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이창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잖아,<키즈 리턴>

누가 백수의 특권이 늦잠이라고 했단 말인가?

세상은 바쁘게 출근하며 움직이고 유치원 아이들까지 차타고 움직이는 소리들이 들릴 때까지 이불 속에서 ‘난 이대로 끝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누워 있기란 지옥이다. 세상이 끝난 거처럼 내 방에 처박혀 있을라치면… 은하철도 999 휴대폰 벨소리가 울린다. “정영? 나야.” 남자임에도 가냘픈 목소리. 오호라 오늘 이 선배에게 저녁 얻어먹고 오홋 술도 얻어먹고 으힛!!

학교 다닐 때 학생회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어둡고 눅눅한 학생회 복도에서 가끔 부딪치곤 했다. 10년 가까이 그 선배는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나도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7년 가까이 학교를 다닌, 학교 최대의 왕바보들이었다. 그러기에 둘은 서로를 재수없어 했다. ‘쳇 아침부터 재수없어.’ 그도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저 키꺽다리 여자앤 언제까지 학교에 남아 있는 거야?’ 그 당시 집회 때 총체극이나 선동극이 있을 때면 그는 언제나 머리에 띠를 두르고 가냘픈 몸매를 뽐내며 앞에서 새내기들과 선동춤을 추었다. 그럴 때마다 난 ‘여자보다 더 유연하고 이쁘네’ 하고 감탄하며 땅바닥에 철퍼덕 앉아 담배를 꼬나물고 물끄러미 보곤 했다

그러다가 몇년 뒤 영화판에서 선배를 다시 만났다. “아웅 그때 그 여자같이 예쁘게 생긴 노땅.” “아웅 그때 그 남자같은 키꺽다리!” 우린 곧 고개를 돌려 재수없어를 외쳤고 그렇게 영화판에서 동료가 되었다

그 당시 일본영화들이 이와이 순지의 <러브 레터>로 전국을 휩쓸 때 기타노 다케시의 <키즈 리턴>이 조용히 개봉되었다. 이것을 본 뒤 다리를 휘청이며 극장을 걸어나온 뒤 난 속으로 ‘이와이 순지는 가짜야. 기타노가 진짜야’라고 웅얼거릴 정도였다. 그뒤 감동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나에게 선배가 말했다.

“아웅 난 그 영화 너무 싫어. 몸서리치며 봤어.” “왜?” “주인공 같은 애들한테 삥뜯기는 게 바로 나야… 나라구…. 윽 걔네들 너무 싫어.” “그럼 형은 모범생이었다는 거야, 뭐야? 에잇 더 재수꽝이네.”“그런 게 아니라… 으음… 난 대학 때도 당했잖아. 동네에서 그것도 중학생들한테 돈내놓으라고 협박당했는데 내가 대학생이라고 하니 아무도 안 믿는 거 있지. 그래서 가진 건 회수권밖에 없다고 하니 대학생 회수권을 빼앗아 들고는 대학생이야 하며 아하하 웃는 거 아냐… 으잇….”

중학생에게 회수권을 빼앗긴 대학생이라…. 물론 가냘프고 어리게 생긴 선배로선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대학 때 학교집회에서 열심히 후배들과 전대협 춤을 추던 그와 학교 밖의 그가 생각이 나며 학교 밖이 진실된 그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니 오히려 우리의 학교생활이 가짜같이 느껴졌고 난 우울해져버렸다.

영화의 마지막에 야쿠자에도 적응 못하고 권투에서도 적응 못한, 한마디로 낙오한 그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자전거로 돌며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 “너도 우리가 끝났다고 생각하니?” “아냐. 우린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해봤잖아….”

그 선배는 지금도 여릿여릿하며 예쁘장한 외모를 간직하고 있다. 난 지금 여자임에도 머리가 빠지는 뚱보가 되었다. 하지만 그 선배는 이 어려운 상황에도 꾸준히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중학생에게 협박당하며 회수권을 빼앗긴 그 선배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이 마당에 뚱보 후배가 삥을 뜯는 게 미운 짓일까, 과연!! 크흐흐흐… 전국의 백수들이여! 주문을 외듯 웅얼거리자, 이 봄에!!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해봤잖아” 또는 “다시 삥뜯으며 괴롭히자”라고.김정영/ 영화제작소 청년 회원·프로듀서 sicksadworld@orgi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