없이 탈탈대는 시골 촌구석. 연쇄살인을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도 범인이 누군지 알 수 없다는 실제 미결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실제 희생자와 가족들이 우리 이웃처럼 존재하고 있는 현실에서 사회적인 민감함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으며, 사회적 아픔을 감싸안아야 한다는 사명감 또한 지녀야 한다.

그러고보니 온갖 퍽퍽한 제한요소들의 총집합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다. 아주 뛰어나다. 상처뿐인 한국 현대사를 ‘뒷배경’이 아닌, 메인 플롯과 캐릭터에 적극 차용함으로써 드라마에 상당한 힘이 실렸고, 너른 농촌의 벌판 위에 덩그러니 시체를 둠으로써 정서적 시각적 시너지 효과를 누렸으며, 범인을 끝내 잡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한 수사는 단지 플롯을 ‘열어두는’ 데 머물지 않고 당시의 사회적 아픔과 상처를 현재 시점까지 확대 연장시키며 단순한 ‘추억 속의 살인사건’이 아닌, 2003년 오늘 이 순간에도 바로 우리에게 살아 숨쉬는 멍에, 우리가 한동안 잊었던 숙제를 상기시키며 시대적으로 가치있는 화두를 던지는 경지까지 다다른다.

쓰다보니 굉장히 딱딱하게 들리지만, 이 시나리오의 위대함은 상당한 영화적 재미까지 성취하고 있는 지점에 있다. 이쯤되면 ‘만루 홈런’이라고 해야 할까. 이 영화에는 끔찍한 공포와 굉장히 센 유머가 공존한다. 물과 기름처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아교풀처럼 끈덕지다. 그렇다. 곧바로 직시할 수만 있다면 현실은 코미디가 된다. 전작 <플란더스의 개>에서도 느껴지지만, 이번에는 발군이다. 내공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고 느껴지는데(봉준호 감독과 개인적 친분 없음. 싸이더스와도 역시 관계없음!) <살인의 추억>은, 끔찍한 현실을 평범한 일상으로 치환하지 않는다. 끔찍함과 코믹함, 양 극단의 감정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묘한 기운을 뿜어내는 것이다.

작가로서 ‘도저히 질투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시쳇말로 ‘뜻도 있고 재미도 있는’ 작품. <살인의 추억>은, 이런 명제에 대한 근사한 모범답안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우리를 비롯한 이 땅의 시나리오 작가들이여, 온갖 장애에 도전하자! 아니, 부러 ‘장애’를 설정하자. 장애는 저항을 낳는다. 저항은 창조의 원동력이 아니던가.

(작가를 지망하시는 분들께: <살인의 추억>을 보시려거들랑 관람 전 시나리오를 구해서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구하는 방법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든 구해보세요!)글 이해영, 이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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