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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 이야기 - 줄리언 무어 [2]

그대, 불온한 어머니여<부기 나이트>에서 <디 아워스>까지, 떠도는 뮤즈 줄리언 무어

“이 여자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누군가 묻는다. 붉은 머리, 각진 턱, 창백한 얼굴 위에 촘촘히 박힌 주근깨, 마흔이 가까운 늦은 나이에 수면 위로 자신을 드러낸 줄리언 무어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대중에게 그리 익숙한 이름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난 5년 동안 인디와 메이저, 비극과 희극을 오가는 14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스멀스멀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머릿속에, 관객의 심장에 자신의 존재를 박아내려갔으며, 기존 메이저 여배우들이 소비되었던 것과 정반대 지점에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비옥한 영토를 가꾸어왔다. 그리고 올해 아카데미는 자살충동을 느끼는 신경쇠약 직전의 어머니를,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발 아래서 처절하게 무너지는 것을 목격해야 하는 가정주부를 연기한 그를 여우 조연, 주연상에 동시에 노미네이션시키는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 배우의 무엇이 안정지향적인 할리우드의 실험정신을 북돋게 했을까. 긴 시간 숨어 있었지만 결국엔 자신의 독특한 빛을 들키고야만, 줄리언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그녀는 불안해 보였다. 그러나 1939년 여름엔 런던 전체가 불안했다.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처럼….” - <애수>

불안하다. 애써 밝게 웃고 있지만, 숨을 고르고 새처럼 지저귀는 목소리로 대답하지만, 그는 늘 불안하다. <디 아워스>에서 3살짜리 아들을 불안으로 몰아넣은 그 어머니의 미세한 감정의 균열은 스크린 너머 관객까지 불안하게 만든다. 저 여자는 이제 죽음을 향해 걸어가게 될 거야.

잘난 남편과 멋진 집, 누가 봐도 부러울 만한 삶을 살지만 집안에 틀어박혀 혼자 멍하니 TV만 보다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는 주부 캐롤 화이트로 등장한 <세이프>에서도, 돈 때문에 유지한 결혼생활이었지만, 막상 죽어가는 늙은 남편 앞에서 자신의 깊어버린 사랑을 발견하고 황망해하는 약물중독자 린다로 분한 <매그놀리아>에서도, 격정적인 사랑에 휩싸인 유부녀를 연기한 <애수>에서도, 그는 늘 불안의 정점에 서 있었다. 평화로운 미소 뒤에 도사리고 있는 예민한 불안과의 동거에 대해 그는 아는 게 좀 많은 배우다. 그러나 줄리언 무어는 그런 내부의 혼란을 외부적 도구의 도움을 받지 않은 채 표현한다.

전시에 피어난 안타까운 로맨스를 그린 멜로영화 <애수>의 오디션을 위해 영국으로 날아간 줄리언 무어에 대한 닐 조던 감독의 첫인상은 남달랐다. “오디션을 보러온 수많은 영국 배우들은 물론 그녀보다는 훌륭한 영국 악센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울음을 터트리는 신에서 줄리언 무어는 결코 울지 않았다. 그의 연기에는 독특한 강인함과 간결한 방식이 있었다.” 그의 연기는 곧잘 관객의 감정을 묘하게 어질러놓아 눈물이 터지기 일보직전으로 몰아가지만, 정작 그는 눈물이 흐르려는 순간 활짝 웃어보이거나 냉정하게 침묵한다. <파 프롬 헤븐>에서 역시 견고하게 자신을 지탱하고 있던 남편과 친구, 사회적 믿음, 심지어 수줍게 찾아온 로맨스까지 송두리째 날아가는 순간에도 그는 그 미칠 듯한 삶의 불안을 한마디 대사나 한 방울의 눈물로 치환하지 않는다.

“<부기 나이트>를 찍을 당시 포르노 배우 엠버로 등장해 ‘난 임신이 안 되니까 안에다 해줘’ 같은 외설적인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여대는 그녀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리고 나는 궁금증을 억누르지 못해, 다른 어떤 배우들에게 감히 묻지 않았던 질문을 던졌다. ‘줄리언, 당신은 그런 대사를 내뱉고 있을 때 머릿속으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죠?’ 그녀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저… 다음 대사가 뭘까, 까먹지 않으려고 집중해요.’ 아… 그건 정말 못돼먹은 포르노 여배우에게서나 나올 대답이었다.” - 존 C. 레일리

<애수>

<에볼루션>

비단 존 C. 레일리(<디 아워스>에서 줄리언 무어의 세상없이 멍청한 남편으로 등장했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애수>를 본 관객이라면 줄리언 무어가 정부인 랠프 파인즈와의 정사가 절정에 이른 순간, 남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데도 “잠깐만요, 여보”라고 말하던 침착한 목소리를 기억할 것이다. 로버트 알트먼의 <숏컷>에서 오물을 씻어내기 위해 치마를 훌렁 벗었을 때, 속옷조차 걸치지 않은 그의 반나체를 보는 당황스러움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포르노 배우가 되어도, 요란한 섹스를 벌여도, <매그놀리아>에서처럼 입에 “FUCK”, “BULLSHIT!”을 줄줄이 매달고 다닌다 해도 결코 싸구려처럼 보이지 않는다. 강한 매력을 풍기지만 어떤 낮은 곳에 임한다 해도 휘발되지 않는 태생적 기품, 이러한 우아한 관능미는 줄리언 무어가 연기한 <한니발>의 스탈링을 <양들의 침묵>의 조디 포스터의 지성미와 차별시킨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숭배할지언정 함부로 소유하거나 범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여성’을 뛰어넘은 강한 ‘모성’이 지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엠버는 최고야. 아주 훌륭한 엄마지. 사랑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라구!” - <부기 나이트>

<부기 나이트>에서 약물에 찌들어 살아가지만 포르노 공동체의 정신적인 대모인 엠버는 어쩌면 줄리언 무어 본인과 가장 가까운 캐릭터일는지 모르겠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줄리언 무어를 놓고 엠버 역할을 써내려갔다. “아이러니는 내가 시나리오를 쓸 때만 해도 실제 그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는 거다. 그런데 그것이 결과적으로 진짜 줄리언과 비슷했다. 매우 온화하고, 어머니 같으며, 모든 이를 자상하게 돌보는….” 줄리언 무어의 이 자애로운 품성은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사랑을 보채는 어린 ‘롤리타’들에게 경도되어 있는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단연 돋보인다. 물론 60년생으로 올해, 마흔넷의 고개를 넘었다는 물리적인 나잇값도 있겠지만, 세상 모두를 그 흰 젖가슴 아래 품을 듯한 그의 어머니다운 태도는 그가 프로페셔널이라는 핑계 속에 일상의 기쁨을 포기하지 않는 데서 연유한다.

<디 아워스>

<부기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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